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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은 파독광부가 독일땅에 온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63년 파독광부 1진이 독일에 도착하면서 재독동포사회가 시작되었고, 전세계 동포사회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독광부분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셨지만 정작 개인적으로는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고생도 많으셨을 겁니다.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어찌 몇마디 필설로 다하겠습니까만 파독광부분들중에 몇분이 독일땅에 와서 겪은 체험을 여기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파독광부의 삶은 그 자체가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러니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어렵게 글을 써가실 때, 서투른 점이 있더라도 많은 성원 바랍니다. 

김재승칼럼 어머님 죄송합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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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4,190회 작성일 13-05-08 01:17

본문

“이대로는 안 돼. 내가 우리 집을 빨리 살리는 길 밖에 없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시골에서 빨리 떠나고 싶은 생각뿐이다. 학교 다니면서 목포에서 생활해본 경험이 있지만 목포에서 젊음을 시작하고픈 생각은 없었다. 가정 형편상 도저히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하고 기술을 배우는 길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취직을 해서 돈을 벌기로 작정을 하고 일할자리를 여기 저기 찾아보았다.  취직도 아는 사람이나 친척이 이끌어 주어야 가능하다는 것도 깨 닳게 되었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기술을 배우게 해주는 기술 병 모집광고를 보았다. 입대해서 기술을 배우는 대신해 장기복무를 해야 되는 것이다. 만 17살이니 나이는 자격이 된다. 입대하기로 결정한 뒤 부모님께 말씀드린 뒤 서류제출을 하고 신체검사를 마치니 논산 훈련소 입영 소집통보가 나왔다. 입대하는 날 아버지께서 주신 용돈 500원을 받아 들고 저녁열차로 논산으로 향했다. 그때 군대 PX에서 식빵 한 개에 10원씩 했으니 빵 50개 값은 된다. 군대 가면 돈이 더 필요하긴 하겠지만 빤한 집안형편을 아는 내가 그 돈도 고마울 따름이다. 논산훈련소로 가는 날 난생처음 도둑열차도 타 보았다. 소집영장에 응하면서 차비를 내고 간다는 것도 마음의 허락이 되지 않고, 용돈 500원에서 차비를 내고 나면 몇 푼 남지 않아 도둑열차를 타고 논산까지 갔었다. 논산에 아침에 내려 아침도 거르고  집결장소인 수용연대로 갔다. 먼저 머리를 기계로 빡빡 밀고 며칠을 거기서 지내다가 30연대로 신병훈련을 위해 팔려가는 날, 연병장에 집합을 시켜놓고 입었던 옷은 벗어서 집으로 보내고 군복을 지급받아 갈아입는다. 우리는 30년대 8중대로 보내지는데 우리 기술병들은 같은 내무반으로 보낸 진단다. 옷을 군복으로 갈아 있는데 내무반장이라고 하는 하사 한사람이 내가 입고 있는 티셔츠 보더니 집으로 보내니 말고 내무반으로 그냥 가져가란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내무반에 돌아와서는 그 티셔츠를 자기 달랜다. 아무리 군대라고 하지만 너무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내가 반항할 수도 없는 처지, 입 한번 놀렸다간 빠따로 엉덩이가 남아나지 않을 터니 그 내부반장이 내 옷을 뺏어서  입고 다니는 것을 보면서도 그냥 참는 수밖에. 전방 6주, 후방 4주 지겨운 훈련을 마치고 동기들과 통신학교로 가서 52주 교육을 받았다. 통신학교이니 기술을 배우는 학교지만 내무반 생활하나는 무척 엄했다. 어린사람들이 여기서 소위 깡?을 키우지 못하면  부대배치를 받아 나이 더 먹은 졸병들을 다룰 수 없다며 깡? 을 기르는 훈련을 많이 받았다. 통신학교 생활은 전부 자치제였다. 처음 점호를 취하는데 선배들이 와서 하는 말이 부동자세인데 눈깔 돌아가는 소리가 난단다.
