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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은 파독광부가 독일땅에 온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63년 파독광부 1진이 독일에 도착하면서 재독동포사회가 시작되었고, 전세계 동포사회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독광부분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셨지만 정작 개인적으로는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고생도 많으셨을 겁니다.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어찌 몇마디 필설로 다하겠습니까만 파독광부분들중에 몇분이 독일땅에 와서 겪은 체험을 여기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파독광부의 삶은 그 자체가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러니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어렵게 글을 써가실 때, 서투른 점이 있더라도 많은 성원 바랍니다. 

김재승칼럼 어머님 죄송합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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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6,871회 작성일 13-04-07 09:27

본문

 
 
 
어머님 죄송합니다.
                                                         김재승
 
 
아침 일찍 눈이 떠진다. 시계를 보니 5시 반,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아내가 깰까 봐 누어서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소피도 보고 싶고 “어차피 잠도 못 자는데 누어있는 이 시간 아까워” 라는 생각에 살며시 일어나 응접실로 나온다.
인터넷 전화가 울린다. 2년 전 한국에 가서 고국의 식구들이 나한테 전화한번 하려고 해도 전화비가 부담이 가기 때문에 잘 못하는 것을 알고 국내 시내전화비만 내면 외국에서도 잘 사용할 수 있는 인터넷 전화를 하나 가져다 연결해서 잘 사용하고 있는 터다.
전화기를 들자
"오빠! 어떻게 해요? 연락 안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이번에는 알려야 될 것 같아서 연락해요."울먹이는 다섯째 여동생 미희의 목소리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가슴이 털커덕 내려앉는다.
여기서 살면서 또 요즈음 자꾸 몸이 불편해 하시는 어머님을 보면서 마음이 불안해 있었던 터다.
"무슨 일인데?"
“어머님이 위독해서 입원을 시켰는데 아무래도 위독해요. 어떻게 해야 돼?”
다섯째는 외아들인 내가 이곳에서 살자 어머님을 모시고 사는 동생이다.
어머님은 원래 나의 고향인 시골에서 혼자 생활하고 계셨다. 살림에는 나물라라 하시는 아버님 덕분에? 집한 칸, 전답 한 뙈기 없이 사시다가 내가 월남 다녀와 사드린 집과 여기 독일 와서 사들인 전답 몇 뙈기를 소일거리로 지으시며 살고 계셨다. 벌써 35년 전 아버지 돌아가시고 동생을 다 시집보내고 혼자 살고 계시는데 동생중 하나가 시골에 와서 어머님 모시고 살겠다고 연락이 와서 어머님 혼자 사시는 것 보다 얼마나 어머님이 얼마나 좋아 하실까 하는 생각에 다행이다 싶었는데, 그동안 어머님과 같이 살면서 집, 전 답할 것 없이 모두 저당 잡히고 농협 돈과 사채들을 얻어 썼다가 갚지를 못하자 우리 집과 전답을 물론 친척들까지 피해를 입히면서 빛 잔치를 해버렸다. 시골에서 계실 곳이 없으니 고향에서 쫓겨나다 시피 해서 지금 안산 동생 집에서 기거하고 계시는 것이다. 빚 때문에 집이 날아가고 한참 시끄러울 때 내가 중국에서 졸업하면서 아들도리 하겠다고 여행도 좀 시켜드릴 겸 어머님을 잠깐 다녀가시라고 했는데, 그때 말씀이 시골에서 이렇게 남부끄럽게 쫓겨날 수가 없으니 그 집만 다시 사주면 시골에서 혼자 사시고 싶다고 간절히 원하셔서 독일로 돌아와 은행에 융자를 얻어  그 집을 다시 사 드렸지만 몇 개월 그 집에서 사시지도 못하고 다른 빚 때문에 그 집을 다시 날려 버리고 지금의 안산 동생 집으로 가신 것이다. 그 때는 동생 집에 아이들도 어리고 두 부부가 직장생활을 하니 아이도 봐주고 살림도 좀 도울 겸 그곳에서 살고 계셨던 것이다.  난 지금도 한국에 한 번씩 다니러가도 시골에 있는 조상들 산소를 찾아 뵐 때면 내 자신이 부끄러워 동네 앞으로 가질 못하고 돌아가는 다는 길로 산소만 찾아뵙고 돌아오곤 하는 실정이었다. 외국생활을 몇 십 년하고 있으면서 어머님 기기할 집하나 장만해 드리지 못한 셈이 되고 만 것이다.
  
“알았으니까 내가 다시 전화할게” 하면서 전화를 끓었다. 
소란스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눈치가 이상했던지 아내도 응접실로 나왔다.
 
"누구 전화예요?"
 
“미희가 전화했는데 어머님이 위독하시데.”
 
