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동포 미디어 베를린리포트
커뮤니티 새아리 유학마당 독어마당
커뮤니티
자유투고
생활문답
벼룩시장
구인구직
행사알림
먹거리
비어가든
갤러리
유학마당
유학문답
교육소식
유학전후
유학FAQ
유학일기
독어마당
독어문답
독어강좌
독어유머
독어용례
독어얘기
기타
독일개관
파독50년
독일와인
나지라기
관광화보
현재접속
733명
2013년은 파독광부가 독일땅에 온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63년 파독광부 1진이 독일에 도착하면서 재독동포사회가 시작되었고, 전세계 동포사회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독광부분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셨지만 정작 개인적으로는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고생도 많으셨을 겁니다.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어찌 몇마디 필설로 다하겠습니까만 파독광부분들중에 몇분이 독일땅에 와서 겪은 체험을 여기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파독광부의 삶은 그 자체가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러니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어렵게 글을 써가실 때, 서투른 점이 있더라도 많은 성원 바랍니다. 

김재승칼럼 어머님 죄송합니다.(2)

페이지 정보

작성자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3,406회 작성일 13-04-17 18:40

본문

, 시골에서도 무척이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전라남도 곡성군 입면 삼오리라고 하는 첩첩 산중이다. 끼나 조차 챙길 수 없는 가난한 집안에서 장남으로, 지금 밑으로 여동생만 여섯이 있으니 외아들로 태어난 셈이다. 태어나긴 광주에서 태어났다 하는데 태어난 해에 6.25가 터지자 시청에서 근무하셨던 아버지께서 식구들과 같이 피난간 곳이 시골 대소 가절이 모여 사는 동네로 갔다가 거기서 정착을 했던 것 같았다.
할아버지께서 독자, 아버지께서 7남매 중 장남이셨으니 우리까지 3대가 한집에 모여 살아야 했다. 좁은 방 2칸짜리 오막살이에서 할아버지 내외분, 삼촌들, 고모, 우리 부모님과 동생들 까지 한집에 살기엔 턱없이 좁은 공간이어서 식구들은 조건만 된 다면 친구 집이나 다른 남의 집에 가서 자곤 했던 기억이 난다. 나도 어렸을 때 공부방이 따로 있는 친구 집에 가서 매일 잠을 자다시피 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는 것은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후였다. 그전에는 부산 어디론가 돈 벌로 가셔서 집에서 같이 살지를 안했으니 기억이 없다. 어머니께서 너의 아버지는 부산에서 다른 여자하고 같이 살림 차리고 산다는 하소연만 하시곤 한 기억만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장남인 아버지께서 가족들 생계를 책임지고 집에서 같이 생활을 하셨기 때문이다.
 
