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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은 파독광부가 독일땅에 온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63년 파독광부 1진이 독일에 도착하면서 재독동포사회가 시작되었고, 전세계 동포사회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독광부분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셨지만 정작 개인적으로는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고생도 많으셨을 겁니다.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어찌 몇마디 필설로 다하겠습니까만 파독광부분들중에 몇분이 독일땅에 와서 겪은 체험을 여기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파독광부의 삶은 그 자체가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러니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어렵게 글을 써가실 때, 서투른 점이 있더라도 많은 성원 바랍니다. 

최정규칼럼 아빠의 이야기(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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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7,089회 작성일 14-03-29 18:21

본문

"동백아가씨에서 아침이슬로 그리고 타는 목마름으로"
독일에서 노학연대…토론하며 의식화되다


한마음 조합


한마음조합 활동의 폭은 점점 넓혀져 갔다.
봉공버스를 구입해 공동노동으로 생산되는 무, 배추, 파, 갓, 열무등과 공동구매를 통해서 생협을 시작하였단다.
물론 처음시작할 때 시작한 매월 회비형식으로 내는 돈을 출자로 해서 만든 신용협동조합도 잘 운영되어갔다.


텐트구입
매년 여름휴가를 이용한 한마음조합 북해 여름캠프는 계속되었는데 비용이 만만치가 않았고, 또 일정도 우리가 선택할 수가 없어서, 생각 끝에 텐트를 사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우리는 공동구매로 10% 정도 싸게 텐트 7개를 구입했단다.
그때 독일에서는 물건을 깎아서 산다는 것 자체가 없었는데 우리가 공동구매를 통해 정가보다 10% 싸게 살 수 있었다는 소문을 듣고, 함께 사지 못한 조합원들은 뒤늦게 같은 방법을 시도했지만, 그들은 결국 깎지 못하고 정가로 살 수밖에 없었다.
10% 할인 가격으로 구매하게 된 것은 너희 엄마의 실력 때문이었다. 엄마는 판매원과 한참 얘기를 하다가 "사장을 만나 얘기해야겠다"고 하자 판매 총책임자가 나왔고, 엄마는 그 사람과 흥정 끝에 할인을 받을 수 있었던 거다.
너희 외갓집이 영월에서 양품점을 대대로 해온거 너도 알지? 장삿집 딸로서 그때 능력을 발휘했던 것 같다.
81년 한마음조합 여름캠프 후 조합원들은 너도 나도 텐트를 사서 매년 여름 휴가 때만 되면 네덜란드 북해로 함께 가는 일이 연중행사가 되었다.


엄마는 니가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재봉틀을 사 예쁜 옷을 직접 만들어 입혔는데 그 옷을 입은 너는 정말 너무나도 깜찍하고 예뻐서 아빠는 늘 입에 함박웃음을 달고 살았단다.
그리고 우리 지역 신문에 가끔 너와 관련된 기사가 실려서 우리를 놀라게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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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새면서 토론하다
 
아빠가 지금까지 네덜란드 북해 얘기를 계속 하는지 혹시 아니?
네 동생 훈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엄마! 아빠!" 하면 이상하게 목이 쉰 소리가 나와서 의사를 찾아갔더니 그 의사는 "기관지 문제인데 네덜란드 북해로 휴가를 가보라"고 권유해서 그곳으로 주말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러자 훈이의 목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상적이고 깨끗한 소리가 됐다.
그때부터 나는 너희 할머니 말씀대로 종자를 지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북해를 다녔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북해는 아빠의 고향인 부안 서해 바다와 너무 닮아서 마치 고향을 가듯 그곳을 찾았던 것 같다.
할머니도 북해휴가를 함께 했단다. 네덜란드 북해 이야기는 참 많으니 계속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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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학연대가 시작되었다.
한마음조합은 83년에도 할머니들을 초대하여 경로잔치를 했고, 점차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모임을 했는데 그중에서 복흠대학에서 공부하는 한인 유학생들과 만남도 있었다.
지금도 인상적인 것은 달하우젠(Dahlhausen) 강가 옆 잔디밭에서 배구와 축구를 함께한 후에 텐트까지 쳐놓고 불고기를 구워먹으면서 밤샘 토론을 한 것이다. 우리는 자주 그런 토론을 날을 꼬박 샌 적도 많았다. 이런 기회에 민주화가 왜 중요한지, 노동운동이 왜 중요한지, 독재가 뭔지에 대해 들으면서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의 의식은 변해갔다.
특히 아빠는 한국에서는 그저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만 고민했는데, 독일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 날밤 새우는 일이 많아졌다. 나만 그러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아빠는 그때부터 한국에서 책을 받아서 보급 사업을 시작했다.
참, 이 글을 쓰다보니 ‘일월서각’이라는 출판사의 김 사장님이 떠오르는구나. 그분이 책을 보내주셨다.
참 고마운 사장님이었다.


