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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은 파독광부가 독일땅에 온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63년 파독광부 1진이 독일에 도착하면서 재독동포사회가 시작되었고, 전세계 동포사회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독광부분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셨지만 정작 개인적으로는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고생도 많으셨을 겁니다.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어찌 몇마디 필설로 다하겠습니까만 파독광부분들중에 몇분이 독일땅에 와서 겪은 체험을 여기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파독광부의 삶은 그 자체가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러니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어렵게 글을 써가실 때, 서투른 점이 있더라도 많은 성원 바랍니다. 

이정의칼럼 검정밥(1)

페이지 정보

작성자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3건 조회 7,599회 작성일 13-03-17 09:02

본문

 
 
[검정밥은 2005년 독일 ‘교포신문’에 연재되고, 다음해에 국내의 인터넷신문에 연재된바 있습니다. 파독광부 50주년 이야기사에 이정의 선생님의 허락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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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돈 벌러 갔다가 천길 땅속에서 생명을 잃으신 영령들께 이 글을 바칩니다. - 이정의 
 
검정밥
 
 
엄마 잃은 기러기
 
1964년 11월 23일.
 
싸늘한 바람은 김포 벌판에 성큼성큼 다가오는 겨울을 알리고 초겨울 싸늘한 해는 환송 나온 사람들의 아쉬움을 여의지 못하는 양 이륙준비를 하고 있는 비행기의 그림자를 활주로 위에 길게 늘여 잡고 있었다.
 
생전 처음 초가집 몇 채나 되는 이 커다란 비행기를 타 보는 나는 이제야 떠나는구나 하며 걷잡을 수 없는 마음으로 비행기가 붕 뜨기만을 마음조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비행기는 세차게 내뿜는 엔진의 분사력에 못 이겨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덜커덕거리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벙벙한 생각과 이상야릇한 기분을 뱃속에 느낄 때 그 큰 새는 발밑에 땅을 버리고 공중으로 치솟았다.
 
저 아래의 초가집과 논바닥이 점점 작아지면서, 서독파견광부들을 실은 비행기는 일사천리로 지구 저편에 있는 독일이라는 나라를 향하여 나르고 있었다.
 
독일.
살기 좋은 나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단추만 누르면 모든 것이 자동으로 돌아가는 나라.
노동자도 넥타이를 매고 출퇴근하는 나라.
 
드디어 나는 이 지상천국으로 향한 궤도에 올랐고, 나를 불효자라고 힐책하던 여전도사님의 눈초리를 다 쓸데 없는 넋두리라고 승리자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지워버리며 솜처럼 깔린 구름바다를 내다보았다.
 
‘흥. 불효! 홀어머니! 효도 때문에 내 평생을 버려야 한단 말인가? 할 일이 없는데도, 그 삶을 효도하느라고 어머님 모시고 살아야 하나? 독일 가서 돈 벌어서 매달 용돈 보내드리면 그게 바로 효도하는 것 아닌가? 동네 사람들은 어머님을 얼마나 부러워했는데. 아들이 독일 가게 되어 출세했다고. 외국물 먹기가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이 시절에 말이다.’
 
이렇게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홀로 남겨둔 어머님께 대한 죄스러운 마음을 정당화시키고 있었다.
 
1962년 11월 1일에 군복무를 마치고 집에 왔을 때 우선 그 지긋지긋한 군대생활에서 벗어났다는 기쁨 가운데 앞으로 어떻게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며칠 이렇게 지나는 동안 아버님께서 몸이 편찮아서 눕게 되셨다. 황달병이라고 진단되었다. 그래서 약이라는 약은 다 구해서 집에서 병간호를 해드렸으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간경화증이라고 진단한 후 나을 방법은 수술하는 길 외에는 없다고 했다. 수술한 후 며칠이 지나도 악화되는 병세는 병원에서 더 치료할 방법이 없다는 사망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아버님은 집에서 병간호를 받으시다가 이듬해 이월 중순에 돌아가셨다.
 
