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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은 파독광부가 독일땅에 온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63년 파독광부 1진이 독일에 도착하면서 재독동포사회가 시작되었고, 전세계 동포사회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독광부분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셨지만 정작 개인적으로는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고생도 많으셨을 겁니다.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어찌 몇마디 필설로 다하겠습니까만 파독광부분들중에 몇분이 독일땅에 와서 겪은 체험을 여기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파독광부의 삶은 그 자체가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러니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어렵게 글을 써가실 때, 서투른 점이 있더라도 많은 성원 바랍니다. 

최정규칼럼 아빠의 이야기(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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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3,616회 작성일 13-03-23 10:21

본문

한인광부 괴롭히는 '깡패'들과 맞서다.
 
1974년 5월 9일. 우리는 루르지역 함본(Hamborn) 탄광촌에 도착한 것이다. 기숙사 앞 밭에는 노란 유채꽃들이 흔들거리는 그 5월에 꿈속에 세상 같은 별천지 독일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한인광부 자치회가 기숙사 강당에서 환영모임 같은 거를 열었다.
 
환영식은 한국에서 소양교육 받을 때 들었던 이야기들이 여기서도 반복되는 기분이었다. 광산 기숙사 자치회장은 몇 년 전 박정희 대통령이 방문해서 눈물을 흘렸던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며, 민간외교 사절로 지킬 것, 조심할 것, 특히 옷차림 단정을 강조 등 소양 교육하듯 환영 인사를 했다.   우리는 기숙사 관리담당과 협의 속에서 방 배정을 받았다. 나는 김제에서 오신 두 형님들과 한방에 들었다. 기숙사는 박정희 대통령 방문 때 현대식으로 지은 2층 슬라브 지붕 건물이고, 방 하나에 3명씩 들어갔다. 방에는 세면대와 변소가 있고,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한번도 보지 못한 환경이었다. 숙식과 세탁, 청소는 기숙사 측에서 해준다고 했다. 이렇게 서른두명은 독일광산기숙사에 둥지를 틀었다. 난 그 서른 두명 중의 스물네살의 막내둥이었단다.
 
며칠 후 약 3개월분 월급(2,000마르크) 정도를 대출해줘서 한국으로 송금했다. 돈을 대출받아서 가족을 위해 송금하고 나니 내 어깨가 으쓱해졌다. 아빠가 돈을 집으로 송금하기는 처음이었다.
지상교육이 시작되었다. 지상교육은 광산에서 작업상 필요한 작업환경과 그 작업에 필요한 언어를 배우는 3개월 과정이었다. 교육시간에는 입항하는 것도 아닌데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가지 광부 작업복을 입고 있어야 했다.   
 
apa-07-01.jpg
                   ▲ 광산기숙사 도착기념 아빠다. 촌스럽지.  

언어교육은 작업현장에서 필요한 부분을 중심으로 했다.
- 입항 안내
- 작업장 언어
- 출항 안내
안전을 중심으로 하면서 작업에 최소한 필요한 언어를 가르쳤다. 언어공부는 재미있었다. 한국과는 달리 내가 작업에 필요한 용어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공부를 안 할 도리가 없는 거였다. 그래서 그런지 아베체데(ABCD)가 외워졌다.
 
아빠가 첨 본 독일 풍경
아빠는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시간들이었다.
주중에는 교육을 받느라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온갖것과 혼동되면서 헷갈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주말이 되면 좀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기분이면서 독일 보이기 시작했다
 
아빠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났다.
68년 독일 청년학생 혁명투쟁의 열기가 74년 내가 도착한 시골 함본 광산촌에서는 여전히 뜨겁게 불고 있었다. 68년 청년학생들이, 그때 소문으로는 “빵보다 자유를!” 구호를 외쳐서 끝내 자유를 확보했다고 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확보된 자유를 누리는 광산촌 풍경은 스물넷의 아빠에게는 별천지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그 풍경은 우리를 혼란과 혼동으로 몰아넣기도 하고, 뜨겁게 달구어 놓기도 했다. 동방의 예의지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온 우리한테는 정말 그 광경들이 혼돈스럽게 보였다. 특히 스물 네 살이었던 나에게는 그곳은 ‘신비의 세상’ 같았다. 한국인 광부끼리 사는 기숙사 내부에는 한국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기숙사 밖으로만 나가면 전혀 다른 풍경과 세상을 보게 되는 거였다. 한국에서는 극장이나, 특별한 곳에서만 볼 수 있었던 애정 표현을 우리 또래 독일 젊은이들은 장소를 불문하고 거침없는 행동들이다. 서양영화 속의 그런 장면을 전차, 버스, 공원, 길거리 같은 곳에서 볼 수 있었다. 독일 젊은이들은 뜨겁고, 자연스럽게 애정표현을 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도 극장이란 곳은 학교에서 단체로 교육영화를 보러 갈 때 아니면 간 적이 없었다. 그러니 교육영화 아닌 영화 외에는 본 적도 없으니 비교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일상생활과 풍습에서 보여준 적나라한 풍경은 나를 무척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한국인들이 충격과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독일 광산은 한국처럼 산중에 있는 게 아니라, 산은 보이지도 않는 시내에 있었기 때문에 출퇴근 하는 길에서 늘씬한 몸매의 금발 미녀와 젊은 남자가 껴안고 일상적으로 키스를 하는 장면을 보면, 낯 뜨거운 장면이긴 했지만,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동물원에 간 아이들처럼 모두가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우습지!
 
