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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은 파독광부가 독일땅에 온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63년 파독광부 1진이 독일에 도착하면서 재독동포사회가 시작되었고, 전세계 동포사회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독광부분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셨지만 정작 개인적으로는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고생도 많으셨을 겁니다.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어찌 몇마디 필설로 다하겠습니까만 파독광부분들중에 몇분이 독일땅에 와서 겪은 체험을 여기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파독광부의 삶은 그 자체가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러니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어렵게 글을 써가실 때, 서투른 점이 있더라도 많은 성원 바랍니다. 

김재승칼럼 어머님 죄송합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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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3,282회 작성일 13-08-07 09:59

본문

이렇게 몇 주 밥을 해 먹다가 방 동료 중 매형 되는 사람이 자기는 우리와 입맛이 맞지 않아 밥을 같이 해 먹을 수 없단다.
입맛이 맞지 않다는데 할 수 없이 우리는 다음 주부터 처남 되는 동료와 둘이만 밥을 해 먹었다. 헌데 이 매형 되는 사람은 금요일 저녁에 식당에 내려가 빵을 한 자루 싸온다. 2일 동안 그 빵으로 식사를 해결할 생각이다.
우리만 밥을 해 먹으면서 빵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밥 좀 같이 먹자는 소리를 안 할 수 있단 말인가?  “식사 좀 같이 합시다.”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저를 가지고 대든다.
입맛이 안 맞아서가 아니고 그 돈 아끼려고 하는 빤한 짓이다.
몇 번 하고 나자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처남이야 매형 속셈을 빤히 알았을 테니 입장이 곤란했을 것이다. 다음부터는 밥 먹으라는 소릴 하지 안했다. 처남이야 입장이 곤란하니 자기가 밥 먹어라 는 소리는 할 수 없지 않은가? 우리만 밥을 먹기 시작하니 “왜 오늘은 밥 먹으라는 소릴 안하지?” 하는 것이다.
지독한 자린고비다. 성격은 모가 나지 않은 것 같은데 돈에는 찔러도 피한방울 나오지 않을 사람이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워낙 고생만 했던 사람들이기에 이렇게 독해지는 모양이다. 이 동료는 얼마 지나자 월급 받은 돈을 모아서 동료들한테 이자놀이를 시작한다.
급하게 한국으로 송금시켜야 될 사람, 기숙사에서 주말이면 벌어진 노름판에 돈 떨어진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금방 되돌려 받아도 1할 이자를 꼭 쳐서 받는다.
사실 이렇게 지독히 돈을 모으는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은 아니었다.
기숙사에서 살지 않고 방을 얻어 나가서 사는 사람 중 한 동료는 출근하면서 빵을 싸가지고 가려면  빵 속에 넣을 소시지 값이 비싸니까 빵 대신 밥을 해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김으로 말아가지고 가서 지하에게 먹는 사람도 있다. 덕분에 독일 사람들한테  “Reisstange”라는 별명을 얻었다. 계중엔 한 달에 용돈을 50DM이상 쓰지 않는 사람, 주말이나 휴가철이면 다른 농장에 가서 일을 거들어 월급 외에 수입을 올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허지만 이 동료는 더 지독한 것 같았다.  개고기인줄 알고 개가 그려진 깡통을 사다가 익혀서 먹으면서 나더러 맛있다고 한 일, 사슴머리가 그려진 술을 녹용주 인줄 알고 사다가 옷장에다 넣어놓고 혼자만 한잔 빨리 마시고 옷장 문을 잠그는 사람, 정말 이야기 거리가 많은 사람이다.
독일에서는 매달 내는 소득세를 년 말 정산을 한다.
근무를 하기 위해 쓰임세가 많았거나 한국에 있는 가족들 생계유지를 위해 송금을 많이 한 사람에게는 연말에  세금 반환을 많이 해준다.
가족을 한국에 두고 매달 생활비를 송금하는 사람들은 세금 환불 액이 참 많다. 근거서류와 세금정산신청서를 잘만 작성하면 100%까지 돌려받는 사람들이 있다.
세금신청을 해놓고 기다리는 시간이 길고 또 송금액이 많지가 않아 신청해 보아도 별로 되돌려 받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은 본인의 세금카드를 남한테 팔아넘긴다.
그 사람이 무슨 방법으로 얼마를 찾아서 쓰든지 관여치 않고 본인의 세금을 팔아넘기는 것이다. 일 년 내는 세금이 3-4천DM이 넘는 사람들도 많은데 30%에 사다가 잘 신청해서 80%만 나와도 남는 장사 아닌가? 이 사람도 그 세금 장사를 시작했다. 세금카드를 남의 걸 신청하니 가짜 근거서류를 만들어야 됨은 필수다.
한국의 가족사항을 여기 관청에서 확인할 수가 없으니 가짜로 만들어도 발각이 나지 않아 모든 서류가 다 가짜다. 감자로 도장을 파서 부양가족증명서를 만들고 송금영수증도 위조해서 만들어 재미를 보았던 것 같다.