학우회의 많은 여학생들이 닷새 동안 정성껏 만든 꽃으로 장식된 꽃상여에 아버님을 모시고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우리 밭 언저리에 묘지를 정하고 장사해드렸다. 뒷집 아저씨는 이제는 부산시 내에서 묘를 세우면 안된다고 하시면서 김해나 울산 쪽으로 묏자리를 구해야 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묏자리가 마을에서 벗어난 고개 위에 있었고 또 그 주위에 오래된 묘가 하나 있었기 때문에 내가 정한 곳에 묘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부산시에서도 아무 반응이 없었지만, 내가 특히 묘지를 거기에 정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제대한 직후 <진>이라고 불리는 이웃 동네에 내가 존경하던 박 선생님 댁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그 댁에 방문 왔던 어느 스님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함께 하게 되었다. <진>에서 동쪽으로 <용두고개>를 넘어서면 시야가 확 트이면서 <오륙도>와 <아치섬>이 앞에 놓인 우리 동네 동삼동의 <웃서발>이 나타나는데 바로 그 고개의 왼편에 우리 밭이 여덟 마지기 길 위의 산쪽에 놓여 있었다.
 
그 고개 위에서 스님이 잠깐 발길을 멈추고 아름다운 <웃서발> 경치를 한번 휘둘러 보면서 무슨 비밀을 전해주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이 동네에 명당이 두 곳이 있는데 한 곳은 집이 서 있소. 그런데 그 집이 아직 치부하고 있지만 바로 위에 새 집들이 들어앉으면서 그 집의 맥을 잘랐기 때문에 멀지 아니해서 망할 것이요. 다른 한 곳은 아직 비워 있는데 알고 싶소?”
 
육이오 전쟁 이후에 피난 온 사람들에게 전도 되어 예수쟁이가 된 내가 명당 운운하는 것을 우습게 생각했지만 존경하는 분이 사귀는 친구라서 반박하지 않고 말씀해 달라고 했다.
 
그 스님이 지적한 장소가 바로 우리 밭 가장자리에 있는 빈터였다.
 
나는 속으로 웃으면서 그 후로 그 일을 잊어버렸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묏자리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일을 상기하고 아버님의 묘를 거기에 세우게 되었다.
 
그 곳이 정말 명당이었기에 내가 독일로 가는 비행기를 타게 되었을까?
 
나는 형제자매 없이 외동아들로 자라났다. 나는 비록 외동아들이었지만 호적에는 차남이 되어 있었다.
우리 가문에 아버님 대(代)에 와서 아들이 귀하게 되었다. 아버님은 육 남매의 막내아들로 태어나셔서 위에 형님이 세 분, 누님이 두 분이나 계셨다. 제일 큰 형님은 무자하셔서 둘째 형님이 두 아들 중 큰아들을 큰 형님께 드렸고, 셋째 형님은 딸만 다섯만 낳으시고 아들이 없었고, 막내아들인 아버님은 아들커녕 딸도 가지지 못하셨다. 그래서 아버님은 사촌 형님의 작은 아들을 양자로 얻어 호적에 아버님의 친자식으로 올렸다. 양자를 다린지 6년 후에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그 형은 자기 친부모님 집으로 다시 돌아갔으나 호적에는 그대로 장자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 나는 아버님 생시에 내 앞으로 올려졌던 얼마 되지 않는 땅만 내가 차지하고, 아버님 앞으로 신고 되었던 모든 재산은 내가 자진해서 장남인 형님께 드렸다. 나는 돈을 몰랐거나 돈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내가 거의 전 재산을 형님께 드리는 것을 보신 어머님과 아저씨는 아연실색하시면서 내가 미쳤거나 바보인 양 생각하셨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돈을 가지고 싶으면 또 벌면 생기지 않느냐고 했다. 아저씨는 돈벌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아느냐고 반박하셨다.
 
아버님의 묘지가 있는 토지도 형님께 드리면서, 만약 훗날에 땅을 팔게 되면 묘지 서른 평은 팔지 말고 남기라고 당부했다.
 “이 사람아, 아무리 하기로 아버지 묘까지 내가 팔아먹겠나?”
 
형님은 나를 나무라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에게 남은 재산은 아버님의 빚 청산을 다하고 나니 살기에는 그래도 어려움이 없었으나 다른 여유가 없었다.
 
