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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의칼럼 검정밥(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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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06-05 09:26 조회2,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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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결혼가정의 어려움
 
코리나는 이제 유치원에 다니는 귀염둥이가 되었다.  나는 복훔 시까지 두 시간이나 전차와 기차를 타고 통학했기 때문에 새벽 일찍 집을 나갔다. 청강시간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꽉 채워서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 왔다. 나는 아이가 아직 자고 있을 때 집을 나갔고 아이가 잠이 들었을 때 집에 들어 왔기 때문에 주말이 되어야 코리나를 볼 수 있었다.
 
한참 말을 배울 때에 한국말을 가르칠 여유가 없었다. 주말에 몇 마디 하는 한국말로는 도저히 배울 가능성이 없었다. 그래서 다만 아이들 노래와 아리랑만 배워주고는 시간 있을 때마다 딸과 함께 고향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한없이 즐거웠다.
 
내가 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면 내 곁에서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딸이 대견했고 귀여웠다. 이리저리 제 마음대로 그린 줄과 동그라미를 보이면서 무엇이라고 설명하는 코리나를 보면서 나는 흐뭇한 행복을 느꼈고 향수와 늦게 시작한 공부의 피로를 잊을 수 있었다.
 
결혼한 지 어느덧 사년이라는 세월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고향을 떠나온 지도 이미 칠 년이 되었다. 지나고 보니 세월이 유수(流水) 같다는 말에 긍정을 하지만, 칠년의 하루하루는 실제로 이방인의 어려움과 피땀의 고생과 향수의 눈물로 이어져 있었다. 향수는 간혹 내 자신을 잊게 만들고 심지어 내가 여기에서 결혼해서 아내와 아이가 있는 가정을 가지고 있다는 현실조차 잊게 만들 때가 있었다. 이런 때에는 내 자신이 현실과 의무를 잊어버리는 병적(病的)인 어린아이의 심리를 가지게 되고, 이러한 심리적 현상에서 나오는 나의 태도는 또한 부부간의 사이에 금을 내는 위험을 초래하기에 알맞았다.
 
향수로 인한 정신적인 어려움은 결혼생활에서 많은 자제(自制)와 직시(直視)를 요구했지만, 이러한 사실은 또 국제결혼가정에 잠재하고 있는 생활상의 어려움과 더불어 젊은 부부의 삶을 항상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었다. 이러한 삶은 나에게 뿐만 아니라, 국제 결혼한 다른 가정에도 커다란 부부생활의 부담이 되었다.
 
그 동안에 내 주위에도 독일여인과 결혼한 동료들이 일곱 명이 있었는데, 이 일곱 가정 중에서 세 가정만 남고 반 이상은 결혼한 지 3년도 넘기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었다. 물론 헤어지는 이유는 다만 향수에게만 근거를 들 수는 없지만, 향수로 인하여 내가 존재하고 있는 현실과 범위에서 그 밖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내 주위를 바로 볼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것이 더 크게 더 좋게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은 또한 상이(相異)한 문화권 속에서 매듭진 국제결혼의 어려움에 덧붙어서 부부사이를 갈라놓게 만들었다.
 
남녀가 결혼할 나이가 되면 이미 생활습관이나 사고방식이 굳어진 처지에 다다른다. 이러한 사고방식과 생활습관이 같은 뿌리에서 자라나지 않고 완전히 다른 생활문화권에서 양성된 경우에는 간격과 크기가 서로 다른 톱니바퀴처럼 함께 끼워 맞아서 돌아가지 않고 많은 에너지의 소모와 톱니의 파손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마찰되어 떨어지고 부서지는 빈번도가 잦게 되면 서로 맞아서 적응할 수 있는 톱니 즉 연결점을 잃게 된다. 여기에 국제결혼가정의 어려움이 잠재했다.
 
