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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은 파독광부가 독일땅에 온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63년 파독광부 1진이 독일에 도착하면서 재독동포사회가 시작되었고, 전세계 동포사회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독광부분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셨지만 정작 개인적으로는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고생도 많으셨을 겁니다.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어찌 몇마디 필설로 다하겠습니까만 파독광부분들중에 몇분이 독일땅에 와서 겪은 체험을 여기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파독광부의 삶은 그 자체가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러니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어렵게 글을 써가실 때, 서투른 점이 있더라도 많은 성원 바랍니다. 

최정규칼럼 아빠의 이야기(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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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8,182회 작성일 13-03-28 11:05

본문

독일서 만난 두 사람, 전태일과 한 여인 

3개월 지상 교육이 끝나고 지하 교육이 시작되었다. 지상과는 달리 가스마스크와 차(茶) 병(광산에서 무료로 공급하는 2가지 차가 있었다), 작업마스크, 무릎대기 등을 착용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schacht)를 처음 타고 내려가는데 귀가 막혔다, 뚫렸다 했다. 
1,100미터쯤 내려가니 커다란 갱도가 있었다. 마치 지금의 지하철역 같은 거다. 그곳에서 작은지하철 같은 탄차로 갈아타고 각자 작업장으로 가는 거다. 시간은 50분 정도 걸렸다. 아빠가 처음 시작한 지하 교육은 탄을 운반하는 항로를 만들기 위해 굴을 파는 작업이었다. 
열심히 구멍을 뚫고, 폭발물을 넣고, 폭파한 다음에 쇠 동발(쇠로 만든 작은 버팀기둥) 4개를 연결하여 세우는 작업이었다. 작업자가 동발을 가져오라고 손짓을 해서, 우리는 네 명이 가서 힘을 쏟으며 들고 왔다. 그것을 보고 그 작업자는 한참을 웃더라. 
모나코에서 왔다는 아빠 나이 정도 되는 사람은 그 동발을 혼자서 어깨에 메고 오는데 우린 네 명이나 가서 들고 오면서도 힘이 들어 했으니 우스웠던 거다. 물론 나중에는 아빠도 혼자서 메고서 일을 했지만 말이다. 

apa08-01.jpg
                                    ▲당시 파독 광부들 모습.

지상과 지하교육 6개월이 끝나자 우리들에게 작업장 선택을 하라고 했다. 먼저 온 형들의 이야기가 돈을 벌려면 채탄작업을 해야 한다고 알려줬다. 난 머슴살이 하는 고향의 형 돈을 갖고 독일로 머슴을 살려고 왔다. 그래서 당연히 채탄 작업을 신청했고, 탄을 캐는 막장에 떨어졌다. 
막장은 몹시 더웠다. 40도나 되어서 팬티 하나 말고는 다른 옷을 걸칠 수가 없었다. 탄가루를 막는 마스크도 땀이 차서 쓸 수 없었다. 광산에서 제공하는 음료수 차를 자그만 치 5리터를 넣어서 들고 다녀야 하고, 지하 1,100미터에서 탄을 캐는 막장이었지만 가난을 뛰어넘자고 머슴살이 하는 형이 생각나 정말 열심히, 열심히 독일 머슴살이를 했다. 
광산 이야기를 동영상으로 잠깐 보자. 이 동영상은 KBS가 파독 광부 이야기를 취재하기 위해 독일에 왔을 때 아빠가 너도 아는 복흠광산박물관 채탄막장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설명하는 내용과 한 한인광부의 이야기가 포함돼 있다.



