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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은 파독광부가 독일땅에 온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63년 파독광부 1진이 독일에 도착하면서 재독동포사회가 시작되었고, 전세계 동포사회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독광부분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셨지만 정작 개인적으로는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고생도 많으셨을 겁니다.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어찌 몇마디 필설로 다하겠습니까만 파독광부분들중에 몇분이 독일땅에 와서 겪은 체험을 여기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파독광부의 삶은 그 자체가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러니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어렵게 글을 써가실 때, 서투른 점이 있더라도 많은 성원 바랍니다. 

김재승칼럼 어머님 죄송합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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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3,502회 작성일 13-05-24 10:03

본문

5일 동안 향해 끝에 월남 퀴논 항에 도착했다. 맹호부대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퀴논 항에 내렸다. 백마부대는 2일을 더 가야 된다나? 맹호부대에 도착해서 또 4주 현지적응훈련을 받아야 된단다. 4주 동안 45도가 오르내리는 뙤약볕에서 훈련을 받았다. 배경이 있는 사람들은 훈련도중 빼 가고 했었지만 그런 거라고는 없는 나는 4주의 고된 현지훈련을 마치고 나서 맹호사령부 통신 중대 전출명령을 받았다. 사단 사령부니 다행이다 싶었다. 물론 내 주특기로 예하부대까지 내려갈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염려했었는데 사단사령부 배치라니 다행이다 싶었다. 부대에 가니 우리 기술병 선배들도 많이 있었다. 우선 중대 부관이 임관해서 중위로 근무하고 있었고 한참 고참인 상사한분. 그리고 4-5년 선배인 중사도 한분 있어서 그분들의 심적인 도움은 많이 받았다. 우리 옆 막사에 보안부대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나의 동기인 김동수도 보안부대로 명령을 받아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허지만 그 통신 중대에서는 내 주특기가 꼭 필요했던 것 같지는 안했다. 내 병과는 통신취급소나 무선소대로 가야 되는데 거기에는 선임하사가 있었으니 내가 빨리 내 직책을 받지 못한 것이다. 중대에서 며칠 동안 병사들을 인솔하고 나가서 시내 어느 지역의 경계를 하는 인솔이나 하다가 며칠 후에 취사장으로 명령이 났다. 웬 취사장? 병사들의 식사는 지급되는 A-레이션이나 K-레이션 가지고 반찬을 해 주는데 중, 상사 이상 장교는 장교식당에서 따로 반찬을 해 준다. 더구나 중대장이나 참모는 지급되는 A-레이션이나 K-레이션을 급수차 운전수에게 실려 보내 밖에서 팔게 한 다음 그 돈으로 퀴논시장에 가서 시장을 보아다 특별한 반찬을 해준다. 내 적성에 맞을 리 없다. 어쩜 구례사람인 중대장이 나를 취사반 선임하사를 시켜 급수차로 실려 보내 판매한 금액 중 얼마를 원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20살 나이인 내가 그런 요령을 어디서 배웠을까? 전쟁터에 와서 장교식당 식사나 책임지는 책임자로 근무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며칠마다 차를 배차 받아 퀴논  시장에 가서 시장을 봐와야 되는 것도 적성에 맞지 않았다. 월남사람들은 큰 시내를 제외하고는 집을 나뭇잎이나 얇은 판자나 또 상자를 뜯어서 지은 집들이 많다. 집이 아니라 그냥 천막이라고 해야 맞다. 더 산중으로 들어가면 몬타나 족들이 사는데 원두막 같은 집을 짓고 그 하나의 원두막에서 몇 대 식구들이 같이 생활을 한다.  날씨가 더운 나라여서 가능 할 것이다. 상체는 아예 벌거 벗고 원시인 비슷하게 사는 몬타나 족들은 부부생활을 낮에 밭에 나가서야 가능하다고 한다. 밭에 가서 보면 거적 같은 것을 하나 씌워 놓은 공간이 있는데 몬타나 족들의 역사는 거기서 이루어진단다. 몬타나 족들이 사는 어느 한곳에 가보니 “여러분의 건강을 위해서 콘돔을 꼭 사용하십시오.” 라고 상자에다 한글로 써 놓은 것이 보였다. 한국군인들 이 여기까지 찾아오나 보다. 집안에는 화장실도 없다. 밖이나 들판에서 해결을 하는데도 雨(Phonetic Guide:우) 기철에는 씻겨서 내려가고 乾(Phonetic Guide:건)기철에는 온도가 45도까지 올라가니 하루만 지나면 다 말라서 흔적이 없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도 다를 게 없다. 아오자이를 올리고 앉아있는 여자들은 시장바닥에서 볼일을 보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냄새를 오직 하겠는가? 생선냄새와 섞여져 나는 냄새는 시골에서 태어나 살았던 나에게도 정말 힘든 고역이었다. 우리 취사장에는 땀과 호아라는 2명의 월남 아가씨들이 출퇴근하며 식당일을 돕고 있었다. 한국말을 고작 잘 하는 이 아가씨들은 군부대에 취직해서 월급을 받아 자기 식구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게 큰 복이라고 생각한단다. 월남 아가씨들은 한국 사람을 사귀어 한국에 와서 사는 게 큰 바램이기도 한단다. 우리주위에는 여자에게 임신을 시키어 할 수 없이 귀국을 못하고 잡혀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서류가 완료되면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서다. 사이공 공항에 가보면 가끔 아이를 낳아서 같이 한국으로 귀국하는 모습들이 보이는데 여자들은 슬리퍼 외에 신발을 신어보지 안했기 때문에 한국에 올 때도 발가락사이에 걸어서 신는 슬리퍼 차림에 비행기를 타는 여자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맨발로 살아온 습관 때문에 이곳 독일에서도 환자로 월남 여자들이 찾아오는데  보면 하나같이 발가락 사이가 모두 붙어있지 안고 벌어져 있다.