동네 사랑방에 가셔서 주무시곤 했던 할아버지께서 새벽에 의식을 잃고 호흡을 못한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간 식구들이 할아버지를 집으로 업어 모셔다 놓고 둘러앉아 울기만 하고 있다. 지금 같으면 빨리 병원으로 갔었을 텐데 그 땐 병원에 갈 생각은 엄두도 못 내고 의식은 완전히 잃고 이 호흡기를 막은 상태로 약한 호흡만 하고 계시는 할아버지 옆에서 그냥 울고만 있는 것이다. 하긴 그때 시골에서 누가 병원엘 다녔을까? 아파서 누어있어도 그런 가보다, 사람이 죽어도 그 사람 운명이라고 판단하고서 시골에서 사용하는 단 방약 외에는 병원에 간다는 생각은 다 못했던 것 같다. 가끔 시골에서 누구네 집 아저씨는 잠을 자다가 죽었다는 둥, 누구네 는 어제저녁에 혼자 앉아서 죽었다는 둥의 소문들이 있는데 죽은 원인은 다 귀신 때문이라고 하지 안했던가? 술에 취해서 냇물을 건너다 사고가 나서 죽으면 그곳에 원래 귀신이 있었다는 등, 전부 귀신 탓만 했던 시절이니 우리 할아버지도 그렇게 돌아가시는 것이 당연하기만 한 그 시절 시골 형편이었다. 오전 10경에 숨을 거두셨던 할아버지도 지금 생각하면 틀림없는 심장마비다.
없는 집안에서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으니 장례치를 일도 큰 부담이었다. 보통 시골에서는 상여를 만들고 마을사람들이 모여서 잔치 아닌 잔치를 하면서 장례를 치르는데 우리 집은 상여를 만들 형편도 되지 못했던 것 같다. 관은 없으면 안 되니까 관하나 만들어 사다리위에다 얹어서 메고 나가 동네 문중 산에다 그냥 묻었던 것이다. 상여하나 만들지 못한 가정형편이 어린 마음에도 참 자존심 상했지만 그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부산에 계셨던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 소식을 듣고 달려 왔지만 동네사람들이 관을 메고 나가 산에 막 묻으려고 하는데 오셨다. 사실 마지막 묻히기 전 인사만 하는 꼴이 되었다.
서당에 훈장이셨던 할아버지께서 날 학교만 다녀오면 앉혀놓고 한문공부를 시켰는데 그땐 나에게 큰 고역이었다. 천자문을 막 읽을 수 있고 해석할 때 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어린 생각에 이제는 한문공부 안 해도 되는 구나하는 생각에 좋아했던 기억도 있다. 지금생각하면 그때 한문공부만 잘 했어도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아쉬움은 크지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니 아버지께서는 장남으로 해야 될 일이 많았을 것이다. 그땐 3년 상을 치르는 동안 집에다 영정을 만들어 놓고 매일 밥을 해서 올리고 자손들은 을 하고 담배까지 불붙혀서 영정 앞에 올려놓곤 했는데 그것도 우리 형편으로는 어려웠을 것이고 장손으로 가족들 생계도 책임져야 되니 시골에서 농사일은 할지 몰랐지만 혼자 훌쩍 다시 부산으로 가실 형편이 못되었던 것 같다. 물론 부산에서 돈벌이가 잘 되었으면 번 돈 집으로 보내주면 되었을 텐데 그렇지 못하니 할 수 없이 시골에서의 생활이 시작된 게 아닌가 싶다. 허지만 시골에 전답하나 없는 형편, 내 기억으로는 문중에 속한 논밭을 몇 마지기 지어온걸 로 아는데 그것도 아버지께서는 농사일은 나 몰라라 하시니 농사는 어미니 몫이었다. 어렸지만 만만한 내가 어머니를 도와 잔일은 도맡아서 해야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집 식구들은 참 이상하게 시골에 살면서도 농사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던 것 같았다. 삼촌들이나 고모들도 농사는 별로 없었지만 바쁜 농사철이면 눈코 뜰 새 없다고들 하는데 달려들어 농사일을 하는 식구들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께서는 나중에는 저수지나 하천 같은 공사를 맡아하는 청구업자를 하셨지만 그때에도 농사일을 나몰라 였다. 한편 생각하면 주위사람들이 가만 놔두지도 안했던 같다. 모처럼 마음잡고 모내기라도 할라치면 꼭 동네에 무슨 일이 터져 아버지를 찾는 사람이 온다. 주위에 해결사라 할까? 가진 것은 없으면서 왜 그리 가정에는 무관심 하셨는지?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동생들 업어서 밭에 가서 일하시는 어머니 젓 먹이려 다녔던 일. , 밭일, 예를 들어 논에 퇴비 지어 나르는 지게질, 산에 가서 나무하는 일, 하다 못해서 밭에 인분까지 내가 맡아서 지어 나르는데 인분은 지어 나를 때는 똥 장군에 꽉 차야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꽉 채워서 지어 나르다 넘어져 인분을 온 몸에 뒤집어 쓴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나무를 하러 가도 그때는 산이 벌거벗어 깊은 산중으로 가지 않으면 나무를 해올 수 없었다. 