몇 년 후에 K-Lintfort에 한 통역했던 사람이 그 짓을 하다가 발각되어 벌금을 물고 영창생활을 한다는 소문이 나고 나서야 그 짓을 중단했지만 돈을 버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았던 사람, 한국에 몇 년 만에 휴가를 가면서도 아이들과 아내의 선물하나 사가지 않고,
돈이 있으면 마누라 바람난다고 생활비 외에는 한 푼도 더 안주었던 사람이다.
헌데 30년 후에 우리 가족이 이곳 Frankfurt로 이사를 와보니 그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한번 만나 형식적인 인사만 하고 헤어졌지만 그 지역에서는 그 사람이 어느 한국 사람인 사기꾼한테 50만DM을 사기 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루는 사기당한 이야기를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처음에 돈을 빌려가서 이자 날짜가 되지 안했는데도 약속한 이자보다 더 많이  선물과 같이 가져와 식사대접도 하고, 아버지, 아버지 하면서 계획적으로 수작을 부린 꼬임 수에 철떡 같이 믿고 그 많은 돈을 빌려주었다는 것이다. 계획적이고 확실한 서류로 근거도 남기지 못하고, 또 근거가 있다 해도 어떻게 받겠는가?  어떻게 모은 돈인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동안 한국에서 가족들을 다 초청해서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지금도 가족들에게 멸시당하고 사는 모습을 보니 참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돈 욕심을 너무 내다가 돈에 당한 꼴이다.
 
독일말도 조금씩 늘어가고 광산 생활도 조금씩 적응이 되어간다. 몇 개월이 지나니 일은 그런 대로 눈치 보아가면서 할 수 있을 것 같다.
밤 반으로 옮긴 다음엔 반장덕분에 혼자서 물자를 운반하는 직책을 맡아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른다. 반장이 외국인을 무시하는 것 같고, 특히 독일 말을 잘 못하는 한국동료들을 무시하는 언행에 참을 수 없어 한번 삽을 들고 뒤쫓아 가며 혼을 내준 일이 있었는데, 다행이 사건화를 시키지 않고 “나는 너하고 같이 일을 할 수 없으니 혼자서 하는 자제운반이나 하라.”고 하면서 그 일을 시켜줘서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맙게 생각한지 모른다.
기차로 실고 온 자재를 Kuli에 실고 다니며 필요한 곳에다가 내려주면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이라면 3년 보내는 것이 수월할 것 같다. 일을 하면서 졸리기만 했던 어려움도 점차 숙달이 되니 참을 만 했다. 광산월급은 용돈만 제하고 꼬박꼬박 부모님께 송금했다.
빨리 빚 속에서 벗어나서 시골에서라도 쪼들린 생활에서 탈피시키고 싶은 욕심에서다.
“제발 아버님께서 옛날 같은 생활을 하지 말고 무슨 일이나 벌리지 말아야 할 텐데.”하는 생각뿐이다. 가끔 작은아버지와 만나서 지금까지 아버지께서 하셨던 일들을 들추어 보며 아버지만 착실하게 잘 하신다면 지금이라도 희망이 있다. 라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버지의 피해자중 한사람이었던 작은아버지도 잘해주기만 바란다는 이야길 하곤 한다. 
이곳에 고향사람들이 다른 광산 여러 곳에  와 있어서 주말이면 고향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기도 한다.  같이 Holland 여행도 다녀오고, 누군가 생일이 되면 서로 초청도 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즐거움도 있다. 혼 자서들 살다보니 음식솜씨들은 여자들 못지않게 좋다.
기숙사에서 일주일 내내 먹기 싫은 독일음식만 먹다가 고향사람들 찾아가 한국음식 먹는 날이면 입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다들 기숙사에서 살지 않고 집이나 아파트를 세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 음식은 마음대로 해서 먹고 있는 것이다.  나도 기숙사 생활을 벗어나고 싶었다.
절약도 절약이지만 입맛에 맞지 않은 독일음식을 좀 먹고 나니 음식을 쳐다보기도 싫고, 가끔 기숙사에서 한국 사람들끼리 술들을 마시고 싸움들을 하면서 주위를 소란스럽게 하는 모습이 제일 싫었다. 그냥 대화의 의견충돌이 아닌 칼부림이나 맥주를 마시다 맥주병을 깨서 위협하는 모습들은 한국 사람인 내 자신을 영 부끄럽게 만들었다.
사실은 나도 큰 사고를 낸 적이 있었다.
어느 토요일 저녁, 동료와 어디를 다녀오다가 맥주나 한잔 하고 들어가자며 기숙사 주위에 있는  맥주 집엘 들어갔었다. 추운 겨울에 내가 산 조그마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던 터라 두꺼운 잠바와 장갑은 필수다. 맥주 집에 들어가 보니 다른 광산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는 투니지아 사람들이 7-8명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서로 인사를 하고 장갑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맥주를 한잔 시켜 마시다가 잠깐 화장실에 다녀와서 보니 내 장갑이 없어졌다.