내가 무능했던지 아니면 가설소대에서 내가 필요했던지 6개월 후에 가설소대로 발령이 났다. 소대장이 없으니 나더러 가서 소대장 겸 가설소대 선임하사를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훨씬 나았다. 차를 몰고 영외로 나가 전화선을 깔고 관리를 해야 되니까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내 적성에 맞는 것 같았다. 갑자기 폭탄이 터지고 총알이 날아다니니 전화선도 총알이나 폭탄파편에 잘 잘린다. 이것을 찾아다니며 시간을 보내는 게 훨씬 적성에 맞는 것이다. 월남생활은 그런 대로 할만 했다. 숙소에 당번도 나와 청소도 해주고 세탁도 해주고 날 편안하게 해준다. 처음에는 당번이 나보다 7살이나 많은 일등병이 나와 미안한 마음에 교체를 하려고 했더니 자기한테는 여기가 훨씬 편하니 제발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허긴 군대는 계급인데 뭘!!
6개월의 월남생활을 마치고 한국 휴가도 다녀갔다. 아는 인사처 한 과장에게 이야길 해서 외아들인데 아버지께서 병이 중하다고 이야기 하고 휴가를 다녀간 것이다. 휴가는 20일 인데 물론 비행기를 타고 왕복을 한다. 김포공항에 내려 동작동 국군묘지에 먼저 참배를 마치고 각자가 집으로 가게 된다. 한국은 추운 겨울 시골에 가려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가게 주인아주머니가 왜 그리 춥게 보이느냐면 막걸리 한 사발 하면 좀 나아질 거라며 준 막걸리 한 사발 얻어 마셨던 기억도 있다. 따뜻한 곳에서 생활을 하다가 매서운 고국의 겨울을 만나니 몹시 춥게 보였던 것 같다. 월남 생활 중 70년대 대선이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때 야당이었던 김대중 선생의 대결이다. 선거하기 전엔 군대에서 특식이 나온다. 또 중, 상사 이상은 자기소대를 책임지고 1번을 찍게 만들어야 된다. 저녁에는 내무반에서 선거에 대한 안내랍시고 군대는 무조건 1번이라는 교육절반, 협박절반의 교육을 시켜야 된다. 선거당일에는 중대장과 인사계가 앉아서 중대원이 투표를 하고나면 투표용지를 봉하기 전 확인하고 1번이면 봉해서 투표함에 넣고 2번을 찍었으면 1번에 다시 찍어 무효표를 만들어 투표함에 넣었다. 200명이 되는 우리 중대에서 무효표가 4표가 나왔으니 대단한 성과가 아닌가. 지금 생각하면 의식이 없어도 너무 없었던 나의 행동이 참 부끄럽기만 했다. 군대라서 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도 4표나 무효표가 나왔지 않은가? 지금 생각하면 반공교육과 일방적인 정신교육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었다. 1년 월남생활을 마치고 연장을 하려면 할 수 있지만 귀국하겠다고 신청을 했다. 더 이상 월남생활을 할 의미가 없었다. 내가 월남생활을 한다고 월남 전쟁이 끝날 것도 아니고 차라리 부모형제가 있고 친척이 있는 고국으로 가서 군대생활을 마치자 싶어서였다. 귀국할 때는 역시 배를 타고 귀국을 하는데 부산부두에 부모님께서 5째 여동생을 데리고 나오셨다. 그때 5째가 기저귀를 차고 부산부두에 나온 사진이 지금도 어딘가 있을 것이다. 처음으로 아버지, 어머니께서 부산까지 외출을 하셨으니 2일을 부산 보충대에서 지내면서 저녁에는 나와 부모님들 극장구경도 시켜드리고 식당에 모시고 가서 식사와 함께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술도 한잔씩 권해드렸다. 어쩜 그 때 만큼은 부모님들도 아이들이 월남 전쟁터에서 돌아오고 또 호강을 받았으니 행복하셨을 것이다. 귀국해서 배치된 곳은 경기도 양평현리에 있는 32사단 공병대대, 공병대대에 통신과가 있으나 통신과 선임하사가 없어서 그곳으로 배치된 것이다. 전임자는 나이 드신 상사였는데 통신병과가 아니니 나한테 자리를 물려주면서 무척 서운해 했다. 현리에서는 다시 영외거주를 했다. 한 달에 2000원 주고 방한 칸 얻고, 아침저녁 식사는 식당에서 한 달에 4-5000원만 주면 한 달을 먹을 수 있었다. 부식비까지 다 하면 3만원이 되는 월급이니 혼자는 충분하다고 할까? 물론 다시 시골집에 생활비를 송금시켜주어야 되니 부담이긴 하지만.