또 시내 길거리에 극장 광고판에는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사진과 문구를 달고서 선전하는 포스터도 우리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헌데 그 극장은 회원권이 있어야 입장이 가능하다고 했다. 얼마 후 그 회원권이 우리 기숙사에도 돌기 시작했고, 어느 금요일 저녁 나도 동료와 그 극장을 갔다. 지금은 독일 TV에서도 방송하더라. ‘학교 소녀들의 레포트(Schulmaedchen Report)’였다.
 
한인 광부촌의 폭력
동료와 극장에서 영화를 본 다음날 동기들의 긴급모임이 있다며, 다 모이라고 해서 갔다. 사람들 모두가 분노하고 있더라.
어제 저녁에 ‘선진’들이 느닷없이 모이라 해서 모였더니,
“야!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광산일 못해 먹겠다. 너희들이 시간만 나면 배구하는 것이 광산 측에 들어가 일하는 양이 많아져서 힘들다.” 하면서 변기 닦는 똥 방망이 들고서는 동기들을 괴롭혔다는 얘기를 해줬다. 그들은 그 방망이를 들고 “번호! 하나, 둘, 셋” 하고, “노래 불러.” 하면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세여보니~, 동백아가씨~” 같은 노래들을 정신없이 불렀는데, 그게 억울하다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동기 이름으로 진정서를 만들어 한인광부 자치회에 내고, 똘똘 뭉쳐서 싸우자고 약속을 했다. 우리 32명은 말 그대로 똘똘 뭉쳐서 진정서를 만들고, 거기에 서명을 했다. 우리는 한방에서 다음 날인 일요일까지 함께 있기로 했다. 독일에 도착한지 며칠 안된 우리는 아마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세뇌에 영향이었을까?
우리가 약속을 한 날인 토요일 저녁에 그 선진이라는 사람들이 기숙사에 또다시 나타났다. 아래쪽에서 싸우는 소리들이 크게 들렸다. 헌데 시간이 한참 지나니 조용해졌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 ‘선진’이라는 사람들은 태권도 좀 했다고 일도 안하고 건달패 비슷한 짓으로 사는 사람들인데, 새로 광부들이 오면 으레 하는 짓이었단다. 금요일 저녁에 일어났던 소식을 접한 자치회 회장이 왔는데, 기숙사에서 그 선진패들과 만나게 된 것이다.
회장이 그 사람들에게 따지고 들자, 선진패들이 칼을 빼들고 “찔러 죽이겠다.”며 설치자, 회장이 밀리지 않고 도리어 웃통을 벗어던지고 “찔러! 찔러 봐!” 하자, 그 패거리들이 뒷걸음치면서 도망갔다는 거다. 그 후 자치회 회장은 우리를 달래려 시간만 되면 맥주를 박스로 사들고 와서, 함께 마시고 우리와 배구를 함께 하기도 했다. 자치회 회장은 서울에 대학체육과를 출신이라고 했다.
 
헌데 우리 광산 기숙사는 그나마 양반이었다. 선진패들의 행패가 심한 다른 광산의 광부들은 주말만 되면 그들의 폭력이 두려워서 우리 기숙사로 피해오는 일도 많았다. 한국도 아닌 독일 땅에 광부로 와서도 ‘선진, 후진’ 같은 이상한 거로 서로를 아프게 하는 것을 보았다.
 
내 인생 진로를 바꿔준 장성환 목사
나보다 1년 정도 먼저 온 한 김제의 나기연 형님이 하루는 “자네 교회 믿나?” 해서 “예!”하자 “그럼 나하고 뒤스브르크 교회에 나가세” 해서 함께 나갔다. 전철을 타고 뒤스브르크역에서 내려서 좀 걸어가니 커다란 교회가 있었다.
그 교회의 담임 목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독일개신교협의회(EKD)가 맺은 한독협정에 의해서 한국에서는 처음 파견된 장성환 목사라 했다.
혜린이, 너도 잘 알지? 네가 어릴 적 “할아버지 목사”라며 따랐던 분이다. 헌데 이분이 네 아빠의 인생 진로를 바꾸게 만들어주신 분이기도 하다.
교회를 다니는 것을 안 같은 방에 사는 형님이 “야! 정규야. 교회 다니지 마라.”고 말했다.
그 형님은 “뭐 빨갱인지, 반정부인지 허는 목사고 꺼떡허면 교인들을 선동해서 독재니 민주니 허면서 한국도 아닌 독일에서 데모를 헌단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인자 한국 못 간다고 허드라. 그러니 다니지 마라.”고 말해줬다.
아빠는 고민했다. 한인교회는 타국 땅에서 정서가 같은 사람들이 일요일에 모여 소통하는 유일한 곳이었다. 또 한국 간호원들도 무척 많았다. 네 엄마도 그때 그 교회에 다녔다고 하더라. 고민이 되었다. 고향에 있는 가족들이 생각나서 말이다.
그러나 스물네 살 백이 청년인 내가 안 나갈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어릴 적 간척지교회에 나갈 때는 고무신 좋은 거로 슬쩍 바꿔 신고자 나갔고, 사춘기에 궁월리 교회는 청년들끼리 만날 수 있어서 다녔는데, 독일에서는 말도 통하고, 정서가 같은 한국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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