처음엔 장난이겠지 싶어 웃으면서 왜, 내 장갑을 감추었냐? 고 말하면서도 주겠지 하는 생각에 맥주를 한두 잔 마시다가 원래 맥주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또 오토바이를 타야 가야하기에 많이 마실 수 없어서 그냥 돌아오려고 장갑을 달라고 했으나 이 사람들이 오히려 시비를 걸며 장갑을 가져가지 안했다는 것이다. 맥주집 주인도 빨리 돌려주라고  거들었지만 오히려 욕지거리에 자기들한테 바가지 씌운다며 언성을 높였다. 겨울에 장갑 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나도 화가 나서 같이 언성이 높아지며 시비가 되자, 투니지아 사람들의 다짜고짜 나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우리라고 참을 수가 없지 않은가? 우리는 2명이지만 결코 꿇릴 수는 없다 는 생각에  8대 2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맥주 컵이 날아가고 세워 논 옷걸이를 휘두르며 맥주 집은 난장판이 되었다.
나도 언제 맞았는지 얼굴에서 피가 흘러내려왔다. 코피가 아닌 눈썹 밑과 입술이 갈라져 피가 흐르는 것이다. 나도 악이 바치자 손에 잡히는 데로 집어 들고 그 사람들을 공격하자 겁이 난 그 사람들이 도망을 갔다. 끝까지 쫒아가려고 오토바이를 탔다. 그동안 맥주집 주인이 경찰에 신고를 해서 벌써 경찰차가 싸이렌을 울리며 오는 게 아닌가. 분해서 경찰과 관계없이 쫒아가자 경찰이 차로 나를 막으며 오토바이에서 끓여내려 타고 온 차안에 쳐 박았다.
얼굴엔 피투성이, 조사할 겨를도 없이 암블란스를 불러 병원으로 보낸다.
싸움을 하고 왔으니 병원에서는 얼마나 미워했을까? 응급실로 가서 상처를 꿰매고 마취가 깨어나자마자 새벽에 기숙사로 돌려 보내버린다.
새벽에 돌아와 기숙사에서 누워서 잠만 자고 있는데 기숙사장이 상처가 너무 심해서 안 된다면 다시 차를 태워 병원으로 보낸다. 마지못해 입원을 시킨 병원에서는 하루저녁을 그곳에서 재우고 이튿날 다시 내 보냈다.
헌데 내가 병원에 하루 누어있는 날 기숙사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단다. 내가 맞았다는 소리를 듣고 동료들이 흥분을 해서 투니지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기숙사를 찾아가 머리 곱실거리는 투니지아 사람만 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폭행을 가해 8명을 입원시키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 한국동료들이 흥분한 이유는 나를 착하게 보았던지 “재승이 같은 착한 사람이 폭행을 당했다는 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투니지아 사람들이 잘못한 거야. 이것 한국 사람들에게 선전포고 한 것이야. 이번에 혼을 내야 다시는 이런 일이 없다.”며 50명이 넘는 한국동료들이 그 사람들 기숙사로 찾아갔다 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 이지만 경찰차와 암블런스가 대기하고 있으면서도 말리지도 못하고 맞아서 쓰러진 사람마다 실고 가서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그곳 현지인들에게도 인심을 못 얻으며 살아온 터라 그 지역 현지인들이 태어나서 최고로 재미있는 구경을 했노라고 재미있어라 했다한다.
그중에 한명의 투니지아 사람만 맞지 않았는데, 그 사람은 광산에서 한국동료들과 같이 일을 하면서 한국말을 틈틈이 배워 자길 때리려고 하자“아버지 나 한국사람 좋다. 아버지!!” 하는 바람에 폭행을 당하지 않고 도망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날 맥주 집에서 나하고 시비가 붙었던 한 사람은 겁을 먹고 불란서로 도망가 서 그 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경찰서에서는 처음에 싸움이 시작될 때 그 사람들이 잘못한 것을 확인하고 나에 대한 치료비와 일을 못하고 병가를 낸 동안 월급 일체를 그들에게 변상을 시키고 한국동료 50여명한테 폭행을 당한 그들은 보상 한 푼 받지 못하고 사건을 끝났다.
그 후에 광산에서 혹시 한국동료와 같이 일을 하게 되면 무서워하며 반장에게 이야기를 해서 될 수 있으면 다른데 가서 일을 하며 거리에서도 우리들을 만나면 다른 곳으로 피해 다니는 일이 얼마동안 계속되었다.
한국대사관 노무관은 광산을 찾아와 사건을 마무리하고 우리들을 불러 모아놓고 될 수 있으면 조용하게 독일생활을 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그 사건은 마무리 되었던 일이 있었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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