월남에서 나온 수당과 국방부에서 집으로 송금된 1년 월급으로 시골에선 그래도 큼직하다고 한 집을 한 채를 사서 드리고 신작로 가에 지었던 문중 논 위에 있는 밭 사들였으니 부모님들에겐 조금은 효도를 한 셈이 아닌가? 현리에서의 군대생활은 재미있긴 했지만 21살의 나이로 군대주변에서 영외거주를 한다는 것이 결코 보람된 생활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군부대를 상대로 한 술과 여자가 있는 곳이다. 군인들을 상대로 돈을 벌어서 먹고사는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다. 또 시골집에서는 아버지의 생활은 여전하시다는 소식이다. 사드린 밭뙈기도 팔아버리고 월남에서 나오면서 집에다 놓으려고 가지고 나온 전축과 TV까지 작은아버지와 돈 관계 때문에 작은집으로 가져갔다는 소식. 어쩌면 외아들인 내가 전쟁터에서 준비해온 물품과 사드린 밭뙈기까지 없애버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분하긴 했지만, 아버지한테는 무조건 순종을 해야 되는 줄만 알았던 그 시절엔 싫다는 말 한마디 못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조금씩 내 월급을 송금시켜드린다고 해도 깨진 독에 물붓기다. 이대로 여기서 정착하는 것이 내 장래를 위해서 옳은 길인가? 차라리 장교로 임관을 할까? 3사관학교에 지원을 하면 또 1년 넘는 교육을 마치면 임관은 하지만 역시 군대 생활이다. 수없는 고민 끝에 제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사를 달고 48개월 군대생활을 해주었으니 내 임무는 다 한샘. 제대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노력하면 가능하겠지 하는 생각에 잠겨있는데 제대할 수 있는 길이 보였다. 1군단 사령부에서 근무하는 장성급을 소개받고 그분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마침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라고 제대하기 전 기술을 배우게 한 다음 제대를 시키는 제도가 생겼는데 공병학교가서 중장비 운전을 배우거나 아니면 병기학교가서 또 다른 기술을 배워서 제대를 하는 제도다. 제대신청을 했더니  부산 병기학교로 전출명령이 났다. 8주 동안 교육받는 동안에는 마침 병기학교 근처에 고향 시골 친척 동생뻘 되는 사람이 동생하고 같이 공장에 다니면서 자취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그곳으로 비집고 들어가  2개월 같이 생활을 했다. 지금 같으면 생각지도 못할 일인데 그때 가난한 시기에는 그런 생활이 이해가 되었던 것 같았다. 그 자취집에 다른 가족들도 많이 살고 있었는데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딱 방한 칸에 그렇게 셋이 산다는 것이 어디 가능한 일이겠는가 마는 생활비를 될 수 있으면 내가 부담을 하고 가끔 외출도 같이 하면서 그 사람들 비위를 맞추느라 애쓰면서 2개월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드디어 제대 특명을 받았다. 입대한지 5년 반만데 제대를 한것이다. 군대생활은 오래 했지만 일찍 입대를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같으면 그때 한참 군 생활을 할 나이다. 고향으로 와서 먼저 고향 지서(파출소)에 제대신고를 먼저 해야 된단다.아마도 예비군 훈련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고를 하자 지서장은  왜 이런 조건에 제대를 했느냐며 성화다. 월급이 많아도 우리보다 많고 조건도 훨씬 좋을 텐데 좀 더 생각하지 왜 제대를 했냐는 것이다. “무슨 길이 있겠지요. 대답을 하고 이제부터 정말 사회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22살이 조금 넘은 나이였으니 제대를 하고 어디를 다니다 검문을 당하면 꼭 탈영병 취급을 했다. 주민등록증에 분명히 나의 군번과 계급 그리고 제대 날짜까지 기록되어 있는데도 믿지를 못하고 차에서 내려서 확인할 때까지 검문소에서 기다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살길을 찾아보려고 무조건 서울로 올라왔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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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님의 댓글

초롱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 그 고생해서 집에 부쳐드린 돈이 그렇게 허무하게 날아가다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희가 전혀 알 수 없는 역사를 눈에 보이듯이 소상히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br />다음 글도 기다리고 있어요.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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