나는 교회도 형들을 따라서 열심히 다녔다. 한번은 목사님이 우리 기숙사를 방문하여 예배를 보았는데, 그 목사님은 "내가 이 동네 살아요. 시간들 나면 와서 한국 신문이나, 월간지, 그리고 책들을 봐요. 아예 서재를 열어 놓겠습니다."고 말했다. 
나는 주말에 길을 물어물어 그 목사님 집을 찾아갔다. 정말로 문이 열려 있었다. 그 집의 커다란 서재에는 책들이 가득했다. 독일어도 못하는 나에게 그야말로 볼거리가 생긴 거다. 누릿한 16절지로 복사된 문건이 있어서 보니 누군가 쓴 글을 복사한 거였다. 나는 마치 친구한테 온 편지 같다는 기분으로 그 문건을 읽었는데 내용이 일기였다. 복사본 첫 장에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전태일 친필 일기장이었다. 그 당시에는 친필 일기장은 조금만 보다가 그만두고, <동아일보> 신문을 보고 왔다. 이렇게 전태일 동지를 스치듯 만났단다.
나는 그 이후부터 시간만 되면 목사님 댁의 서재를 찾았다.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만들었다는 『대화』라는 잡지, 수도권 특수선교회에서 발간한 자료, 도시산업선교회에서 발간한 자료들이 많았던거 같았다. 나는 주로 신문이나 주간, 월간지 등이 손에 잡혔다. 솔직히 그때는 전태일도, 도시산업선교회도 잘 몰랐단다.  
이런 나를 한방에 사는 형님이 "너만 망치는 게 아니라 고향의 느그 형님과 동생들의 신세까지 조진다."고 말한 것을 들은 것도 있고 해서 서서히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천사의 선택을 받다 
그 무렵 아는 형님이 주말여행을 한번 조직하자고 제안을 해왔다. 베를린 주말여행을 추진하는데 나보고 동기생들을 모으라는 것이었다. 이익은 반반으로 하기 로 했다. 나는 그 형이 가르쳐준 대로 "이번 베를린 주말여행에 한국 간호원이 엄청 많이 탄다."고 말하면서 총각 광부들을 꼬셨다. 광부들은 3년 계약이라서 계약기간이 끝나면 다시 한국으로 가야 하는데 간호사들은 독일의 인력부족으로 체류 연장이 가능했다. 광부들이 간호사들과 결혼을 하면 체류 기간 연장이 가능했다. 헌데 광부는 미혼이 20%인 반면 간호원은 미혼이 80%였다. 이런 상황에서 주말여행은 자연스레 처녀 총각들의 '만남의 광장'이 됐다. 
50명 타는 버스에 광부와 간호사들을 가득 태우고 가는 베를린 주말여행이 시작되었다. 그 버스에 너희 엄마도 고향 언니들과 함께 탔던 거다. 나는 그 버스에서 너희 엄마를 처음 만났다. 네 엄마는 그때 청바지 천으로 된 원피스를 입었던 거 같다. 네 엄마의 고향 언니는 나를 자주 불러서 "미스터 최! 내 동생 어때? 동생은 맘에 있다는데!"하시면서, 농담을 해서 나는 "그럴 리가요?"라며 믿지를 않았다. 총각 광부라면 다들 결혼을 생각했지만 아빠는 아예 생각을 안했다. 고졸이거나 대학을 나와서 간호사가 된 사람들이 나같이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도 졸업 못한 사람과 결혼하겠냐는 생각 때문에 '먹지 못할 떡'에 대한 헛된 꿈을 갖지 않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나한테 중매를 해주겠다는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이런 사실을 솔직하게 얘기해 주면 모두가 "그래?"하면서 이야기를 끝내는 경험을 나는 많이 했다. 하지만 "나도 혹시 간호사와 결혼할 수 있을까?" 하는 꿈을 꾸기는 했다. 
여행을 추진하기 전부터 나는 기숙사를 나와 그 김제 형님들과 함께 방을 얻어서 살게 되었다. 그곳의 기숙사는 건물도 현대식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숙박비용 등 기숙사비가 임금의 40%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나와서 살아보니 우선 방세가 싸고, 음식도 우리 식으로 해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다 보니 우리처럼 광산 주변에 따로 방을 얻어 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나는 거기서 쌀장사를 시작했다. 내가 사는 건물에만 해도 한국 사람들이 40여 명이 되었다. 그러다가 나는 아예 카라반 자동차를 사서 광산일을 마치고 한국 식료품 장사를 하러 다녔다. 

