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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은 파독광부가 독일땅에 온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63년 파독광부 1진이 독일에 도착하면서 재독동포사회가 시작되었고, 전세계 동포사회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독광부분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셨지만 정작 개인적으로는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고생도 많으셨을 겁니다.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어찌 몇마디 필설로 다하겠습니까만 파독광부분들중에 몇분이 독일땅에 와서 겪은 체험을 여기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파독광부의 삶은 그 자체가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러니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어렵게 글을 써가실 때, 서투른 점이 있더라도 많은 성원 바랍니다. 

김재승칼럼 어머님 죄송합니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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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3,320회 작성일 13-07-14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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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10월 13일 오전 10시에 김포공항을 출발, 일본 오키나와 공항에 내려 공항에서 제공한 버스를 타고 어느 호텔로 가서 Air France 비행기를 8시간이나 기다리고 있다가 호텔에서 저녁을 먹고 18시간 비행 끝에 Paris에 내려 다시 독일 행 비행기를 타고 이곳 독일 Koeln, Bonn공항에 내렸다. 잠깐 거쳐 온 일본과 불란서였지만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달된 나라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호텔을 왕복하는 동안 바라본 바깥 거리는 말 그대로 화려함이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어쩌면 세련되었다고 할까? 호텔방마다 놓여있는 칼라 TV에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딱딱한 프로그램이 아닌 모든 것을 즐기는 그 자체였다. 제일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젊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옷차림과 행동, 머리를 기르면 벌금을 물어야 하는 한국에 살다가 또 서슬이 시퍼런 군사정권 시절에 내가 가난해서 여유 없는 생활을 한 탓도 있겠지만 이것저것 제안만 했던 한국에 비하면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파리 공항에서 독일로 오는 비행기를 갈아타려고  몇 시간 앉아 있는 동안, 사람들이 공항에서 헤어지면서 한국에서 하는 인사대신 여자건 남자건 구별 없이 입을 맞추고 볼에다가 입을 비비고 하는 모습들은 우리에게 신기한 광경들이었다. 신기하게 바라보는 우리들의 모습이 그 사람들에게는 또 신기했을 것이다. 오후에 도착한 Koeln, Bonn 공항에는 광산 인사과장, Heimleiter와 한국 통역, 그리고 우리보다 몇 개월 먼저 온 동료 한사람이 대표로 마중을 나왔다. 무슨 도시로 가는 줄도 모르고 오긴 했는데 우리는 Neukirchen/Vlyun 광산으로 간단다. 광산 기숙사로 오면서 버스 안에서 우리를 마중 나온 동료가 간단한 광산 안내를 한다. 자기는 한인회 회장이라 소개하며 7월엔가 왔단다. 우리가 갈 Nierberg이라고 불리는 광산은 처음 74년 7월에 한국 사람들을 데려왔으며 우리가 두 번째란다. 우리는 광산 기숙사로 안내 되어 식당에서 간단한 관계자들의 인사를 듣고 방을 배당 받았다. 우리는 총 52명이 이곳으로 왔다. 그중에는 감쪽같이 개발공사와 우리들까지 속이고 2번째 파독된 동료들도 있었다. 재 파독이 금지되었던 시절이라 속이지 않으면 다시 올 수 없는 곳이다. 한국에서 독일어를 배울 때도 아닌 척 해야 되고 지원해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불안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광산 측에서야 오히려 환영하는 분위기이기 숨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52명중에는 별의별 직업을 가졌던 사람들이 참 많았다. 외국어 대학을 졸업하고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광부로 지원해서 왔다고 뽐내는 사람도 있고, 이야기들을 하는 것을 들어보면 나같이 살기가 팍팍해서 온 사람은 한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들 잘 살았으면 뭐 하러 광부로 와?”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든다. 동료 중에 나하고 월남에서 같이 군대생활을 했던 전우도 있었다. 몰라봤는데 개발공사에 전날 모임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데 “아니 선임하사님 아니십니까?”하고 반기는 사람이 있었다. 여기서 선임하시라니 생각하고 누구냐고 물으니 자기는 맹호부대 통신 중대 암호 실에서 근무를 했단다. 그렇게 이야기 하니 알 것도 같고, 아무튼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를 하고 한 비행기를 타고 독일까지 같이 왔던 것이다. 52명중에 내 나이가 제일 어리다. 24살이었으니 군대생활을 오래 하고도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온 편이다. 