우리가 부르던 노래가 바뀌어갔다 
그리고 우리들의 삶의 문화가 바뀌어갔다. 먼저 우리가 즐겨 부르는 노래가 변했다. 예전 고향에서 불럿던 동백아가씨, 비 내리는 호남선, 가슴 아프게 같은 노래는 어느 때부턴가 아침이슬로 그리고 타는 목마름으로 바뀌었다.
유학 온 학생들이 기타를 치면서 그 노래를 부르는 걸 보니 너무 멋지더라.
헌데 노래를 배워서 부르다보니 가사가 정말 나를 울게 하고 주먹을 쥐게 하더라. 특히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에서 말이다. 또 그들을 통해서 김지하라는 시인을 알게 됐고, 그 시를 같이 읽고 토론하면서 ‘타는 목마름으로’ 노래를 부르다가 함께 울고 웃었단다. 그리고 각종 모임과 세미나 토론 때 마다 ‘민중’이라는 용어가 여기저기서 나오는데, 우리는 도대체가 그게 뭔 뜻인 줄도 잘 모른 채 덩달아 "민중, 민중" 하고 있었다.


한마음조합은 재정사업을 위해 큰 봉고버스까지 구입하여 떡과 채소뿐만 아니라 식품도 공동구입해서 나누고 판매를 했다. 그 때 아빠는 정말로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지냈다. 직장도 다녀야 하고, 한국에서 보내오는 자료들 복사해서 나눠야 하고, 시간만 되면 버스 끌고 다니면서 장사도 하고, 주말에는 교회와 여러 모임에 다녀야 했다.
내가 그렇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부지런한 너희 엄마와 똑똑한 너 때문이었다.


너는 동생 훈이를 너무도 잘 보았다. 아마도 네가 유치원을 졸업하고 학교에 들어갈 무렵일 때일 거다.
하루는 유치원에서 전화가 왔다. 엄마보고 한번 만나자는 전화였다.
엄마가 유치원 담당자를 만나고 와서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더라.

 

엄마는 너에게 유치원에 동생 훈이가 가게 되면 누나인 혜린이가 잘 봐줘야 한다고 얘기했단다.
훈이가 유치원에 다니기 전부터 그런 얘기를 계속 했었는데 훈이가 유치원에 처음 간 날 네 엄마가 하던 말 때문 이
었는지 동생 곁을 떠나지 않고 누구도 훈이 옆에 오는 거를 막고 있어서 하는 수 없이 담당자가 엄마를 불렀던 거였단다. 그때부터 너는 항상 훈이를 챙겨서 훈이는 지금까지 마마보이도 파파보이도 아닌 누나보이가 된 것이다.

 
김세균 형이 유학을 왔다


김세균형이 유학을 왔다. 재미있게도 보흠에 외스베(Oekumenischen Studienwerks e.V.)라는 개신교 재단이 있었는데, 그 재단에서는 제3세계 지원정책으로 장학금제도가 있었다. 그 장학금을 받게 된 사람들이 독일에 유학 오면 어학공부는 그 재단에서 했기 때문에 한국 장학생들이 많이 거쳐가는 코스 였단다.
그 당시 한국기독도교회협의회(KNCC)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상징처럼 되었던 때였나보다. 그래서 인지 보흠에는 활동가나 구속자 또는 그 자녀들이 많이 왔었단다. 이런 환경 덕에 우린 참 좋은 분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참 그러보니 빠진 이야기가 있구나.
79년 너와 한국에 갔다가 오자마자 오펠 자동차공장에 들어가던 시기에 한국에서는 ‘YH'와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이 벌었졌단다. 방문했을 때 만났던 사람들이 구속되고, 수배되는 거였다. 이제는 니 대학선배가 되는 김세균 형을 비롯 신인령 선생님 등도 구속되었단다. 헌데 내가 어찌할 바 모르던 때에 황민영 형님이 구속자 인적 상황을 써주고, 그들이 한 일도 써줘서 알리는 일을 했단다.
우선은 교회를 중심으로 알리고, 학생들의 도움으로 독일어로 만들어서 뿌렸단다. 헌데 살인마 전두환이가 나타나 5월학살이 일어나자 모두가 조용해졌고, 우리도 소리를 크게 내지 않고 현장의 바닥을 긁는 작업을 시작한 건 이미 얘기를 했으니까 너도 알 거다.


헌데 재미있게도 그때 크리스챤아카메미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김세균형이 83년에 가족들과 함께 독일로 유학을 왔었단다. 그러니 아빠가 얼마나 힘이 났겠냐?
한마음조합은 한마음이라는 회지도 발간하면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그중에서도 금토일 주말세미나는 연 2회 정도를 온가족이 모여서 했단다. 83년 가을 세미나는 ‘한국의 현대사의 과제’란 주제로 김세균형을 강사로 모시고 뮬하임 강가 근처 교육센터에서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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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 유럽지부를 만들기 위해 조용히 몇몇 사람들과 논의를 시작했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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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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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규 선생님,
베를린 사는 목로입니다. 오늘 장례식이었던 이영준 선생님의 추모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최정규 선생님의 부고 소식을 간접적으로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칼럼에서 이야기를 거시는 그 따님이 아빠에 대해 쓴 추모기사가 링크로 걸려있었습니다. 읽으니 '부전녀전, 글솜씨가 유전이구나' 싶었습니다. 두분이 나란히 앞서거니 뒷서거니 가셔서 거기서 만나시니 반가우시겠네요.
비록 뵙지는 못했지만 이 칼럼을 즐겨 읽었던 독자로써 늦었지만 인사를 드립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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