물론 내나라 사람하고 사는 가정에도 불화와 부부싸움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국제결혼은 내 나라 사람끼리 사는 것보다 두 개의 문화권에 인한 더 크고 많은 마찰 면을 가지고 있음으로 이러한 불화를 쉽게 초래할 근원을 가지게 했다.
 
한국인과 독일인 사이의 상이한 생활문화권에서 오는 마찰점들은 다양했다. 동양과 서양, 독일과 한국의 민족성과 사고방식 같은 개념적인 차이를 논하기보다 매일의 생활상에 나타나는 생활방식의 차이와 행동의 차이가 결혼생활을 힘들게 만들었다. 나는 다른 가정의 사정은 몰랐지만, 나와 아내와의 사이에 다른 문화권에서 자랐기 때문에 생기는 습관적인 생활양식의 차이점을 찾아보았다.
 
첫째는 음식문화에서 오는 어려움이었다.
 
독일에는 음식에 마늘을 넣지 않았다. 어떤 때는 내가 한국 가정에 놀러갔다가 김치를 먹고 오면 온 집안에 마늘냄새 때문에 아내가 싫어했다. 그러나 뼈 속에 인이 박힌 듯 김치가 먹고 싶은 것은 중독이라고 하기보다 고향생각을 잊는 향수치료제를 찾는 격으로 고향생각은 곧 김치생각과 이어졌기 때문에 김치를 보고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 회사 옆에 살던 박 씨가 김장을 담았다고 한 포기 가져가라고 했다. 나는 감사하면서 김치를 집에 가지고 와서 우선 부엌 식탁 위에 올려놓고 욕실로 들어가서 손을 씻고 있었는데 갑자기 부엌에서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아내가 내가 온 것을 알고 거실에서 나와서 나를 찾으며 부엌에 들어가는 순간 식탁 위에 벌겋게 생긴 무엇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생전에 보지 못하던 괴물이었다. 원래 벌레를 무서워하는 아내가 큰 고양이만한 붉은 괴물을 보고 기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가 부엌에서 튀어나온 것과 내가 욕실에서 튀어나온 것은 거의 같은 순간이었다. 아내는 말을 못하고 손으로 부엌을 가리키며 무엇이 있다는 시늉을 했다. 이것이 아내와 김치의 첫 상봉이 되었다. 그때부터 아내에게는 그러한 괴물을 먹는 내가 또한 괴물 같이 보였을 것이었고, 거기에다 마늘냄새까지 풍기니 기막힐 지경이었다.
 
둘째는 음식문화와 병행하는 우리의 식탁예의와 취식(取食)문화였다.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 훌쩍 훌쩍 소리를 내며 먹는다. 누가 얌전하게 소리 없이 먹으면 음식이 맛이 없나 하고 걱정할 정도다. 그렇게 한 평생을 살아 온 사람이 하루아침에 음식 먹는 모양이 달라질 수 없다. 또 우리는 음식을 다 먹었으면 식탁에 앉아 있지 않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간다. 독일에서는 다른 사람의 식사가 다 끝날 때까지 식탁에 함께 앉아 있다.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나 먹고 난 후에 신나게 한번 트림을 한다. 이 트림은 잘 먹었다는 표현으로도 취급된다. 독일사람들은 트림을 방귀처럼 부끄러워했다.
 
셋째로는 대인관계에서 오는 생활문화와 습관이었다.
 
우리는 친하면 친할수록,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상호간의 예의가 소홀하다. 친하면 친할수록 내 것과 네 것을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는 것이다. 서로 믿고 한다는 식이다. 상대의 생각을 내 생각과 같이 여기거나, 아예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아침이나 저녁에도 사전연락 없이 동료들이 찾아왔다. 그들이 오면 나는 반가워서 불러들이고, 친구들은 몇 시간이 지나도, 우리가 고단해서 자야할 시간이 넘었는데도 일어설 궁리를 하지 않았다.
 