족히 4km는 넘게 산을 타고 가야 조금이라도 나무를 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산에 가면서 아침에 가서 석양이나 되어서 한 짐 해오는데 도시락도 밥이 아닌 고구마로 대용을 하고 나면 지게질을 하고 올 때는 생목이 올라와 힘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서인지 여기 독일에 서 주말이면 산엘 가는데 나무가 산에 썩어서 널려 있는 것을 보면 아까운 생각이 들고 여기서 나무를 하면 금방 한 짐을 하겠네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 손발에 땀이 많이 난다. 지금 같으면 시골에서 지게질 하면서 든든한 작업화를 신을 수 있을텐데, 양말을 신지 않은 체로 검정고무신만 신고 지게질을 하니 발은 얼마나 미끄러운가? 신에 땀이 차서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가 미끄러워져 신이 찢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중에는 차라리 맨발로 지게질을 하고 다녔다.
생각하면 외아들인 내가 집에서 사랑받고 성장할만 했는데 그런 기억이라곤 하나도 없다. 요즈음 우리 주위에 할머니 할아버지 들은 손자자랑을 하면서 손자가 자식보다 훨씬 예쁘다는 둥, 손자 때문에 살맛이 난다는 둥의 소리들을 들어 보면서 난 정말 천덕꾸러기로 자랐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좁은 집에 많은 식구들이 살려니 비좁기도 했겠지만 내 기억으로는 할머니께서 추운 겨울에도 왜 너는 나가서 놀 줄도 모르냐?”는 소리만 하시며 귀찮아하시는 모습만 기억에 남아있다. 장남인 아버지가 미워서 손자까지 미웠는지 모르지만 할머니 사랑을 기억해 내려고 해도 그런 기억이 없다. 나만 옆에 있으면 아버지, 어머니 흉, 작은아버지 한분이 6.25때 군인으로 전사한 분이 있어서 할머니 앞으로 연금이 나오는데 그 돈도 모았다가 다른 자식들을 위해서 사용했지 아버지나 우리를 위해서 쓰지 않는다는 어머니 불만을 들은 적이 있다. 어머니한테는 얼마나 시집살이를 시켰는지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할머니한테 서러움 받았던 이야기를 참 많이 하셨다. 이웃에 다니시면서 어머니 흉보셨던 이야기, 하루는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집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나서 다가서서 들으니 할머니께서 어머니 빨리 죽게 해달라고 물을 떠놓고 비는 모습을 보고 비참해 하셨다는 말씀도 하셨다. 허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는 돌보는 사람 없어서 할머니 똥, 오줌 내가 다 받아냈다며 신세한탄을 하시곤 해다. 그렇다고 아버지한테는 사랑을 받았을까? 그렇지 않다. 아버지는 한데는 항상 무시당하는 삶이었다. 매일 술에 취해서 들어오시는 아버지가 하루라도 조용히 주무셨던 기억이 없다. 어머니한테 시비 걸어 이웃이 떠들썩하게 큰소리가 나고 손찌검을 해야 직성이 풀리곤 하셨다. 나도 아버지가 무서워 말 한마디 대꾸하지 못했다. 삼강오륜이니 명심보감에 무슨 구절이 있느니 귀가 아프도록 하셨고 자식은 무조건 부모를 공경해야 된다는 훈련(?)을 무수히 받아 그저 순종하는 것이 도리인 줄만 알았다. 우리는 무슨 맛있는 것 것이 있으면 자식들 먼저 먹이고 우리 먹는데 그땐 그렇지 안했다. 어른들이 먼저 드시고 남아야 우리차지가 된다. 기억으로는 어렸을 때 지금 미원도 따로 싸서 놔두었다가 시래깃국에 아버지 혼자만 조금 넣어 드시고 다시 싸 놓았던 기억이 있다.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 나름데로 노력은 하셨겠지만 말뿐이고 행함이 없었으니 무순 필요가 있겠는가? 여기 저기 해결사 노릇을 하셨으니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서울에 사시는 이모님이 몇 십 년 만에 우리 집을 찾아오실 때 주소도 모르고 아버지 성함 석자만 알고 곡성에 와서 아버지를 찾으니 잘 가르쳐 주어서 왔노라 는 이모님 말씀을 듣고 가정을 거느리지 못해도 주위에는 알려져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맨 날 집에는 안 계신 아버지, 저녁마다 주막에 가서 아버지 진지 잡수세요.” 라고 해도 듣는 중 마는 둥 하시면서 투전판과 술타령하신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으나 그때는 그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던 것이 참 다행이다 하는 생각이 든다. 만일 불만스러워 내 인생이 삐뚤어 졌으면 어떻겠는 가하는 생각을 하면서.
