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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규칼럼 아빠의 이야기(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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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05-22 10:53 조회3,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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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목사 빨갱이 교회
 
-70년대 80년대에 독일에서 목회를 하시던 목사님들은 반정부, 반국가, 친북, 빨갱이이로 분류되고, 일부 한인광부들, 동포들을 이용한 동포사회분열 공작이 참 치열했다. 그때는 매주 모이는 한인교회는 굉장히 광범위하게 있어서 신앙과 관계없이 만남의 광장이자 소통의 장이기도 했다.
특히 파독광부들이 제일 많이 거주하는 노드라인베스트팔렌주 본(Bonn), 쾰른(Koeln), 악헨(Aachen), 뒤이스브르크(Duisburg), 복흠(Bochum), 도르트문드(Dortmund), 알렌(Ahlen) 등 6-7개 교회를 한독교회협정에 의해서 파견된 장 성환 목사님은 목회도 쉬지 않는 마라톤 선수처럼 뛰었다. 또한 한국민주화, 인권신장운동을 치열하게 하셨단다.
 
73년 4월 목회를 시작한 장 성환 목사님은 74년  3월 1일 ‘민주사회 건설을 위한 선언서’를 파독광부, 간호사, 유학생, 목사, 실업인들 55명의 서명을 발표되었는데 장 목사님등 교인 7명이 선언서에 서명한 것이다. (독일민주사회건설협의회(Forum fur Demokratie in Korea)) 유신선언에 반대하는 민주화 깃발이 세워지자 주독한국대사관(Bonn)은 다양한 공작으로 파독광부들은 감시하고, 프락치도 심어서 친정부, 반정부로 분열을 일삼았는데 너무 노골적으로 하다가 동백림 사건 후 또 한 번 독일을 놀라게 한 일명 발줌(Walsum)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례를 그때 그 사건의 중심에서 투쟁했던 M형을 90년대 중반에 인터뷰해서 정리한 자료를 함께 보자.
 
[발줌사건과 교회 활동]
75년 
3월23일 부활절 연합예배(Walsum 사건과 관련 좌담회)
4월20일 예배장면 WDR TV 방영(Walsum 사건 관련)
6월 2일  WDR 제 1 방송국 방송(Monitor)
 
apa16-01.jpg
                                   [ Stern 잡지기사]
 
발줌 사건
광부들을 억압하는 대사관
 
M형의 이야기
-처음 독일에 내린 공항은 광부라면 누구나 통과하는 뒤셀도르프 비행장 이였으며 발줌 광산에 배치된 나는 케틀러 라고 하는 광산 기숙사에 들었다. 내가 독일에 오게 된 목적은 여기에서 선교 활동도 하며 독일제 의료 기구를 사서 크리스천 의료선교협에 보내 주는 사명을 가졌던 것이다.
외국 선교의 사명을 띠고 광부로 독일에 온 내가 처음으로 교회를 빌린 곳은 딘스라켄 이라는 지방이다. 도착한 다음 날부터 교회 장소를 물색하여 12일 만에는 교섭을 마치고 우리 광부들 84명이 모여서 독일인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보았다.
그때 내가 있던 기숙사에 통역들이 조직한 일명 정보부라는 것이 있었다. 그들은 한국 정부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공공연히 떠들었다. 그들이 정말로 한국 정부의 정보부원 이였는지 아니면 공갈 협박 단체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확실히 알 수 없다.
통역으로 있는 이봉창은 나와 함께 온 광부 중에서 자기 말에 고분고분 할 것이라고 보여 지는 16명을 뽑아 놓고 "여기서 정보활동을 하고 귀국하면 정식 정보요원으로 채용할 것이다. 내 말을 잘 듣고 반국가 행위자의 정보를 수집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통역 이봉창의 말을 믿었던 그들 16명은 동료 광부들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대사관에 등기 우편으로 보고서를 발송하였는데 그 보고서의 일부를 지금도 내가 소지하고 있다. 소위 정보요원이라고 하는 16명 중에 보고서 발송 책임자는 C 이다. 그는 지금도 내 이웃에 살고 있으며 나와 가까이 지내고 있다. C 은 자기가 잘 알고 있는 동료 광부들이 반국가 행위자로 조작되어 보고됨을 뒤 늦게 서야 깨달았다. 죄 없는 사람이 귀국 후 처벌될 것을 생각하여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 그리고 보고서를 대사관으로 발송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내가 지금도 가지고 있다.