말을 못하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아내를 보면서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능력 없는 사람한테 시집와서 결혼한 뒤 한 달 만에 시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빚만 남겨놓고 또 여섯이나 되는 시누이들과 어머님의 뒤치다꺼리를 군 말없이 해온 사람이다. 시집식구들과 정이 들었으면 얼마나 들었겠는가? 내 성격 탓에 자상하고 따뜻한 말 한번 해주지 못한 나를 믿고 살아온 사람이다. 시집식구들이라면 지겨울 텐데 그래도 시어머니와 정이 들었나 보다.
 
“한국에 얼른 가봐야 하지 않겠어요?”
 
“글쎄, 좀 지켜보지 뭐. 여기일이 있는데 무조건 갈 수도 없고 우선 오늘 복흠에는 가서 환자들 봐야 되니까 일단 다녀와서 결정하자고.”
 
중국 가서 중의대학을 졸업하고도  이곳 독일에서는 한의사, 중의사  제도가 없는 관계로 여기서 다시 3년을 공부를 해서 Heilpraktiker 자격증을 따서 복흠과 이곳 프랑크푸르트 오가며 한의원을 운영한지가 10년이 넘었다. 급한 일이 있어도 예약된 환자들이 있어서 훌쩍 떠날 수 없는 일이다. 우선 위층으로 달려갔다. 마침 아시아나에서 근무하는 젊은 부부가 위층에서 살고 있어 항공 표를 물어볼 심산이다.
 
“송 차장 아침부터 미안한데 갑자기 한국을 좀 다녀와야 될 것 같아, 항공표가 가능할까?”
 
“요즈음 성수기라 급하게는 힘들 텐데 출근해서 알아보고 핸드폰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한데 무슨 일로.”
 
“아, 어머님이 위독하시나봐.”
 
“아, 예 가능하도록 알아보겠습니다.”
 
2년 전부터 아시아나에서 이곳 프랑크푸르트로 파견 나와 아내와 여자아이 둘과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아시아나 송 차장이다.
 
아내와 커피한잔 마시면서 한국 여기저기 동생들한테 연락을 해본다. 다들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광주, 곡성, 장흥, 인천, 서울 등에서 살고 있는 여동생들이 하는 일들 접어놓고 어머님이 누워계신 안산으로 모아들도 있는 모양이다.
우선 복흠으로 출발을 했다. 어차피 한국으로 빨리 출발한다고 해도 오늘 출발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또 무슨 일이 있어도 예약된 환자들한테 연락도 안하고 무조건 한국으로 출발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핸드폰이 울린다.
 
“ 원장님 전데요, 항공 좌석을 알아보니까 오늘이나 주말에는 좌석이 없고 월요일에 가셨다가 20일에 오시는 좌석 예약은 가능한테 어떻게 할까요?”
 
나 자신도 언제 출발을 해야 되는지 아직 확실히 결정을 하지 못했다. 다음 주 프랑크푸르트 예약된 환자들 때문에 최소한 월요일과 화요일이라도 한의원 문을 열었으면 좋겠는데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언제 가게 해 달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복흠 가서 한국으로 전화를 해보고 상황을 봐서 다시 연락하도록 할께. 그리고 항공 표는 어떤 종류가 있고 가격은 어떻게 되지?”
 
“아, 예 가격을 확인해 보니까 오픈티켓으로 사면 1,450 유로 이고 싼 표, 다시 말해서 출발하는 날짜와 귀국하는 날짜를 확실히 예약을 하면 800 유로 정도 될 것 같아요.”
 
“그럼 오픈으로 사면 이번 주말에는 출발할 수가 있는 표인가?”
 
“아니요, 오픈으로 사셔도 이번 주말에는 어차피 좌석이 없어요.”
“그럼 오픈티켓이라고 지금 상황에서는 특별한 이점이 없겠네.”
 
“예, 그런 셈입니다.”
 
“고마워! 내가 다시 연락할게.”
 