다른 군인들은 입대를 하면 화랑담배가 지급이 되는데 기술병들은 어리다고 담배가 지급되지 않고 대신 저녁에 식빵이 하나씩 더 지급이 된다. 다시 말하면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같이 담배를 피우지 않은 사람들은 배고픔에 시달리는 처지에 식빵이 하나 지급되는 것이 감지덕지 하지만 동기생들 중에는 원래 담배를 피우는 동기들이 많았다. 갑자기 끊지를 못하고 화장실에서나 구석에 숨어서 피우다가 발각되거나, 또 내무반이 아닌 다른 곳에 담배를 감추어 놓은 것이 발각되는 날에는 전 중대 비상이다. 기압종류도 여러 가지다. 여름이면 지급받은 군복 3벌에 내복까지 끼어 입은 다음 겉에는 비옷까지 입고 연병장에 집합해서 기압, 겨울이면 한쪽엔 군화, 다른 한쪽은 통일화를 싣고 알 철모에 팬티만 입고 연병장 집합이다. 모기가 많은 여름이면 숲속으로 데리고 가서 옷을 볏겨 놓고 열중쉬어, 차렷! 한 다음 부동자세로 세워놓으면 모기가 새까맣게 붙는다. 허지만 차렷 자세인데 어떻게 움직인단 말인가? 하루라도 기압이나 빠따를 맞지 않은 날은 오히려 불안해서 잠이 오질 안했다. 기압이나 매타작을 한번 당하고 나서야 오늘은 더 없겠지 하는 생각에 잠을 들 수가 있는 것이다. 대전 통신학교는 타 부대 통신병과들도 모인다. 해병대와 해군, 공군, 간부후보생은 물론이고 육사 생들도 4학년이 되면 통신학교 와서 몇 개월씩 교육을 받는데 서로들 알력이 참 심하다. 특히 해병대들은 계급에 상관없이 육군들을 괴롭힌다. 저녁시간에 짬을 내어 PX에 가서 잠깐 TV를 보고 있을 때 해병대가 들어오면 일반 육군 사병들은 일어나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아니면 구타를 당하기 때문이다. 허지만 우리 반 52명은 단합이 잘된 중대이기 때문에 서로 지지 않으려고  옆 부대 3관구 헌병대 그리고 해병대들과 싸움을 많이 한다. 우리가 어디 행군을 해서 가는데 기다리지 않고 우리 앞을 지나가는 부대가 있으면 누구라고 이야기 할 것도 없이 싸움을 시작한다. 하수도에 야전삽을 들고 숨어 있다가 야전삽으로 내려찍으며 싸움을 걸기도 하고 해병중대와 헌병대를 찾아다니며 싸움도 했었다. 학교에서도 그냥 눈감아준다. 그래야 기성부대 가서 살아남기 때문이다. 한번은 해병대, 육사, 헌병대. 간부후보생과 우리들이 제식훈련 시합을 했는데 우리가 공히 1등, 그날은 학교에서 준 특식을 먹고 즐겁게 논적도 있다. 군대에서는 행군 중 군가를 부르는데 우리는 특별한 군가를 작사, 작곡해서 행군 중 부르곤 했다.
 
“정월달 대보름날 막걸리를 마시고 수많은 헌병들과 완, 투 뽑는 소통 병, 그 이름 용감하다 소통의 용사들, 노래에 장단 맞춰 아귀나 질러라, 후크나 질러라. 짱돌이다 짱돌, 곤봉이다 곤봉, 오늘은 휴무 날이다, 내일은 기압이라도 오늘만은 우리세상, 야야 야야 날씬한 그대허리, 몽실 몽실 젖가슴이 나를 녹인다.”