양식이 없어서 굶은 적은 한두 번이 아니니 이야기 하지 말자. 손님 오면 주막에 가서 술사오라는 심부름은 괜찮은데 외상으로 사오라고 하는 통에 주인한테 아버지 대신 내가 당한일도 한두 번이 아니니 이야기 하지 말자. 아침에 일어나기도 전에 빚쟁이들이 달려와 아버지 욕을 하면서 돈 내놔라 고함을 지를 때 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자랐을까? 법원에서 차압이 나와 집에서 살림살이에 차압을 부칠 때 난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시골 살림살이가 있으면 무엇이 있기에 차압 딱지를 붙였을까? 집에 오래전부터 내려온 돌로 만든 절구통이 집에 하나 있었는데 그것까지 차압을 부쳐서 가져가는 것을 보고 내 삶의 목적은 오직 빨리 돈 벌어 우리집 잘 살게 하는 것이었다. 중학교 다닐 때는 4km를 왕복했어야 되었는데 버스도 타지 못하고 매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학생복 외에 거칠 것 하나 없이 걸어서 다녔던 기억. 삼촌들이 군대에서 휴가를 마오면 삼촌 군화를 빌려 신고 학교를 갈 때는 눈밭에서 얼마나 좋았던지. 내가 키운 염소 한 마리가 있었는데 풀을 먹이기 위해 학교가면서 메어 놨다가 돌아오면서 데리고 오는데 하루는 염소가 도망가서 목에 멘 줄을 발도 밟았다. 염소는 계속 도망가고 나중에 팽창해졌던 염소고무줄을 놓치는 바람에 염소를 메어 놓기 위해 땅에다 고정을 시키는 쇠말뚝이 내 다리에 그대로 꽂힌 사고 후에 다리에 염증이 생겼는데도 약하나 사서 발라 줄줄 모르고 어머니 젓을 짜서 화롯불에 달여서 붙이고도 결석하면 안 되는 줄 알고 지팡이를 짚고 4km 이를 악물고 걸어다녀도 몰라라 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 지금 생각하면 파상풍에 걸리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음을 참 감사할 뿐이다. 하루는 우리 집에서 키우는 재동이(개 이름인데 우리 집 개 이름은 무조건 재동이었다)가 집을 나가 며칠 안돌아왔는데 내가 학교 가는 길 중간쯤 에서 우리 집 개를 발견하고 다시 집으로 개를 데리고 돌아왔으니 학교 지각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 아버지께 오늘 학교가 늦었으니 자전거를 좀 타고 가겠다고 해도 거절하신 아버지였다. <다음계속>
추천0

댓글목록

초롱님의 댓글

초롱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소중한 기억을 나눠주셔서 고맙습니다. 허심탄회하게 쓰신, 가슴 아픈 개인사를 읽으면서 저희는 세상을 배우고 있습니다. 다음 글도 고대하겠습니다. <br />

파독50년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21 김재승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718 03-09
20 김재승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576 02-16
19 김재승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412 02-03
18 김재승칼럼 자유로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666 01-14
17 김재승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691 12-27
16 김재승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750 12-11
15 김재승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388 11-27
14 김재승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593 11-13
13 김재승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709 10-30
12 김재승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365 10-11
11 김재승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307 09-27
10 김재승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298 09-10
9 김재승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453 08-24
8 김재승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222 08-07
7 김재승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324 07-22
6 김재승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320 07-14
5 김재승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557 06-11
4 김재승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441 05-24
3 김재승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189 05-08
열람중 김재승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407 04-17
게시물 검색
이용약관 | 운영진 | 주요게시판사용규칙 | 등업방법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무단수집거부 | 비밀번호분실/재발급 | 입금계좌/통보방법 | 관리자문의
독일 한글 미디어 베를린리포트 - 서로 나누고 돕는 유럽 코리안 온라인 커뮤니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