이런 일 저런 일로 여기저기에서 일년을 보냈으나 마땅한 자리가 없었고 또 얻은 두서너 직장도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고향에서 세월을 보내면서 틈틈이 밭에 나가 지게에 똥장군을 지고 똥도 쳤다. 처음에는 더럽고 냄새나는 똥을 몸에 묻히지 않으려고 팔을 뻗어서 거의 30킬로나 되는 무거운 짐을 처리하자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똥을 묻히지 않으려고 애를 쓸수록 옷과 몸에는 똥물이 퉁겨 더러운 얼룩을 지으면서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똥을 다루는 일에는 똥을 더럽다고 여기지 말고 똥 묻힐 각오를 하고 똥과 한 덩어리가 되어 똥에 바싹 다가들면 힘든 것도 없고 일하기가 수월했다. 몸에 묻힌 똥은 씻으면 되었다. 그래서 그 후에는 무슨 일이든 일을 할 때는 내가 하는 일이 좋든 나쁘든 바싹 붙어서 그 일과 일체가 되는 것이 나의 생활방침이 되었다.
 
그러던 중에 하루는 서독파견광부 모집이라는 광고가 신문에 실렸다.
 
나는 얼마 전에 신문에 독일에 일차로 파견되어 갔던 광부들에 대한 기사가 크게 실렸던 것을 기억했다. 모두 대학출신으로 평생 일이라고는 몰랐어도 광산 일이 힘들지 않다고 했다. 단추만 누르면 홍차와 쥬스가 값없이 나오고, 지하에서도 힘든 일 없이 모두 자동식으로 되어 있다고 했다. 노임도 유럽에서 제일 높고, 주말이면 파리 뿐만 아니라 연중 휴가 때에는 유럽 각 국을 관광할 수 있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돈도 많이 저축해서 독일에 간 지 반년도 못되는데 벌써 고향에 논 한 마지기를 장만했다고 보도됐었다.
 
독일? 한번 가보자!
 
사실 독일에 광부로 간다는 것은 한국이라는 숨막힐 정도로 가난하고 좁은 땅을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돈이 있어도 외국바람을 쐴 수 없는 처지에, 그것도 가까운 일본이나 대만이 아닌, 독일 곧 유럽으로 떠나간다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이었다. 외국물을 맛본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보다 힘들었고, 거의 이룰 수 없는 젊은이들의 꿈이었다.
 
생전 노동이라고는 모르는 사람들도 가서 일을 하는데 똥장군을 질줄 아는 내가 무슨 일을 못하랴 생각하고는 모집에 응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이 일에 대하여 어머님하고는 한마디도 의논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비서류 목록을 보고 나는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광산 경력증명서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우연히 같은 교회에 다니는 L 형이 자기도 독일에 간다고 하면서 서류를 다 준비했다고 했다. 아니, 이 사람도 나처럼 광산의 광자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광산 경력증명서를 구할 수가 있었나? 그는 아는 사람이 해주더라고 말했다. 서류를 한번 보자고 했더니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광산 이름과 주소를 기억하고는, 아는 사람이 해주는 것과 내가 하는 것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곤 매일처럼 우리 집에 모여드는 학생들을 여러 군데 도장집으로 보내어 고무도장을 새겨 오게 했다.
 
이렇게 해서 준비된 서류를 접수 마감일까지 기다렸다 바쳤다.
 
몇 주 후에 xx 초등학교에 시험이 있으니 응시하라는 연락이 왔다. 응시하러 갔다가 가짜라고 잡히면 이게 무슨 꼴이 되나? 두려움이 앞섰으나 다 그런 사람이니 잡히면 잡힌다는 각오로 그날 시험을 치러 갔다.
 
시험에는 영어, 수학, 일반상식 문제와 IQ-시험이 있었다.
 
또 몇 주 기다렸더니 시험에 합격되었다고 서울 연세대학 세브란스병원에 신체검사를 하러 오라고 연락이 왔다.
 
아직까지도 어머님께 여쭈지 못하고 그냥 서울에 갈 일이 생겼다고 만 일러드렸다. 어머님은 또 자기 나름대로 짐작이 있어서 언제 돌아오느냐고 묻지도 않으시고 그냥 가라고만 하셨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때 어머님은 “이놈이 지금 이 생활을 하기에 너무 역겨우니까 서울에서 사귀던 여식아이 집에 가서 데릴사위로도 들어 갈려나 보다” 생각했다고 하셨다.
 