 
어디에도 없는 군가 아닌 군가지만 그때 불렀던 군가가 45년이 넘은 지금도 가사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할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  52주 교육을 마치고 부대배치 받은 곳은 전주 35사단. 하사계급장을 달고 첫 군대생활을 시작한 것이 수월하지만은 않았다. 고참 병장들과의 갈등, 고참 하사들과의 갈등, 18세 나이어린 내가 부사관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 때 길렀던 담력 때문이었다. 전주에서 하도 촌놈 취급을 하고 무시하는 나이 많은 고참 하사가 있어서 하루는 너 죽고 나살자 라는 마음으로 싸움을 해서 그 사람을 다치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상황은 보니 고참 하사가 잘못했으나 고참 하사를 입원하게 했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고 중대장이 사단장 허가를 받아 영창을 보냈다. 중대장님이 우리 기술병 1기어서 우리에겐 의지가 많이 되었지만 공은 공, 할 수 없이 한겨울 영창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영창은 난로도 없는 마룻바닥에 한방에 2-30명씩을 넣고 머리를 칙착으로 뉘여  잠을 재우며 신참들을 뼁끼통(영창안 변기통) 옆에다 재우니 2-30명 되는 수감자들 중에 저녁에 소변을 보려면 꼭 내가 일어나야 된다. 결국 잠을 설치고 이튿날 일어나자마자 점호를 취할 때는 머리를 바닥에 박고(원산폭격이라 한다) 손은 열중쉬어 자세로 감방수칙과 수감자신조를 외우고 군가와 애국가 까지 다 마쳐야 고개를 쳐들고 일어날 수가 있었다. 감방에 들어갈 때 계급장 떼어내고 들어갔으니 먼저 들어온 수감자가 선배다. 들어가자 마자 감방 장에게 신고를 하고 나의 내복이 새것이라고 이가 더덕더덕 달라붙은 자기 내복 하고 바꿔 입잔다. 또 싸우고 들어온 놈이라고 감방장과 헌병들이 얼마나 구타를 하던지 지금 생각하면 젊었을 때나 이겨낼 수 있는 경험들이다. 며칠이 지나자 나하고  싸움을 했던 그 고참 하사도 잘못을 했으니 치료를 마치고 머리를 싸맨 채로 영창으로 들어와 나하고 같이 영창생활을 했다. 영창 생활 중엔 가끔 군목들이 와서 설교를 하는데 겨울에 밖에다 집합을 시켜놓고 1시간 이상 설교를 할 땐 왜 그리 목사가 원망스럽든지. 영창생활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니 보는 눈들이 달라졌다. 선임 병장들도 말을 잘 듣고 다른 고참 하사들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군대생활은 기술 병 출신이라는 덕분에 전라북도에서 부안군 의상봉에 있는 공군미사일부대. 군산 비행장, 정읍 파견대 생활들을 주로 했다. 파견생활이란 몇 명이 부대가 아닌 다른 지역으로 가서 생활을 하니 자유가 있어 훨씬 군대생활이 훨씬 수월하다. 전주생활 24개월이 지나자 중사 진급시험이 있었다. 교육을 오래 받은 기술병들은 곡가점수가 많아서 여러 가지 시험을 마치고 별 어려움 없이 정확히 24개월 만에 중사로 진급할 수가 있었다. 그때 중사면 월급이 그때 공무원 4급 을 월급이다. 2만 8천 원 정도 받은 기억이 있으니 교육공무원보다 오히려 월급이 많은 편이다. 70년 4월 막 중사로 진급하고 나서 영외거주도 시작하고 조금 편한 군대생활이 시작되나 보다 생각했는데, 우리 사단으로 내 주특기에 중사 한명 월남차출 명령이 내려왔다. 우리사단에 중사로써 내 주특기는 나 한 명이었으니 자동 차출된 셈이다. 중대장이 사단 인사처로 찾아가 우리 사단에서 제일 모범중사며 우리 중대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니 월남에 보내지 않겠다고 했으나 군대에서 명령은 명령, 할 수 없이 강원도 오옴리 훈련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어쩜 내가 바란 일인 줄도 모른다. 