복흠에 도착해서 한국으로 전화를 해본다. 광주와 곡성 그리고 장흥 사는 동생은 지금 안산으로 오고 있는 중이고 인천, 서울 동생들은 안산으로 와 있단다. 어머님은 급성폐렴으로 입원하셨는데 지금 중환자실에 계시면서 인공호흡을 하고 계신단다.
아, 이제는 정말 이대로 가시는 모양이구나.  일손이 제대로 잡히질 않는다. 환자들한테는 다음 주는 내가 한국을 가야될 것 같으니 2주후에 예약들을 하게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복흠까지는 거리가 꽤 먼 거리다. 250km나 되는 거리인데 벌써 9년 동안금요일 하루 복흠에 와서 환자들을 본다. 그 쪽에서 사는 환자들이 나를 놓아주지를 않는다. 처음에는 복흠에서 한의원을 개원하고 운영하다가 이곳 프랑크푸르트에, 지금은 한국으로 귀국했지만 처형이 살면서 아무래도 이곳은 큰 도시고 한국에서 파견된 주재원들도 많고 금융도시라 복흠보다는 환자들이 많을 터이니 이곳으로 내려와 한의원을 하라고 권하고 또 몇 지인들도 권해서 내려와 이곳에서 한의원을 차린 지가 9년이 되었다.
처음에는 우선 1-2년 왔다가다 하다가 복흠은 문을 닫을 계획이었는데 오히려 환자들이 더 많아지고 혹시 우리가 그만 온다고 할까봐 걱정하는 환자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9년 동안을 이렇게 오가면 진료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오는 소리가 나자 위층 식구들이 내려온다. 내일을 출발해야 될까보다. 라고 말을 하자  한마디 귀띔을 해준다.
“이렇게 해보십시오. 내일 오픈티켓이 아닌 월요일 출발해서 20일 수요일에 오는 티켓을 구입해서 무조건 공항으로 나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스탠바이로 기다리고 있으면서 자리가 나면 출발하도록 하세요. 예약을 해놓고 못타는 사람들이 있어서 가능하거든요.”
 
“티켓이 월요일 표인데 가능할까?”
 
“예, 가능해요, 자리만 있으면 한사람 50 유로씩만 수수료를 내면 교환가능해요. 저도 내일 공항에 연락해 놓겠습니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내일 날이 밝으면 사무실에 나가 밀린 서류정리 좀 해놓고 연락할 수 있는 환자들 한데는 연락을 하고 내일 출발을 하기로 아내와 의견을 모았다.
한국으로 전화를 해 보려다가 지금 여기가 저녁 9시, 한국이 7시간 빨리 가니까 새벽 4시, 어중간한 시간이어서 저녁을 우선 먹었다.
인터넷 전화가 또 울린다.
 
“오빠, 엄마가 돌아가실 모양이야, 의식이 없어지고 혈압 약을 아무리 써도 혈압이 올라가지 않는데, 어떻게 해야 돼, 오빠!”
서울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몇 개월 전 광주로 이사를 간 첫째 동생이다.  정말 어떻게 해야 옳은 건 줄을 모르겠다. 금방 달려갈 수만 있다면 이렇게 애만 태우지는 안할 텐데.
혈압이 그렇게 내려가면 정말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저녁 11시 한국시간 아침 6시에 다시 한 번 전화를 해보고 인터넷 전화를 머리맡에 가져다 놓고 잠을 청했다.
 
“지훈 아빠, 어떻게든 내일은 한국으로 출발을 해요. 나는 상황 봐서 수요일 쯤 아이들 데리고 뒤따라 갈 테니까.” 아내의 말이다.
 
“글쎄 가기는 해야 될 것 같은데 좌석도 없다고 하고 아무튼 내일 아침에 서둘러 보자고. 그리고 아이들까지 어떻게 같이 오려고 해? 갑자기 가능할까?”
 
“그래도 어떻게든 같이 가야지. 정훈 이는 한국에 다녀온 지가 10년이 넘어서 맨 날 이러다가 할머니 못보고 돌아가실까 싶어서 염려했었는데 같이 가야 되지 않겠어.”
 