이 옛 전우 역시 나보다 3살이나 위다. 군대생활 했을 때야 반말을 했겠지만 사회에서 만났으니 존댓말로 올렸다. 나중에 내가 중국 중의대학을 입학할 때 이 동료도 같이 입학을 했었는데 보니 나이는 많지만 생일이 나하고 같은 날 2월 18일이었다. 생일이 같으니 팔자도 같은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나는 기숙사 38호실로 방 배정을 받았다. 한방에 3명씩이 들어가는데 나아닌 다른 두 사람은 처남, 매형지간이란다. 누구면 어떠하랴, 생각하며 불편한 공동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키를 받아 가방을 우선 방에다 가져다 놓고 저녁을 먹으러 내려왔다. 키를 주며 하는 소리가 여기 방문이 닫히면 문을 밖에서는 못 열게 되어있으니 꼭 키를 가지고 다니란다. 실수하면 물론 마스터키가 있지만 관계자를 찾으려 다니고 복잡하니까, 그리고 기숙사뿐이 아니고 독일에 있는 어떤 가정이든지 밖에서는 키가 있어야 열수가 있으니 꼭 기억해 두어야 된단다. 식당으로 다시 내려가 독일에서 처음 먹는 저녁밥은 말 그대로 돌 씹은 맛이다. 이곳이야 원래 아침저녁은 빵으로 식사를 대신하니 3끼를 밥을 해서 먹고 살았던 우리에게는 정말 힘들 수밖에. 3년을 버틸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저녁을 때우고 방으로 들어가 대강 옷 정리를 하고 첫날을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2일 동안의 긴 여행이 우리를 피곤하게 했다. 지금이야 한국에 10시간이면 가지만 그 시절에야 러시아에서 항공로를 허가하지 않아 알라스카로 돌아와야 되니 지금보다 여행시간이 2배가 더 길었다. 이튿날은 하루 쉬란다. 허지만 이것저것 모임이 많았다. 한국사람 통역이 4명이 있었는데 이들도 우리같이 광부로 와서 3년을 마치고 독일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에 통역으로 그곳에서 머무르게 한 것이다. 한사람은 기숙사 통역, 교육과 소속으로 우리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통역, 지하통역 그리고 보조 통역 이렇게 4명이다.
이튿날 오전에 식당으로 다시 집합하란다. 시청에 우리들의 거주신고를 하고 비자를 받기위한 서류를 작성하기 위해서다. 우리들이 오면서 가져온 본인들의 호적등본을 거두어 가면서, 이 나라는 기혼자와 미혼자의  세금차이가 많으니 미혼자도 꼭 기혼자로 신고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야기를 하란다. 호적을 번역해서 신고를 하면서 본인들이 거짓 번역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맨입으로야 되겠는가? 허지만 기혼자라로 신고가 될 경우 나중에 결혼을 하려고 하면 호적관계가 복잡하니 잘 생각해서 하라는 주의까지 주었다.
사실 나의 호적은 기혼자로 되어있었다. 먼저 독일로 와서 Oberhausen에서 지내고 있었던 작은아버지가 아버지께 편지를 하면서 재승 이는 할 수 있다면 호적을 기혼자로 바꾸어 오라는 편지를 했었다. 매달 내는 세금차이가 한국한달 월급과 비슷하니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독일로 출국하기 전 아버지께서 “너의 호적을 기혼자로 했다. 그렇게 알고 독일가면 기혼자로 신청을 해라” 하시는 것이었다. 그 시절 파독되어 오면서 마을에 옆집 처녀를 알리지도 않고 혼인신고를 해서 막상 그 처녀가 시집을 가려고 호적을 떼어 보니 시집을 간걸로 되어 있어서 오해를 낳고 하는 문제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나까지 그런 일에 나까지 동참 할 줄은 몰랐다.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해요? 그리고 난 그런 짓이 싫으니 다신 고쳐놓으세요.”라고 말했지만 출국하면서 가져와야 되는 호적이니 가서 다시 고칠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인즉 한 마을에 사는 아버지와 잘 통하는 사람에게 이야길 해서 그 집에 사실 존재하지도 않은 여자를 하나 그분 동생으로 출생신고를 한 다음 나하고 혼인을 한 것 같이 혼인신고를 했다는 것이다. 호적이야기가 나왔으니 몇 마디 더 하려고 한다. 나중에 내가 결혼을 하고 우리 지훈 이가 태어났을 때. 독일 시청에 출생신고를 하고 한국으로 연락을 했다. 지훈 이가 태어났을 때는 벌써 나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안 계신 후인데도 여기 출생 신고 된 출생일을 음력으로 계산하고 또 이름 지훈 이는 돌림이 맞지 않는다며  “대호”로 이름을 바꾸어 한국에 호적에 올렸었다. 나도 모르고 있었는데 나중에 호적등본이 필요해서 호적등본을 떼어 와보니 그렇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 일뿐이 아니다. 몇 년 전 한국에 손으로 기록을 했던 호적을 전산화 하면서 담당자 잘못으로 나의 생일과 우리 둘째 정훈이의 생일을 잘못 기입을 했었다. 컴퓨터에 입력을 하면서 담당자가 실수를 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의 호적을 보면 참 지저분하다. 나와 혼인신고가 되어있던 존재하지 않았던 여자와 이름과 생일을 집안의 실수로 잘못 신고 했던 “대호”라는 아이도 사망신고가 되어있으며 전산화 하면서 잘못 기록된 나의 생일과 둘째의 생일은 “면장직권정정”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지금이야 안 되겠지만 그 시절 시골 면사무소의 행정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부조리가 많았다. 나중에 내가 결혼을 할 때 처갓집에서서 나의 호적에 대한 오해를 잘 이해를 시켰지만 지금생각하면 그때 독일 시청에 신고를 하면서 기혼으로 되어있었던 호적을 미혼으로 신고를 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시청에 신고할 호적관계를 마치고 간단한 광산 소개와 내일부터 우리들이 생활해야 될 일정을 안내하고  하루 일과는 끝냈다. 내일부터 광산으로 출근이다.
