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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은 파독광부가 독일땅에 온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63년 파독광부 1진이 독일에 도착하면서 재독동포사회가 시작되었고, 전세계 동포사회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독광부분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셨지만 정작 개인적으로는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고생도 많으셨을 겁니다.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어찌 몇마디 필설로 다하겠습니까만 파독광부분들중에 몇분이 독일땅에 와서 겪은 체험을 여기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파독광부의 삶은 그 자체가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러니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어렵게 글을 써가실 때, 서투른 점이 있더라도 많은 성원 바랍니다. 

이정의칼럼 검정밥(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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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3,114회 작성일 13-07-31 10:12

본문

직장생활
 
처음에 내가 베를린 공과대학교로 갈 때는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광산계통이나 학교에서 일하며 살고 싶었다. 그러나 민주운동에 나서면서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정부에서 원하지 않는 사람이 된 후에는 귀국할 생각을 포기하고 독일 땅에서 살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살게 되면 직장이 보장되어 있었고 박사모자가 필요 없었다. 독일인 동기들도 한 친구 외에는 다들 박사학위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또 특별히 광산 같은 산업전선에서는 외국인에게 씌어진 박사모자가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대학교를 졸업하면 학위를 하지 않고 서독으로 돌아가서 석탄공사에서 계약대로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서 살기로 결정을 하고 나니 또 가족계획에 대한 생각도 해야 했다. 지금까지는 아내도 직장에 나가야 했기 때문에 아이를 둘 수가 없었지만 이젠 공부 마칠 기한을 바라볼 수 있으니 독자로 태어난 나는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 했다. 그러나 그때의 세계는 여기저기 전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TV에는 시간마다 에리테리아와 베트남에서 굶어 죽는 아이들의 모습이 방영되었다. 나는 아내와 의논해서 우리의 자식을 더 낳지 않기로 하고 아프리카 혹은 베트남에서 양자를 받아드리기로 결정했다. 또 우리는 아직 젊으니 주의를 해도 다시 임신할 수가 있고 그렇게 될 경우 친자식과 양자와의 사이에 사랑의 차이가 부지중에 생길 수도 있고, 또 내가 직접 경험한 우리 집에 양자로 왔던 순근 형과 나의 사이를 고려해서 이러한 문제점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정관수술을 받기로 결정했다. 의사는 내가 아직 너무 젊다는 이유로 세 번이나 거절했으나 나의 결심이 확고한 것을 인식한 후에 정관수술을 해 주었다.
 
1976년 10월 베를린 공과대학교 광산광업학과를 졸업하고 서독으로 돌아왔다. 내가 옛날에 근무하던 광산은 문을 닫아 버렸다. 옛날에 일하던 회사를 잃은 나에게 본사에서 중부에 있는 광산 중에서 마음에 드는 회사를 찾으라고 했다. 처음으로 찾아간 곳이 겔센키륵헨(Gelsenkirchen)이라는 도시에 있는 한 광산이었다. 사장은 자기 회사에 약 삼백 명의 한국인 광부들이 있는데 어떤 때는 거의 50%가 결근을 한다고 했다. 내가 그 회사에 있으면 한국인의 문제를 처리할 수가 있고, 노동문제가 일어날 경우에 대사관에서 노무관을 불러올 필요 없이 내가 처리할 수 있으니, 나더러 자기 회사에서 일을 하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거절했다. 나는 광산학을 전공했지, 심리학이나 사회학을 전공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왜 한국인의 50%가 일을 나오지 않는지를 옛날 몸소 경험했기 때문에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사고방식에는 내가 관여할 접착점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옆 동네에 있는 후고(Hugo)라는 광산에서 12월 1일부터 일을 시작했다. 이 광산에는 사원과 노동자가 모두 오천여 명이었는데 한국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일본인 광부가 한 사람 있었다.
 
일 개월 견습기간이 지난 후 다음 해 정월부터 부항장의 직위로서 생산반을 맡게 되었다. 우리 항에는 채광을 책임 맡은 스타이거가 30명, 광부들이 300명, 이 외에 전기기술을 책임 맡은 스타이거 6명과 전공 40명, 기계기술의 스타이거 8명 기계공 60명 합쳐서 약 450명이 편성되었는데, 처음에는 나는 이 사람들이 외국인의 선임자를 어떻게 대할지 좀 두려웠다. 급선무는 독일인이 외국인에게 대하여 가지고 있는 선입감을 해소시키는 것이 절대적이었다. 이 선입견은 순간적인 말로나 행동으로서 제거할 수 없었다. 특히 생전 처음으로 상급자가 외국인일 경우 그 상급자를 대하는 독일인 사원들 자체가 불안정한 위치에 처해 있기 때문에 나를 받아드리는 그들의 감수성에는 처음 당하는 처지의 어려움이 잠재해 있었다.
 