월남파병 말기라고는 하나 어떻게든 한국에서 받는 월급은 고스란히 집으로 송금되고 참전수당 60달러는 따로 모을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집에 알려도 빤한 반응, 연락도 하지 않고 오옴리로 출발했다. 오옴리에서 힘든 4주 훈련을 마치고 월남으로 가기 몇 일전 인사과에서 호출이다. 어떻게 외아들이 월남을 가냐는 것이다. 나는 차출이 내려와 할 수 없이 가는데 나한테 그걸 물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대꾸를 해도 외아들은 월남에 갈 수 없으니 다시 원대 복귀해야 된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부대를 떠나왔는데, 보내지 않으려고 중대장님이 힘써도 안 되어서 떠나왔는데, 중대에서 중, 상사 이상 장교들의 거창한 회식도 받고 왔는데, 이것저것 생각해도 다시 전주로 돌아간다는 것은 도저히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따졌더니 방법이 하나 있다하면서 그때 2만원인가 하는 차용증을 하나 써 달라하는 것이다. 결국은 돈을 쓰고 월남을 간 것이 되어 버렸다. 차용증에 쓴 일금 2만원은 다음 달 월급에서 에누리 없이 떼어 갔다.  훈련을 마치고 월남 가는 배를 타려고 저녁에 춘천역에서 부산으로 출발한다. 청량리역에 나온 고모님과 눈물로 이별을 하면서 부모님하고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준비해둔 금반지 하나를 어머님께 전해달라며 고모님께 드리고 헤어졌다. 열차는 저녁내 달려 이튿날 아침 부산에 도착했다. 열차가 대구역에서 잠깐 쉬는 동안 월남으로 출발하는 자기 아들 찾으려 이름을 부르며 열차를 뛰어 다니는 부모님들, 부산 부두에서 학생들과 여군들이 해준 환송식을 마치고 배가 출발하려 할 때 배위에서, 부두에서 서로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소리. 내 옆에 한 병사는 “나는 포병이니까 절대로 안 죽는다. xx야 염려마라” 하며 애인한테 울부짖는 소리에 이젠 진짜 전쟁터로 가는 모양이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배가 고동을 울리면 군악대의 “잘 있거라 부산항구야” 연주가 시작되며 육지에서 점점 멀어져 갈 때 이 땅을 1년 후에 다시 밟을 수 있을까 하는 착잡함은 감출수가 없었다. 피우지 안했던 담배도 월남파병을 명령받고 시작했다. 오옴리에서 훈련을 시작할 때부터 화랑담배가 아닌 양담배가 하루에 한 갑씩, 나중에는 후회했지만 착잡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서는 담배가 위안이 되었던 모양이다.
배는 한국 땅에서 멀어져 간다. 5일 동안 향해 중엔 힘든 시간이었다. 우선 음식도 한국 군대 밥이 아닌 양식이다. 미국 배이기 때문에 선원들도 전부 미국 사람들, 오랫동안 향해를 하니 뱃멀미에다 매큼한 한식이 아닌 양식을 먹으려니 정말 힘든 일이다. 한 카비넷에 몇 십 개를 침대를 가져다 놓고 거기서 시간을 보낸다. 한 번 씩 갈수 있는 곳이 간판, 배와 속력을 맞추어 날아다니는 날치라는 생선과 상어 때가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가끔 비상훈련을 한다. 향해 중 위급한 상항에 대한 대비 훈련이다. 구명조끼를 입고 좁은 배안에서 여기 뛰어다니는 모습이 가관이다. 멀미에 인삼뿌리와 오징어 다리가 도움이 된다고 여기저기 씹고 다니는 군인들도 보인다. 한국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흩어진 행동을 하면 미국선원들은 통하지 않은 말로 사정없이 뭐라고 한다. 가기 싫은 곳이지만 빨리 도착했으면 싶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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