광부 초년생인 우리들의 광산 교육기간은 3개월이다. 이 교육기간은 월급이 적으나 4 개월째부터는 정상적인 노동단가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4개월 째 월급 계산서에 27명의 광부들이 월급이 오르지 않고 교육단가 그대로였다. 그리고 50여명이 교육 단가보다 약간 높았고 나머지 5명 많이 정상적인 노동단가로 계산되었다.
그들이 모두 교육을 무사히 마치고 지하 막장에서 탄을 캐고 있으면서도 왜 저 임금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고? 하면 통역들이 광산 측에 고자질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도착하였을 때 통역들은 "기숙사 밖으로 나갈 때는 3명 이상이 짝지어 나가라. 만약 혼자서 다니다 이북 사람한테 잡혀가면 다음 날에는 평양에 도착하게 된다."라고 위협을 했다. 우리들은 모두 그 말을 믿었으며 겁에 질려 있었다.
그래도 아는 사람이 독일에 있으면 혼자서 외출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들은 독일에 먼저 온 광부나 유학생들을 만났다. 그리고는 광산 통역의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기숙사 밖에서 친지를 만나보고 돌아온 이들은 "통역이 거짓말했다. 독일에 북한 공산 당원이 어데 있느냐? 이것은 민주 인사를 때려잡으려는 유신 세력들의 장난이다. 정보원한테 속지 말아라"고 하였든 것이다. 물론 독일 말을 늘 못하니 통역의 미움을 사면 좋지 않을 것 같아 소근 소근 말을 했으나 그 말이 통역의 귀에 들어가 미움을 샀던 것이며 그의 조작으로 월급이 교육단가로 계산된 것이다.
이러한 것 들은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때 나는 기숙사 내의 우리 광부들이 조직한 한인회장을 맡고 있었다. 우리 광부들은 회사 측에 알아볼 것을 의논하였고 기숙사 회장 이였던 나는 동료들의 결정에 따라 광산의 경리과를 찾아가 이러한 부당 임금에 대하여 문의하였다.
광산 측으로부터 "다음 달 부터는 모두 정상 임금이 지급될 것"이라는 약속을 듣고 돌아왔다. 그런데 다음 달에도 역시 임금은 마찬가지로 지급되었다. 동료들은 즉시 회의를 열고 광산 측의 일방적인 부당 임금에 대하여 토론하였으나 결론은 전과 같이 다시 한 번 경리과에 항의 내지는 질문을 해 보기로 하고 그 대답에 따라 다음 대책을 세우자고 결정하였다.
우리들의 항의를 받은 광산의 경리과 직원은 지난달에 "다음 달 부터는 정상 임금을 지급 하겠다"고 했던 바로 그 사람 이였다. 그는 이번에도 전과 같이 "다음 달 부터는 모두 정상적인 노동 단가로 계산해 주겠다."라고 대답하였다.
광산 측의 대답을 전하자 우리 광부들의 의견은 구구하였다. 오랫동안의 토론 끝에 "속는 셈치고 한 달만 더 기다려 보자"라는 결론이 내려 젓다.
다음 달 월급 계산서를 받아든 광부들은 기숙사 여기저기에 모여서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다음 달 부터 우리 모두에게 정상적인 노동 단가를 지급 하겠다"라는 약속과는 달리 이번에도 월급은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부들은 즉시 각자의 월급 계산서를 들고 모여 앉았다.
그 자리에서 서로의 월급계산서를 대조해 보았는데 부당 임금 항의에 대표 격으로 앞장선 나와 몇 명의 월급은 그들이 말하는 "정상적인 노동 단가"로 계산되었고 나머지 광부들은 교육 단가 그대로거나 몇 푼씩밖에 올려 주지 않았다.
말로는 교육 단가보다는 올려 줬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러한 월급은 정상 노임의 반 보다 조금 많은 것에 불과하다. 광부 동료들은 "독일은 법치국가다. 노동자 부당 임금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부당 행위다. 그러니 탄원서를 내자" 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와 같은 결정 사항은 우리가 광산 측에 항의하거나 탄원서를 작성도 하기 전에 대사관에 알려졌으며 대사관에서는 우리들의 임금 투쟁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그때 우리들의 기숙사로 찾아온 사람은 임정삼 노무국장. 홍 아무개 노무관. 광산의 본사 통역이던 조립 씨와 대사관 통역이던 홍성택 그리고 각 광산의 통역들이다.