언젠가 내가 서울아가씨에 대한 귀띔을 해드린 적이 있었다:
 
김포에서 공군졸병으로 근무하면서 주말에 서울로 외출 나갔다가 우연히 사귀게 되었던 경아는 부친이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날 때까지 정계에서 활약하셨고 지방에 공장을 경영하셨던 부자 집안의 무남독녀로서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우리가 서로 만나서 알게 된 사실은 우연이었다.
 
어느 날 통행금지가 가까운 늦은 밤에 나는 서울 역에서 영등포로 가는 택시를 간신히 잡아서 어느 젊은 여인과 합승하게 되었다. 영등포에 도착하기 전에 무엇을 찾는 듯 이리 저리 뒤적거리던 아가씨가 붉힌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공군 아저씨, 차비를 제 것까지 좀 내어주세요.”
 
젊은 여인의 눈에는 애걸이 담겨 있었다.
 
여인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는 순간 나는 아연할 정도로 너무 아름다운 그 여성의 모습에 정신을 잃는 것 같았다.
 
첫눈에 반해버렸다.
 
나는 기꺼이 우리 두 사람의 차비를 지불하고 영등포 구청 앞에서 젊은 아가씨의 뒤를 따라 내렸다.
“공군 아저씨 감사합니다. 저를 어떻게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집에서 나올 때 가지고 나온 돈주머니를 어디에서 잃었나 봐요. 차내에서야 잃어버린 사실을 알고는 아저씨께 부탁드린 거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녀는 깍듯이 작별인사를 했다.
 
나는 아찔했다.
 
놓치면 안 된다.
 
“아가씨는 영등포에 사십니까?”
 
나오는대로 물었다.
 
“아니에요 저는 H동에 살아요. 영등포에는 제 친구가 살아요. 갑자기 전해 주어야할 급한 일이 있어서 그 친구에게 가는 중이에요.”
 
“그럼 그 친구는 아가씨가 오는 줄 모르고 있습니까?”
 
“예. 아직 몰라요.”
 
“그럼 친구를 못 만나면 어떻게 돌아가려고 하십니까? 밤도 늦었는데.”
 
나는 주머니에서 H동까지 가기에 넉넉한 택시비를 끄집어내어 그 예쁜 아가씨에게 주었다. 그러나 여인은 겸손히 사양했다.
 
“제 친구가 없으면 집에 전화를 걸어서 데리러 오라고 하면 돼요.”
 
그렇게 대답하다가 무슨 생각을 했던지,
 
“아저씨의 말씀도 일리가 있어요. 밤이 너무 늦었으니까요. 그럼 제게 그 돈을 주세요. 그렇지만 제가 빌리는 것이에요. 다음 토요일에 서울로 나오실 수 있으면 오후 세 시에 미도파 음악실에서 만나요.”
 
나는 그 맑고 아름다운 얼굴과 1.67 m 정도 큰 키의 날씬한 몸매를 인식하면서 얼떨결에 그렇게 하자고 대답하고 헤어진 후, 일각이 여삼추라는 말을 처음으로 느끼면서 다음 주말이 될 때까지 잠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그 아름다운 처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다음 토요일에 만난 그 처녀가 E 대학교 2년생인 경아였다.
 
정말 행복하고 즐거웠던 일년 반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버렸다.
 
제대할 무렵에 경아와 나의 사이가 어느 정도까지 왔는지 짐작하신 부친께서는 결혼문제를 내어놓고 데릴사위로 오라고 말씀하셨다.
 
데릴사위?
 
나도 외동아들인데 이 일을 어떻게 하나?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드리거나 승낙할 수 없는 소원이었고 경아의 부친께서는 무남독녀인 딸을 시집보내어 자기 집안의 대를 끊을 수 없다고 하셨다.
 
나는 열흘 간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데릴사위로 그 가문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보수적인 집안이었던 경아네 부모님이나 우리 부모님의 대를 잇는다는 움직일 수 없는 조건적인 가내지침도 그러했지만, 너무도 재력과 권력의 차이가 큰 처가에 얹혀 살며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 그 당시의 젊은 나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던 사실이었다.
 