6시까지 광산으로 오라하니 저녁에 잠도 잘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아직 깨워줄 탁상시계도 준비가 안 된 상태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1개월 동안은 3명이서 같이 같은 시간에 출퇴근을 하니 출근 준비하는 동안 서로 방해되는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도 왠지 불안한 마음에 선잠을 잤다. 아니면 한국과의 시간차인 때문인지 아침에 일찍 눈이 떠졌다. 허지만 머리가 무겁기만 하고 피곤하기만 하다. 6시에 맞추어 광산으로 가니 거기에는 광산통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창고로 가서 작업복을 지급받아 탈의장과 샤워장이 같이 있는 곳으로 가서 줄을 이용해 위에다 메 달고 광산에서 지하로 내려갈 때 주의사항과 간단한 광산 안내를 마치자 교육통역의 안내로 독일어를 배울 교실로 안내 되었다. 한 달간은 지하로 내려가지 않고 하루 4시간은 광산작업도구들과 광산에서 필요한 용어를 배우고 4시간은 지상에서 잡일을 한다고 했다. 점심으로 아침에 식당에서 빵을 먹으면서 싸온 빵 2쪽과 물병에 담아온 물을 항상 지참해야 된다. 일생에 광부로 첫 일과가 시작된 셈이다. 정말 광산에서 일을 하게 된다는 말인가? 여기가 정말 독일이란 말인가? 갑자기 바뀐 생활환경 때문에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 다음날은 일과를 마치고 광산 측과 은행 측의 배려로 우선 필요한 사람들은 융자를 해서 한국으로 보낼 수 있다는 전갈이 왔다. 누가 돈이 필요치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 같은 경우도 여기 오기 전 한국에서 난 비용 때문에 빨리 송금을 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오후에 은행으로 가서 나의 구좌를 열고 2000 DM을 융자를 해서 조금의 용돈을 제하고 모두 부모님께 송금을 시켰다. 우선 급한 불은 끈 셈이다. 우선 생활은 그런 대로 할 만하다. 4시간 독일어 공부도 그렇게 힘들게 시키지 안했고 4시간 잡일도 힘들 일은 아니다. 허지만 독일어 공부를 마치고 시험을 봐서 성적이 좋은 다섯 명은  나중에 지하로 가서 일을 시작할 때 본인이 원하는 직종을 받을 수 있으니 열심히 하라는 교육통역의 말이 영 부담이 간다. 이왕에 던져진 몸 무엇이든지 열심히 해 보자. 그래도 중학교 시절에 IQ검사를 해서 전교에서 내 IQ가 제일 높았지 않을까? 열심히만 하면 5명 안에는 들겠지. 다행이 한방에 있는 매형 되는 동료도 열심히 노력하는 형이어서 서로 토론하며 공부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다행이다. 독일에서는 주 5일 근무제니 토요일 일요일은 쉴 수가 있었다. 토요일에는 Oberhausen에서 광산생활을 하면서 아직 1년 후면 귀국할 작은아버지께서 찾아왔다. 독일에서 이렇게 식구를 만난다는 것이 감개무량하다. 그동안 안부를 묻고 잠시 후 그냥 돌아갔다. 살림을 하고 살아야 밥을 해준다든지 손님 대접을 하지 기숙사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작은아버지는 고향 친구 몇 명이서 허름한 집에 세 들어 산단다. 나더러도 돈을 조금이라도 절약하려면 가정집을 얻어 나가서 생활하면 절약할 수가 있다는 말과 다음주말에 찾아가서 맛있는 것 많이 얻어먹기로 약속을 하고 떠나기 전 “작은아버지 교육 마치고 광산에서 내가 원하는 직종을 지원을 할 수 있겠는데 일하기가 직종이 뭐지요?”하고 물었다. 돈을 벌려면 뭐니 뭐니 해도 막장을 지원하란다. 막장에서 일을 하는 게 Lohngruppe가 높아 월급이 제일 많다는 이야기다. 막장이 뭔지, 굴진이 뭔지 내가 알바가 아니니 교육을 마치면 막장을 지원해야지 마음먹고 작은아버지를 전송했다.  한 달이란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독일 생활도 대강 윤곽이 잡힌 것 같고 혼자 기차나 버스를 타고 다니는 법을 배우며 바쁜 생활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했었다. 광산에서는 교육을 마치고 작은아버지 말대로 막장을 지원해서 월요일 아침 5시 반까지 51항 Reviersteiger(항장)에게 신고를 하라는 지시를 받고 주말은 쉬었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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