그들은 "여러분이 결정한 대로 탄원서를 낸다면 다음부터는 우리나라 광부들이 독일에 올 수 없다. 주동자들은 즉시 추방될 것이다. 앞으로 곤란한 문제가 생기니까 여기서 손을 데시요"라고 하였다. 협박과 다름없는 임정삼 노무국장의 이와 같은 말을 듣고 우리들은 "이것은 대사관에서 해야 할 일이다. 대사관에서 못하면 가만이나 잊지 어째서 못하게 하느냐?"라고 반박을 하였다. 그러자 대사관에서는 무슨 말인가 하려 하였으나 광부들은 모두 우르르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이렇게 되자 임금투쟁을 저지하려고 노무국장 임정삼이가 끌고 온 무리들은 회장인 나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들의 요구는 "회장이 손을 떼면 모든 일이 없든 것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손을 떼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역시 종교에 찌들어 있을 때 이었다. "나는 종교인의 양심으로 절대로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버티었다. 대사관의 임정삼 노무국장과 그가 끌고 온 무리들은 광부들을 설득해서 임금 투쟁을 막으려던 자신들의 계획이 빗나가자 더 이상 우리를 설득하려고 들지 않고 광산 측과 타협을 하였다. 그들이 누구를 만나서 어떠한 타협을 하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사관의 무리들은 "여러분들이 언론 매체를 통한 공개서한을 발표하지 않으면 다음 달 부터는 모든 이의 월급이 "정상적인 노동 단가"로 계산될 것이다"라는 약속을 하고 떠났다. 대사관의 약속은 믿었던 우리들은 한 달 간을 기다렸다. 그러나 역시 월급은 오르지 않았다.
우리들은 그날 밤 광산 측의 부당 임금에 대한 투쟁 방침을 세우려고 즉시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회의 결과 지난달 결정한 대로 언론 매체를 통한 공개 탄원서를 내기로 하였다. 탄원서의 작성은 회장인 나에게 일임되었다. 그 결정에 따라 나는 밤새껏 탄원서를 작성하였다.
다음 날 밤 다시 모인 광부들은 내가 작성한 탄원서에 이의 없이 발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다음 날 그러니까 네 번째의 부당 임금 계산서를 받은 다음다음 날 나는 한글로 작성한 탄원서를 들고 광산 통역을 데리고 인사과장을 찾아갔다.
여러 장으로 복사한 것 중에서 한 장을 그에게 주며 "너는 돼지다. 너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돼지다. 그리고 너는 거짓말쟁이다. 여러 차례 월급을 올려 준다고 약속하고서도 올려 주지 않았으니 너는 정말로 돼지다. 내가 한 말은 여기 있는 통역한테 들어라"라는 말을 끝내고 함께 간 통역을 남겨 두고 사무실에서 혼자 나왔다.
통역과 광산의 인사과장이 무슨 말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광산의 인사 과장은 대사관으로 연락을 취하였던 것 같다. 대사관에서 공사, 영사, 노무관 등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광산 기숙사로 몰려왔다. 그들은 우리들을 철저하게 협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광부들에게 만약에 탄원서를 언론 매체를 통하여 공개할 경우 주모자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귀국시키겠다고 협박하였다.
우리들은 독일에서 목회활동을 하는 장 성환 목사한테 이러한 사실을 연락 하였고 장 목사는 즉시 유학생들에게 연락하였다.
목사의 연락을 받은 유학생 8명이 광부 기숙사로 찾아와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일부는 돌아가고 일부는 남았다. 그들 남아 있는 유학생들은 광부 대표들과 함께 광산 기숙사와 같은 도시에 있는 이 종현씨의 집으로 갔다. 거기서 탄원서를 삼등분 하여 이 영준씨 배 동인씨 한 영태씨 셋이서 독일어로 번역하고 이종현의 부인이 독일 여성이라서 그에게 교정을 부탁하였다. 한편에서 번역하고 교정하는 사이 일부에서는 발송될 탄원서의 봉투에 주소를 썼다.
교정이 끝나자 즉시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 복사를 하였다. 그놈을 가지고 우리들은 뒤스부르크 중앙 우체국으로 갔다. 그곳은 24시간 근무하는 곳이다. 밤 11시 반경에 독일의 국회, 법원, 검찰청, 신문사, 방송사 등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120곳에 독일어로 된 우리들의 탄원서를 보냈다.
우리들의 탄원서는 다음날 아침 심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려 있었으며 방송국에서는 뉴스 시간에 우리 광부들의 탄원서를 보도하였다. 이렇게 되자 광산에서는 난리가 났다. 대사관에서도 오후가 되자 공사 영사 노무관 등이 무리를 지어 광부기숙사로 쫓아왔다.