친구지간에 돈을 빌려 쓰는 것은 우리에게는 예사로운 일이다. 또 빌려 준 돈을 받으려고 조르지도 않는다. 내가 돈을 처리하지 않고 모든 것을 아내에게 맡기었기 때문에, 누가 돈을 빌리러오면 내가 아내에게 주라고 해서 아내가 내어주었다. 그래서 들어오지 않는 돈은 한 시각도 아내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빌려 간지 한 달이 넘으면 아내는 나에게 조심스럽게 그 돈에 대해서 물었다. 나는 친구 대신 또 변명을 해야 했고 아내는 내가 그 친구에게 돈에 대하여 물어본다는 약속을 받고야 며칠동안 잠잠하게 지날 수 있었다.
 
넷째로는 동양문화권의 윤리도덕이었다.
 
이 중에서 우리 부부에게 제일 문제된 점은 내가 항상 불효라는 죄책감에 의해 가정에 필요한 재정보다 우선 어머님의 소원을 먼저 해결해야 된다는 절대적인 주관으로 인해 내 직계가족 즉 아내와 딸보다 어머님을 더 귀중하게 여기는 사실이었다. 아내는 우리 세 사람의 생계해결이 급선무요 어머니의 문제는 그 다음에 처리해야 할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부위자강과 부자유친의 교육을 받은 내가 어머님을 내 자식이나 처의 뒤쪽에 둘 수 없었다. 처자식을 죽이더라도 부모를 살리는 것이 내가 받은 효도의 교육이었다.   
 
이러한 것들이 나와 아내 사이에 토론되었던 문제점이었다. 우리는 서로가 상대방의 마음에 들지 않는 고향의 습관과 행위를 될 수 있는 한 스스로 고치기로 결정했고 어떠한 점이 드러날 때는 저녁에 서슴없이 상대방에게 말하기로 했다. 두 외국인이 함께 살아가는 데에는 서로가 서로의 위치와 주관을 이해할 수 있기까지 많은 해명과 시간이 필요했다.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나 자신의 고칠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결혼생활의 성공은 이러한 점들을 어떻게 처리하며 또 어떻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상대방의 마음에 부담이나 역겨움이 되지 않게 알리는가 하는 정성과 노력에 달려있었다. 우리도 천사가 아닌 이상 가끔 말다툼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잠자리에 들어가기 전에 꼭 화해를 하고 나서야 잠을 잤다.
 
실생활에 대한 어려움도 컸지만 또 타향에서 사는 나의 정신적인 부담이 내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고, 나의 정신적인 부담 때문에 아내의 어려움을 생각할 여유가 없거나 혹은 그것을 소홀하게 생각할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삶에 대한 정신적인 부담을 가진 이방인과 살아야 하는 아내의 어려움도 적은 것이 아니었다. 아내는 아기의 엄마요, 한 남편의 아내이면서 가정주부요 직장인이었다. 거기에다 타향생활에 시달리는 남편에게 정신적인 안식처가 되어야 했고 위로의 샘이 되어야 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내가 기댈 수 있는 기둥이 되고 내가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주는 아내는 정말 고마웠다. 내가 아내에게 주는, 아내가 의지할 수 있는 나의 어깨보다 내가 아내로부터 바라는 것이 훨씬 많았다.
 
나는 자기중심주의자요 이기주의자였다. 나는 고향생각이 날 때마다 몸부림을 치면서 아내의 위로를 구했으나, 그러한 나를 보고 마음 아파하는 아내에게 대한 나의 위로는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것에 대한 생각도 못했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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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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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아직 연재가 끝이 않나&nbsp;이후 일어난 사정을 전혀 모르지만&nbsp;진작 부터 아내되시는 분이 참 훌륭하신 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같은 한국사람을 부인으로 맞으셨어도 아내의 입장에서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 </div>
<div>결혼 초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이방인의 신분으로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를 지난 남편을 이해하고 격려하고 노력하는 부인의 모습을 간간히 읽을 수 있었습니다.&nbsp; 어린 나이었을텐데.. 참 존경스러웠습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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