이것은 다만 인간과 인간의 접촉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었다. 내가 비록 외국인이지만 그들의 상급자고, 내가 그들의 상급자이지만 나는 그들의 위에 있지 않고 그들과 함께 그들의 곁에 있다는 것과 그들의 협조와 추종을 내가 요구하는 것보다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들을 나는 말과 행동으로서 나타내면서 그들로 하여금 체험하게 했다.
 
결국은 내가 그들에게 어떻게 반영되고 받아드려지는가에 의했다. 이삼 주 지나고 나니 나를 받아드리는 그들의 태도가 두드러지게 친절하고 처음에 가졌던 나의 염려도 불필요한 것으로 되었다. 이렇게 가까워지게 하는 근원에는 국적이나 겉모양을 넘어선 실제로 일을 처리하는 능력과 그들에게 대하여 풍기는 나의 카리스마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번 실수를 하거나 정확하지 못한 명령을 내리면 그때부터 상하의 질서가 무너졌기 때문에 항상 분명하고 올바른 지시를 내려야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동료로서 친해졌고 나는 그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독일의 산업전선에는 상하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것이 아주 중요했다. 한번 ‘그는 좋다. 그는 잘 한다’ 라는 인정을 받으면 어디나 누구에게 가도 친절한 대우를 받았고 일하기에도 수월했다.
 
우리 회사에는 노동자가 5000명, 사원이 약 500명 되었는데, 그 중에서 대학교를 나온 사람은 10명밖에 없었다. 일반사원과 노동자들은 거의 전부가 노동조합에 가입해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기의 노동권리를 확보했다. 나도 회사에 채용이 되면서 노조에 가입했다.
 
하루는 막장을 둘러서 위쪽에 있는 갱도로 올라갔다. 그날은 작업현장이 걸림 없이 순조롭게 운영되고 있었다. 철대패는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석탄을 깎아 운송철판 위에 넘겨주었고 운송철판의 쇠사슬은 무겁게 그러나 쉬지 않고 석탄을 아래로 밀면서 운반하고 있었다. 철판의 쇠사슬이 돌아갈 때는 길이가 500m나 되는 두개의 쇠사슬이 나란히 약 1m 마다 가로질러 끼운 버팀대로 철판 위에 놓인 석탄을 밀면서 돌아가는데 이와 동시에 철판의 아래쪽에 있는 쇠사슬과 버팀대는 철판아래에 깔려있는 석탄가루를 밀면서 막장 윗쪽으로 올라가게 된다. 석탄층과 바닥의 암반이 반듯하고 굴곡이 없으면 철판 아래에 석탄가루가 별로 없지만 탄층이 암반에서 잘 떨어지지 않고 누렁지처럼 암반 바닥에 꼭 붙어있거나 암반층이 반듯하지 못할 경우에는 철판 아래에 석탄가루가 많이 남게 된다.
 
내가 막장에서 위쪽 갱도로 나왔을 때 운송철판의 맨 끝에 철판의 아래쪽으로부터 깔려 있던 석탄가루가 밀려 나와서 무더기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한 사람을 그곳에 배치시켜 쌓이는 석탄가루를 퍼서 운송철판에 얹으라고 지시했다. 한 시간 후에 작업장을 한바퀴 둘러서 거기에 오니 석탄 무더기는 줄어들지 않았고 그 사람은 갱도 벽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나는 그가 어디에 아픈 데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픈 곳이 없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그가 맡은 일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인식시키고 만약 그가 맡은 일을 하지 않을 때는 지상으로 내보내겠다고 했다. 내가 다시 그 자리에 왔을 때 그는 삽질을 하면서 석탄을 운송철판에 싣고 있었지만 계속 쌓여 있는 석탄이 그가 얼마나 게으름을 피웠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를 지상으로 내쫓아버리고 항장에게 그 사유를 서면으로 보고했다.
 
그 이튿날 그가 경영협의회위원으로 있는 노조위원과 함께 내 사무실에 왔다. 노조위원은 왜 내가 그를 내쫓았느냐고 항의했다. 나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는 노조위원에게 말했다.
 
“누구든지 몸이 아파서 일을 할 수 없을 경우에는 쉬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내가 그가 졸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몸이 불편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아픈 데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그가 맡은 사명의 중요성 곧 거기에 석탄이 너무 많이 밀려서 쌓이게 되면 운송철판을 운영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재삼 인식시키고, 만약 그렇게 되면 항 전체가 반나절을 일을 할 수 없게 된다고 다시 한번 일의 중요성을 설명해주었고 또 그가 계속 일을 수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내보내겠다고 경고했다.”
 
노조위원은 그렇더라도 내가 그를 쫓아낸 것은 불법이라고 하며 스타이거의 폭행이라고 역설했다. 물론 나에게 한 노동자를 해고시킬 권리가 없었다. 그러나 한 작업장에서 일을 거부할 경우 그를 쫓아내고 그날의 임금을 삭제하고 징계할 권리는 있었다. 나는 노조위원에게 침착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반박했다.
 