그러나 신문과 방송에 보도된 이 사건은 엎질러진 물과 같았다. 그러니 대사관 무리들은 광부들에게 협박만 하였지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독일 정부에서는 검찰청에 특별 부서를 두어 이 문제를 전담케 하였다. 검찰의 조사 과정에서 이 사건이 대사관과 연관되었으며 광부들의 동태를 파악하여 보고한 것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우리들은 대사관을 상대로 고소를 하였고, 이렇게 되자 우리 부당 임금에 항의하는 광부들은 곳 북쪽의 간첩으로 몰리게 되었다. 독일 광부들끼리 하는 말 중에는 "물새"라는 말이 있다. 땅속에서 번 돈은 햇볕 보면 날아간다고 하는 것처럼 술 마시고 노름하고 오입하고 하느라 힘들게 번 돈은 몽땅 까먹고 귀국할 수 없는 자들을 칭하는 말이다. 대사관에서는 독일 전역의 물새 20여 마리를 불러다 우리 기숙사의 정보 조직원들 방에 재우며 우리를 협박하였다. 이 물새들은 발줌 사건을 깨끗이 마무리 지으면 여권 연장과 광부 재취업에 도움을 주겠다는 말을 듣고는 우리들 중에 가장 약한 사람부터 하나씩 깜깜한 밤중에 불러다가 라인 강가로 끌고나가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우리들의 오토바이를 끌어다가 라인 강가에 싸 놓고 불태우기도 하였다.
내가 기숙사의 회장 이였으며 이 임금 투쟁의 주동 인물이라 내게는 조금 나중에 닥친 일이다. 하루는 광산에서 오후 작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술집으로 끌려갔다. 광산과 기숙사의 거리는 1.5Km 정도 된다. 이 짧은 거리였지만 오후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물새들한테 끌려 기숙사에서 좀 떨어진 주막으로 갔다. 내가 그들에게 억지로 끌려 주막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기에도 몇 마리의 물새들이 있었는데 모두 20여 마리 되는 것 같았다.
그들 중 몇몇이 칼을 꺼내 찌를 것 같이 위협을 하였다. 물새들은 고향에 두고 온 내 처와 딸을 그리고 형제들을 중앙정보부에 끌고 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이렇게 물새들과 실랑이를 하고 있는 사이 기숙사 동료들이 내가 납치된 술집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내가 납치되는 것을 한 동료가 보았고 그는 기숙사 동료들에 알렸으며 광부들은 내가 끌려간 방향을 따라 술집마다 뒤지며 다니다 결국 내가 있는 곳을 찾아냈던 것이다. 광부들이 몰려오자 물새들은 슬금슬금 도망을 갔는데 이러한 이네들의 폭행은 이루다 말할 수 없다.
예를 든다면 정말로 아파서 누워있는 사람도 꾀병이라고 광산 측에 고자질을 하였다. 그러면 광산의 인사과장이 기숙사 사감한테 전화를 하여 "아무개가 방에 있으니 빨리 일 보내라"했다. 그러면 사감이 그의 방에 찾아와 아픈 것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그는 아픈 것이 사실이며 열이 나기에 내가 약을 주었다"라고 보고를 하였다. 그래도 인사과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는 건강하다. 빨리 일을 보내라"고 명령을 하였다. 그러한 일들은 나중에 검찰 조사에 사감이 진술하여 밝혀진 사실이다. 그리하여 기숙사 내의 정보 요원이 대사관에 보고하고 대사관은 광산 사장한테 전했으며 사장은 인사과에 인사 과장은 사감한테 명령한 것이 알려졌다.
독일의 검찰청 특수부에서 조사하고 우리가 대사관을 상대로 고소하여 사건이 우리나라 대사관과 광산 측에 불리하게 전개되어 갔다. 그러자 대사관 패거리들은 광산 측과 협의를 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며 임금 투쟁 핵심 인물 중에서 가장 약한 사람부터 하나씩 해고시키려 했던 것 같다. 대사관의 똘마니들은 C 부터 들볶기 시작하였다. C 는 동료 광부들의 행동을 일일이 대사관에 등기 우편으로 보내는 책임을 맡았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고 돌아선 사람이다.
광산은 규율이 엄하여 광부들이 광산 내에서 주먹다짐으로 싸움질을 하면 해고시킨다는 규정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C 를 해고시켜 한국으로 내 쫓으려고 출근만 하면 주먹으로 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해고시킬 수 있는 구실을 찾으려는 짓으로 알고 있던 우리들은 C 에게 절대로 대항하여 싸우지 말도록 했다. 우리들의 부탁대로 C 는 매일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음으로 경찰에 고발하였다. 그런데 증인을 세우면 그들이 오히려 더 많은 증인을 세우고 C 가 먼저 때렸다고 거짓 증언하였다. 광산 측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C 를 해고시켰으며 해고 당일 떠나야 하는 비행기 표를 주면서 짐을 가지고 나오라고 하였다.