문제의 해결이 성립되지 못하게 되자 경아 부모님은 헤어진 후 부모 된 자기들의 입장을 보아서 경아와 교제를 끊어달라고 신신 부탁하셨다.
 
부산에 함께 내려가겠다는 경아를 며칠 동안 달랜 후에 나 혼자 아픈 마음을 안고 고향으로 왔다. 
 
이제 신체검사 때문에 서울에 올라 가면 며칠은 지내야 하는데 다른 데는 갈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경아를 다시 찾아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권력이라면 뒷간보다 멀리하고, 또 거기에다 여당은 썩은 생선처럼 여기던 내가 할 수 없이 K당의 원내총무를 하던 우리 선거구에서 뽑힌 Y씨 댁에 연락을 해서 서울에 머무는 동안 그 집에서 먹고살면서 신체검사를 하고는 집으로 내려왔다.
 
이외에도 빨리 돌아온 나를 어머님은 유심히 지켜보고 계셨다.
 
몇 주 지나니 노동청에서 독일 파견 광부로 선택되었으니 강원도 장성에 광산실습교육을 받으러 오라고 연락이 왔다.
 
어머님께 이제는 이 사연을 알려드렸다.
 
독일이 도대체 이 세상 어느 구석에 있는지도 모르시는 어머님은 너만 잘 된다면 내가 더 원할 것이 무엇 있느냐? 하시면서 눈물을 감추고 허락하셨다.
 
그 날부터 어머님의 철야기도가 잦아짐을 느끼며 나는 강원도로 올라갔다.
 
장성에서 광산실습훈련이 끝난 후 우리는 곧 서울 수유리로 이송되어 세뇌교육, 즉 사상교육을 며칠 받았다. 또 이 기간 중에 내장을 우글거리는 모든 거위와 회충으로부터 철저히 해방시켰다.
 
11월 23일에 독일로 가게 된다는 출국일자가 확정되었다.
 
출국 이전에 며칠간 고향에 내려가서 친척과 친구들을 이별할 수 있는 기간을 주었다.
 
출국하러 서울로 올라가기 전날 나는 마지막으로 경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해만에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 나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전화 저쪽 끝에서도 숨이 차듯 더듬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경아가 먼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느닷없이 독일로 간다고 했고 외국에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알아봐서 만일 유럽이나 미국에서 살 수 있다면 그 곳에서 영주하고 싶고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끝으로 경아가 좋은 남편 만나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고 했다.
 
하고싶은 말은 끝이 없었지만 거기까지 단번에 고함지르듯 말을 하고는 떨리는 마음으로 경아가 할 말을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후에 경아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정의 씨, 내년 봄 졸업식에 오실 줄 알았어요. 이제 독일로 가신다구요? 다시는 귀국하지 않으시겠다고요? 홀로 계시는 어머님을 어떻게 할 것이에요 ...?”
 
경아는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수화기를 놓았다.
 
더 들고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두려움이 내 가슴을 조였다.
 
아직도 나는 경아를 사랑하고 있었다.
 
경아의 얼굴을 눈앞에 그리면서 나는 어두운 밤하늘에 무엇을 찾는 것처럼 창 밖 구름 위를 내다보았다.
 
갑자기 비행기 속이 조용해졌다. 어느 누가 마이크를 통해서 ‘울 밑에 귀뚜라미 우는 달밤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곳저곳에서 노래에 맞추어 함께 부르기 시작하자 갑자기 기내 전체가 부르는 합창이 되었고, ‘가도 가도 끝 없는 넓은 하늘로 엄마 엄마 찾으며 날아갑니다’ 라고 끝나자 부끄러움 없이 눈물을 닦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모두 거의 이삼십 대의 젊은 청년들이었지만 내 고국의 품과 부모 친지의 곁을 처음으로 벗어나서 멀리 떠나는 신세들이었다. 비록 고국을 겨우 몇 시간밖에 뒤로 두지 않았지만, 이역만리 머나먼 곳을 혈혈단신으로 찾아가서 닥쳐오는 운명과 맞서야 될 것을 생각하니, 과연 내 신세가 차가운 가을하늘에 엄마를 찾으며 날아가는 엄마 잃은 기러기와 같아 보였다. 
어머님은 지금 무엇을 하시고 계실까?
 