“당신이 경영협의회위원으로서 노동자를 위해서 열렬하게 옹호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자랑 할 만한 일이요. 그러나 당신도 경영협의회에서 봉급을 받지 않고 이 회사의 봉급을 받지 않소? 이 회사의 운영과 번영은 곧 우리의 책임이 아니오? 이 회사가 능률을 올리면서 번영하면 우리의 일자리가 튼튼하고 여기에 일하는 모든 노동자의 생계의 바탕이 확고하게 되지 않소? 물론 피고용자인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옹호해야 합니다. 그러는 반면 우리는 우리에게 맡긴 일에 대한 책임을 질 의무가 있습니다. 내가 할 의무는 소홀히 하면서 내 권리만 찾을 수 없지 않소? 자기에게 맡긴 사명을 의도적으로 거부할 때는 이것은 경영을 저지하는 사보타아지가 아니겠소? 당신과 나의 생계와 우리에게 달린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우리는 서로 서로 단결해서 힘껏 일을 해야 하고, 우리가 그렇게 일을 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찾을 수 있는 정당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경영협의회위원인 당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소.”
 
“회사는 거대한 기업체고 우리 노동자는 개개의 힘없는 개인으로서 우리가 피고용주의 입장에서 함께 힘을 합쳐서 우리의 권리를 싸움으로 찾지 않으면 누가 우리의 권리를 찾아주겠소? 스타이거 리(Lee)는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회사의 사정을 몰라서 그렇지만, 아무도 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노동자를 지상으로 내쫓는 스타이거는 없소. 만약 당신이 당신의 상관과 근무상 어려움이 있을 때에 당신의 권리를 위해서 싸우게 된다면 당신을 도울 사람은 우리뿐이요. 그 점을 고려해서 같은 처지에 있으면서 노동자를 그렇게 학대하지 마시오. 당신은 언젠가는 이사직에 승진할 사람이 아니요? 그때에 우리의 승인이 필요하니 그때에는 당신도 우리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 점을 잘 생각하시오.”
 
그의 말에는 어떤 압력이 잠재해 있었다. 일반사원이 이사직으로 승진할 때는 경영협의회 합의가 있어야 했다. 그는 이 점을 잡아 나를 은근히 협박하고 있었다.
 
“당신의 말은 옳소. 약한 피고용자의 권리를 위해서 우리는 단결해서 싸워야 하고 그러한 싸움을 위해서 노조를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원칙은 나도 찬성합니다. 또 그러한 이유에서 나도 노조에 가입했소. 그러나 당신이 나의 승진운운 하면서 나에게 압력을 가하려는 행위는 나의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노조에 대한 생각을 의심나게 만들었소. 나의 진급이 어제 일어난 이러한 문제로 경영협의회에 의해서 거부된다면 나는 이 일을 공개적으로 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소. 그렇게 함으로써 내 후에 오는 사람들에게 노조의 내면적인 사고방식이 실제로 어떻다는 것을 알리고, 또 그러한 사고방식은 공개적으로 토론되어야 할 일이라고 나는 생각하오. 그리고 경영협의회가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개인의 신상문제로 만들어 압력의 도구로 쓴다면 그러한 노조는 나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나는 노조에서 탈퇴하겠소. 왜 내가 노조에서 나가는지 그 이유를 내가 노조위원장, 경영협의회장 그리고 내 동료들에게 서면으로 알리겠소.”
 
노동자의 문제가 그를 제쳐놓고 나와 노조의 문제가 되었다. 탈퇴서를 이유를 첨부해서 노조위원장에게 보내고 동료들에게 오늘의 사건을 알리겠다는 내 말에 그는 주춤했다. 그는 다른 해결책을 강구했다. 결국은 그가 태도를 고치면서 경영협의회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이러한 일을 순조로이 해결하자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너무 나의 고집만 내세우지 말고 어떤 합의적인 해결책을 강구하자고 제안해 왔다. 나는 이제 시작하는 내 직장생활을 노조 및 경영협의회와 정면충돌해서 힘들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가 나에게 압력을 가하려는 의도가 없었고 또 그러한 의도가 아니었다는 사과를 받고는, 그 노동자의 처리문제는 항장에게 넘겨서 다른 반에서 일을 하게 만들었다.
 
이 일 후에는 나와 노조의 관계는 항상 전쟁도발 직전이었고, 나는 노조에 대한 회의를 품고 노동조합에서 탈퇴했다. 나는 칼 맑스가 「철학의 고난」이라는 글에 표현한 말을 다시한번 되새겼다.
 
“노동은 노동 자신이 상품일 때 상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에 대한 노동시간으로 측정된다. 그리고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노동을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쉼 없는 노동의 존속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을 생산하기 위한 노동시간이다. 즉 노동시간은 노동자에게 그의 생계와 후대(後代)를 지속시킬 수 있는 처지에 놓이게 한다.”
 
노동은 노동자의 복리를 보장하는 노동자의 상품이라는 것과 이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노동시간이 요구된다는 근본원리를 노조위원들은 무시하고 있었다.<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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