여기서 결혼해서 아이들 둘을 낳았는데 큰 아이는 금년 5월에 생일이 지났으니까 벌써 32살이다. 음악학(음악이론)과 철학 공부를 마치고 베를린 잡지사에 기자로 일을 하고 있다. 2년 전에 우리가 한국에 갈대 여자 친구와 같이 가서 할머니를 보고 한국에서 바로 일본으로 가서 회사일 을 보고 돌아온 적이 있어서 할머니를 보았는데 작은아이 정훈 이는 금년에 30살로 학교공부가 좀 늦어서 지금 인턴중이다. 여기서 Abitur(대학입학자격)를 마치고 진로 상의하면서 내가
“정훈 이는 차라리 Plot 한번 해보는 게 어때?” 말 한 것에 영향을 받아 대학 입학 전에 1년 동안  Pilot 시험을 위한 준비를 해서 시험을 본적이 있다.
그땐 우리도 합격 할 줄만 알았다. 처음 1.2차 필기시험을 통해 합격한 사람들을 따로 Hamburg 어느 호텔로 모아놓고 1주일 동안 매일 시험을 보면서 낙오자는 집으로 보내는 생각하면 조금 잔인한 시험방식이었다. 요즈음 TV에서 하는'Deutschland sucht Superstar‘ 같은 방법이다.  마지막 날 6명이 남아있을 때까지 버티고 있어서 이제는 가능하겠구나, 하고 희망을 걸었었는데 그날 3명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냈단다. 결국 3명을 합격시키는데 300명이상 모였다니 100대 1일 된 셈이다. Pilot 학교가 2종류가 있는데 한군데는 사립학교로 본인이 학비를 내면서 공부를 한 후에 취직자리를 찾는 곳이고 한곳은 루프트한자에서 직접 뽑는데 학교 다니면서도 오히려 생활비를 받고 공부를 한 후에 졸업하면 바로 루프트한자 취직이 되는 학교가 있다. 아이는 루프트한자에서 치루는 시험에 응시를 했는데 한번 떨어지면 다시 응시할 수도 없는 시험이다. 그 녀석 맥 빠진 모습을 보고 ‘내가 괜히 그런 말을 해 가지고. “ 하는 생각과 함께 아이한테 참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해 기계과를 선택해서 입학을 한 후 2년을 다니더니 도저히 자기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다시 법학으로 바꾸어 복흠으로 학교를 옮기어 학교를 마치고 작년에 1차 사법고시를 합격하고 금년 1월부터 복흠고등법원에서 연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관계로 또 방학 때마다 이런 저런 시험 때문에 한국을 가본지가 10년이 훨씬 넘었던 것이다. 
할머니 때문에 한국에 다녀온 것은 좋은데 그일 때문에 제 진로에 나쁜 영향을 끼치면 안 된다는 나의 생각인데 아내는 가족끼리 해야 되는 도리, 또 무슨 행사나 인사를 챙기는 것은 철저히 하는 사람이라 아이들도 꼭 같이 가야된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이튿날 아침 6시가 조금 안되었을까,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를 들자 방안에서 많은 사람이 우는 울음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린다. 돌아가셨구나, 생각하고 말을 못하고 있는데 어머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첫째의 전화다.
아들 보고 싶어서 내가 갈 때까지는 살아계실 줄 알았는데, 아들을 얼마나 원망하셨을까?
평생 아들하고 한번 같이 살아보았으면 하는 소원을 이루지 못하시고 돌아가신 것이다.
내가 17살 때 집을 나와 지금까지 객지로만 돌아다녔으니 더군다나 오가기도 힘든 이곳 독일에서 생활한지가 37년이 되었으니 아들하나 있는 것이 객지로만 쏘다녀도 당신이 여태껏 부모님도리를 충분히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내 눈치만 보고 사신 어머님이었다.
어떻게든지 오늘 한국으로 출발해야 되겠다고 아내와 이야기 하고 7시까지 기다렸다가 한국여행사에 연락을 했다. 사정을 이야기 하고 월요일에 출발해서 돌아오는 걸로 표 2장을 부탁하고 사무실로 나와 다음 주 예약된 환자 중 연락처가 있는 환자들에게 연락을 하고 연락이 되지 않는 환자들을 위해서 할 수 없이 입구에 갑자기 문을 닫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써 붙이고 우선 꼭 필요한 서류만 정리를 했다. 연락이 되지 않는 사람들 중에 베를린에서 온다고 한 사람도 있었는데 어떻게 연락할 방법이 없다. 집으로 돌아오니 항공 표는 월요일에 출발하는 걸로 준비가 되었으며 조금 후에 공항까지 같이 가겠다며 여행사를 한 교회 김 집사님께서 굳이 온단다. 여러 가지로 고마운 사람들이다. 대강 준비를 하고 있으니 김 집사님이 집으로 오셨다.
공항에 도착해서 사정을 이야기를 하니
“벌써 송 차장님이 연락을 해서 알고 있습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기다려 보십시오. 안 되는 날도 있지만 오늘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수속을 마치고 출국장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여러 가지로 내가 도움을 많이 받고 사는 세계여행사 황사장님이 한국에서 온 여행자들을 안내를 하려고 공항에 나와 있다. 무슨 일이냐며 반가워한다. 황사장님의 같이 슬퍼하는 모습을 뒤로 하고 출국장으로 가서 기다리니 탑승을 시작한다는 방송이 나온다. 한참을 기다리자
 
“죄송합니다. 자리는 있는데 같이 앉아가실 자리를 마련하지 못해드려 죄송합니다.” 친절한 안내원의 말이다. 같이 앉아 가는 것이 문제인가 어떻게든 가기만 하면 되지. 탑승을 마치고 비행기가 출발을 하자 피로가 몰려와서 눈을 감았다.
 
생각하면 나도 참 이야기 거리가 많은 인생을 살아왔다.
참 가난하기만 했던 가정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인생이다. 노력했던 만큼 표가 나지 않는 인생이었지만 나름대로 노력은 하면서 살아왔노라고 자부했었는데 결국은 외아들인 내가 부모님을 모시기는커녕 이국에서 생활하면서 부모님 두 분이 운명하시는 것조차 지켜드리지 못한 불효자가 되고 만 것이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답이 없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려왔지 운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처신을 잘못했었을까? 노력한 만큼 얻어진다는데 난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을 수없이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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