아들을 잘 가라고 하신 후 부산 역까지 가기 싫다고 하시며 내가 버스에 올라타기 전에 벌써 대문 안으로 들어가신 어머님.
 
하느님을 붙잡고 계시겠지.
 
하느님께서 내 아들과 함께 계시고 내 아들을 도와주시라고 빌고 계시겠지.
 
엄마를 꼭 껴안으면서 돌아올 때까지 내 걱정은 말고 건강에 조심하시라고 부탁하던 나를 기다리시는 무한한 세월의 첫 날을 셈하기 시작하셨으리라. 불면 날까, 쥐면 꺼질까, 아기자기 키워낸 아들을 독일로 보내시면서 버림받은 줄도 모르시고 일각이 여삼추로 삼 년이란 긴 날짜의 하루하루를 헤아리시면서 오매불망 기다리실 어머님. 아들이 자기를 배신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로 결심하고 떠난 것을 아신다면 하고 생각하니 찌르는 듯한 마음의 아픔에 몸부림하면서 “어머님 용서하소서!” 하고 나는 마음속으로 어머님과 또 한번 이별을 했다.
 
비행기 안에는 이제 이 사람 저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우리를 태운 비행기는 알라스카를 향하여 바다 위를 나르고 있었다.
 
저 아래 조그맣게 보이는 섬에는 화산이 연기를 뿜고 있었다.
 
우리는 어느 정도 왔는지 지금 베링 해협 위에 왔는지 생각을 하면서 생전 처음 보는 화산이 신기해서 유리창에 코를 문지르며 내다보았다.
 
서독광부를 태운 비행기는 알라스카의 앵코레지에서 잠시 머물었다가 이제는 북극을 가로 지르고 있었다.
 
“야, 변소에 수건과 비누가 하나도 없다.”
 
옆자리의 사람이 앉으면서 불평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쳐다보면서 대꾸했다.
 “네가 가져온 것 도로 다시 갖다 놓으면 되지 않나!”
 
그는 처음에는 시치미를 딱 잡아때더니 정면으로 쳐다보는 내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가져온 수건과 비누를 변소에 도로 갖다 놓았다.
 
비행기가 앵코레지에 체류했을 때 화장실에 모든 필수품과 수건, 비누 같은 것을 독일에 도착할 때까지 넉넉하도록 보충했다. 그러나 화장실에 가는 사람마다 수건과 비누를 몇 장씩 감추어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겨우 몇 시간이 지난 후에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못 사는 나라에서 모든 것이 부족하게 살다가 눈앞에 놓인 지키는 사람 없는 외제 물건이 탐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마이크를 통해서 이 사실을 말하고 가져온 모든 물건을 다시 돌려 놓음으로서 독일에 도착하기 전부터 창피스러운 일을 하지 말자. 그리고 국위를 손상시키는 일을 말자고 호소했다.
 
독일 사람들이 우리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다.
 
우리가 독일에 도착할 때에는 화장실에 수건과 비누가 충분하게 남아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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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초롱님의 댓글

초롱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오모낫, 이 글도 일등으로 읽었습니다. <br /><br />재미있게 읽었어요. 비행기에서 마이크로 호소해서 다시 질서를 찾았다는 내용이 감명 깊습니다. 그나저나 경아하고는 영영 이별인가요? <br /><br />좋은 글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br /><br />

Noelie님의 댓글

Noelie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div>그게 언제인데 출국 일자 11월 23일을 기억하고 계셨군요.</div>
<div>더구나 독일의 11월, 겨울에도 날씨는 차도 햇볕이 가득한 한국과 달리 햇볕이 거의 없는 어두운 독일...</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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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저도 좋은 글 나눠주셔서 감사드린다는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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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최정규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789 04-19
20 이정의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493 04-18
19 김재승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407 04-17
18 최정규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990 04-15
17 이정의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54 04-15
16 최정규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038 04-08
15 이정의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754 04-07
14 김재승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6838 04-07
13 이정의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908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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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정의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534 03-23
10 최정규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616 03-23
9 이정의칼럼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654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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