병가를 끊어도 월급을 준다 
독일생활 1년이 넘어갈 때까지 나는 병가 한 번 안 내고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코로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지하 1,100미터에서 일하는데 안 되겠다 싶어서 처음으로 의사를 찾아갔다. 그 의사는 나를 진찰한 후 약간 마취를 하고서는 코 어디론가 주사 바늘을 쑤셔 넣고 압축하니 입으로 커다란 고름덩어리가 나왔다. 
치료가 끝나서 나오려 하는데 그 의사가 병가를 끊어 주면서 "1주일 정도 쉰 후에 일을 하라"고 했다. 하지만 아빠는 "일할 수 있다"고 말하고는 그대로 광산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낮 근무에 들어갔다. 나는 막장의 탄을 깎아내는 기계가 돌아가기 전에 양옆을 미리 파는 작업일을 했다. 
그런데 그만 코가 터져서 코피가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흘렀다. 나는 할 수 없이 다시 그 의사에게 갔다. 그는 "지하의 압박이 있기 때문에 병가를 끓어줬는데..." 하면서 다시 병가 서류를 끊어줬다. 이 이야기를 듣고 함께 사는 형님들이 "너같이 공휴일 작업까지 열나게 일한 사람은 병가를 내도 월급이 많으니 걱정 말고 쉬라"고 말을 해줬다. 
"세상에 일하지 않았는데 월급이 더 많이 나오는 나라가 어디 있어요?" 
"맞는지 틀리는지 한 달 쉬고 봐. 그러면 알 것잉게." 
그 형들의 말을 확인하고자 의사한테 가서 병가 진단서를 끊어서 한 달 쉬다가 월급을 받았는데 정말 많았다. 3개월 평균을 내서 월급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병가로 일도 안 했는데 월급이 많다니 이 나라 도대체 어떻게 생긴거야? 그때부터 나는 독일이라는 나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참 그랬다. 내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7시간 일하면 한 달에 쌀 일곱 가마를 벌었다. 그런데 우리 형님은 1년 머슴살이 해서 받는 게 쌀 열 가마였다. 세상에 나라가 좀 다르다고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비록 아파서 일을 안했다고 해도 어떻게 일한 사람과 같거나 더 많은 월급이 가능한가?', '한국에서는 애를 낳지 말라고 난리인데 이놈의 나라에서 자녀 수당도 주고 많이 낳으면 더 주지 않는가?' 이런 생각들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할머니께서 늘 내게 해주시던 "복이 없어서 그렁게 열심히 살다보면 복 받을 것이여."라는 말씀을 믿지 않았다. 만일 열심히 일하셨던 너희 할아버지가 독일에서 태어나셨다면 농약 먹고 죽었겠냐? 복이 아니라 세상이 잘못되어서 그렇게 되는 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동안 겁을 먹고 자주 가는 거를 피했던 목사님 서재에 들락거리고, 교회도 다녔다. 
베를린 주말여행 후 나는 그때 알게 된 간호원들의 병원 기숙사를 돌아다니며 식품 장사를 했다. 어느 날 엄마가 근무하는 병원으로 찾아가서 식품을 팔고 나오려는데 나를 불렀다. "미스터 최! 저 복흠(Bochum)으로 병원을 옮기는데 좀 도와 줄 수 있어요?"라고 물었다. 나는 기꺼이 "예" 했다. 그리고 복흠으로 이삿짐을 싣고 가서 내려놓고 또 실으러 오는데 네 엄마가 항상 "직진"이라고 해서 그렇게 달렸는데, 빙빙 돌아서 다시 제자리로 오기를 몇 번이나 했다. 아빠는 뒤스부르크 지역 이외서는 운전을 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엄마가 안내하는 대로 가는데 그렇게 되는 것이다. 한참 돌다가 나는 "미스 신, 나허고 함께 있고 싶은가 본디, 그냥 솔직히 말 허면 되지 뭐 노상 직진, 직진해요."라고 말을 했다. 네 엄마는 "아닌데, 이게 맞는데."라고 대답했고, 우리는 헤매면서 이사를 끝냈다. 헤어질 때 나는 "미스 신, 보고 싶으면 가끔 오겠습니다."라고 했더니 "그래요." 했다. 아빠는 그날부터 엄마 얼굴이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 꼴이 이러니 네 엄마에게 다가 가기에 자신이 없었단다. 그래도 한번 마음이 가니 어쩔 수가 없었다. 시간만 되면 전화를 했다. 병원 기숙사에는 전화기가 복도에 하나밖에 없어서 누가 받아서 전해줘야 연결이 되었단다. 
어쩌다 연결되면 "잘 지내십니까? 오늘 밤에 달을 보고 한 잔했더니 유난히도 생각나서 전화했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한번 놀러오세요." 해서 찾아가면 이미 다른 사람들이 빨간 장미꽃을 사들고와 있거나 왔다간 흔적들이 있어서 내 힘이 더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네 엄마 기숙사에 찾아가니 나와 함께 베를린 여행 추진했던 형이 있었다. 우리 셋은 맥주집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형이 "정규야! 넌 젊으니까 미스 신은 나한테 양보하고 가라!" 해서 내가 일어서 나가려는데 "내가 당신들의 짐짝이야! 정말 웃기네." 하더니 엄마가 내 손을 잡으면서 "미스 터 최, 집으로 가요." 하는 것 아니냐. 
내 눈에 그때 네 엄마는 천사로 보였다. 
그 후 나는 일터도 복흠 근처 에린 광산으로 옮겼고, 복흠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아마도 1975년 늦가을이었던 거 같다. 엄마와 아빠가 처음 살림을 차린 곳이 병원 옆 하팅거쓰트라세 87번지(Hattingerstr. 87) 한 건물의 4층이었다. 독일 노인 부부와 같이 사는 곳이었다. 