C 를 귀국시키지 않으려는 우리들은 그를 독일인 목사 집에 숨겨 두었는데 C 는 독일 목사 집에서 3주간이나 숨어 있어야 했다.
독일의 신문과 방송에 떠들썩했던 소위 말해서 "발쥼사건"은 나와 나를 따르는 몇몇 동료들의 끈질긴 투쟁으로 점점 확대되었다.
사건이 이렇게 확대되자 광산 측에서는 모든 책임을 우리나라 대사 관측에 떠 넘기였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광산측은 모든 것은 한국 대사관에서 하라는 대로만 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대사관에서 광산에 보낸 공문서를 증거로 내 놓았다. 또한 일주일에 한 번씩 대사관에 등기 우편으로 보고한 담당자였던 C 가 진술하였고 우체국 등기부가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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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씨와 대담을 마치고 등기우편발송 담당자 C 씨를 만났다.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여기에 삽입한다.
"독일에 처음 와서 광부 동료들의 행동을 감시하여 대사관에 보고하시는 책임을 맡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대사관의 누구에게 어떠한 보고를 하였습니까?"
"그러한 것들은 말하고 싶지 않으며 말할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신앙인으로 한번 약속한 것은 지켜야 됩니다."
"대사관에 각서를 쓰고 부인을 초청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 각서 때문인가요?"
"그것을 각서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쓰고 서명했을 뿐입니다"
"부인과 자식들은 언제 초청 하였습니까"
"햇수로 친다면 독일에 온 8년 만에 초청 하였습니다"
"지금은 발줌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방금 말했듯이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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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대사관에서는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내 생각으로는 광산 측에서는 우리를 혹사시키려 했던 것임으로 책임은 대사관과 광산측이 반반씩 저야 한다. 그러나 독일 광산 측에서는 우리나라 대사관에서 보낸 공문서를 증거로 내세워 모든 책임은 대사관이 떠맡게 되었다.
대사관에서는 그때는 물론이지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숙사에 조직된 정보원이라 사칭한 무리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단다. 그러면서 그네들이 일방적으로 보고해와 받았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사관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무리 기숙사의 광부들이 허위사실을 보고해왔다 하더라도 그것을 근거로 광산 측에 공문은 보내지 않았으리라고 본다. 그럼으로 나는 이 사건이 단순이 몇몇 광부들의 짓이라 보지 않고 대사관의 조종에 의하여 발생된 사건이라고 본다. 또한 광부들의 임금은 한국정부와 독일의 노드라인 베스트팔렌 주정부와의 계약체결에 의한 것이다. 광산 측의 일방적인 저임금은 사실상 계약위반이다. 그럼으로 대사관측과 사전 합의가 없다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본다.
독일의 여러 신문과 방송 그리고 테레비존방송에서 찾아와 인터뷰를 하였다. 그때 만해도 나는 독일어를 제대로 못하여 인터뷰 할 때면 유학생들에게 통역을 부탁하였다. 유학생들은 통역뿐이 아니고 내 진정서를 번역하여 여러 기관에 호소하였다.
민주사회건설협의회 유학생들은 내 진정서를 번역하였다. 그리고 국회 특별조사단이나 종교청, 검찰조사, 신문, 방송과의 인터뷰할 때 통역도 해주고 공개성명을 통하여 이 "발줌 사건은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제 2의 동백림 간첩을 조작하였다"고 발표 하였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이 문제를 크게 다루게 되었다. 계속되는 보도는 독일국민들의 자존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고 독일 정부는 더욱 철저히 조사에 임하였다.
그때 유학생들이 들려주는 바에 따르면 철저하게 조사를 끝낸 독일 정부 측에서는 "이 사건은 동백림 간첩 조작사건 처럼 한국 중앙정보부의 간첩 조작 사건은 아니다. 다만 몇 사람이 개인적으로(?) 정보조직을 해서 몇 사람이 피해를 당했는데 그러한 사소한 일로 국교를 단절해서야 되겠느냐? 그러니 우리정부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는 선에서 깨끗이 해결하자"라고 했단다. 그래서 주독 대한민국 대사관 직원 중에서 임 정삼 노무관만 남아있고 모두 강제 추방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고 했다.
우리는 주독 한국대사관을 상대로 고소를 하였다. 그런데 관련자들이 없어 졌으니 재판은 진행되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이 자료는 J씨가 인터뷰해 정리한 기록입니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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