약혼과 결혼  
76년도 봄에 몇몇 아는 분들이 참석한 가운데 집에서 반지를 주고받으며 약혼식을 올리고, 결혼을 준비하는데 문제가 생겼다. 실은 그때 아빠는 호적상에는 이미 쌍둥이 아빠로 돼 있었다.
한국에서 광부 시험 합격 후 브로커들을 통해서 총각으로 가는 거보다는 기혼으로 가면 5급 공무원 5년치 봉급을 모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소문은 독일 세금 제도에 따라 미혼과 기혼, 아이 수에 따라 세금 액수가 달라지는 것을 말한 것이다. 
아빠도 독일에 도착하고 나서야 결혼을 하고, (갑호, 을호라는 이름의) 쌍둥이 아빠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도 한국 호적에는 있다. 후일 큰 아빠가 사망한 거로 처리했단다. 그러니 엄마와 결혼을 하려면 이혼을 해야 하는데 당사자 부모들이 안 해준다는 거다. 
쌀 몇 가마 빌려서 주고 혼인신고를 했는데, 이혼하자니까 또 쌀 몇 가마를 요구한다는 거였다. 그 여자는 결혼해서 사는 데 말이다. 그때는 시골에서 결혼하고 혼인 신고하는 집이 흔하지 않았다. 물론 출생 신고도 학교 들어갈 때에 하는 경우가 많았단다. 
부안과 영월은 멀기도 했고, 너희 외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안 계셨기에 나의 신분에 크게 관심이 없어서 큰아빠가 너희 외갓집에 연락하여 혼인신고를 하고 그 서류를 보내줘서 엄마와 아빠는 결혼준비를 시작했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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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elie님의 댓글

Noelie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div>예전에는 정말 혼인신고,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div>
<div><br />저는 예전에 아는 분 생신파티에 초대받아 갔는데 그 분 연세가 실제로는 여권에 써 있는 것 보다 세살이 많다고 하시더군요. 성인이 되어 출생신고를 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설명해 주셨답니다. </div>
<div>&nbsp;</div>
<div>직접 육성으로 듣는 것 같은 이야기</div>
<div>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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