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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규칼럼 아빠의 이야기(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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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03-03 14:30 조회4,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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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이야기(19)

한마음조합 

79년 11월 결성된 한마음조합 일은 참으로 힘들었다.
핵심적 활동을 해왔던 ‘학습조’ 사람들이 에발드 광산투쟁으로 해고되어 다 흩어져서 일부는 타 지역 광산으로, 나머지 몇 명은 기술교육을 받으러 가서 현장인 복흠(Bochum)에는 나 혼자만 덜렁 남아있게 되었다. 함께했던 이 박사도 귀국 준비로 이미 마음은 한국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습조 지도 선생인 정현백 선생이 주말 교육 세미나를 하자고 제안했다. 내가 같은 학습조 사람들에게 연락을 했더니 좋다고 해서 세미나를 준비했다.
그 당시 세미나 주제가 잘 기억 되지는 않지만 아마도 '독일과 한국 농민전쟁 비교'였던 거 같다.

요즈음 가끔 아빠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와! 우리가 사는 곳이 이토록 멋있구나'라고 생각을 하는 스티펠(Stiepel)과 켐나데강에 이르는 사이에 있는 개신교 교육관에서 주말세미나를 갖게 되었단다.

정 선생의 강의는 우리를 긴장하게 했다.
독일 농민전쟁과 종교개혁에서 루터와 토마스 뮌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개신교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루터를 새롭게 볼 수 있는 강의였다. 나는 그때 토마스 뮌처를 알게 되면서 느닷없이 갑오농민군의 상징이었던 녹두장군 전봉준 장군을 떠올리며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한국 농민전쟁에서는 갑오 동학농민혁명전쟁에서 남접과 북접 이야기를 했다.
아빠는 이미 오펠자동차공장 직장노동자평의회 모임을 통해서 느끼는바가 많았지만 그 당시 주말 세미나에서는 엄청 충격을 받았었다.
왜? 같은 사상을 뿌리로 하는데도 서로 생각과 실천 방법론이 다를까? 헌데 서로 같은 게 아니라는 거를 사
실을 늦게, 아주 늦게 알았다.
그리고 나는 5.18 항쟁 후 나도 모르게 민족주의에 깊게 빠지는 과정에서 갑오동학과 전봉준 장군 이야기를, 우리 할머니가 불렀던 ‘새야 새야’라는 노래를 기억하였다. 너도 알지? 다시 한번 불러 보고 싶은 노래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우리 논에 앉지마라
새야새야 파랑새야 우리 밭에 앉지마라
아랫녘새는 아래로 가고 위녘새는 위로 가고
우리 논에 앉지마라 우리 논에 앉지마라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손톱발톱 다 닳는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우리 밭에 앉지마라

이런 상황에서 '찾아가는 선교'의 한계를 넘고자 시작한 ‘한마음조합’은 뭘 할 수 있는가?
한마음조합 결성 때 결의한 대로 공부하면서 실천하는 공동체로 가는 공부와 공동체실천에 노력하자고 했다. 그리
고 우리는 주말마다 한 주간 있었던 다양한 현장(동네) 현황을 이야기하면서 공부하는 학습모임도 했다.
그때 가장 멋지게 날렸던 게 전에 이야기 했던 ‘구원의 빛’과 ‘노동자의 길잡이’였단다.
조합원들은 불쌍해서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점점 노동자도 연대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꿈 같지 않은 꿈을, 고개를 갸웃둥 하면서도, 슬슬 꾸기 시작한 것 같았다. 우리들이 그런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분명했다.
우리가 공부하던 학습교재는 사회 문제를 그려 놓고, 그것을 보고 질문하고 해설하는 형식의 내용으로 꾸려져서, 공부하기에 참 좋았다. 예를 들면, 수도꼭지가 틀어져서 물이 계속 나와 차고 넘치는데 사회의 권력자, 종교지도자, 자본가는 물만 퍼내는 것이다. 어린 아이까지 "왜? 어른들이 저 수도꼭지를 잠 가서 물을 멈추지 않을까?" 하면서 의문을 품는 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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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번 이야기한 79년 한국 방문때 최 한배 동지가 준 책이다.]

학습조는 몇 날을 열띤 토론으로 밤을 새고, 치열함으로 날을 새는 게 빈번했다. 많은 시간을 보낸 후 우리는 서로 제안서를 만들어 이야기하자고 했다.
학습조는 한마음조합이 처음 만들어질 때 했던 결의를 다지고자 했다. 현재 동포 현장 상황에 대한 수집을 최대한 많이 하고, 현장 실천 사업을 만들어 보자는 논의 끝에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한마음조합의 강화와 대중성 확보를 위한 사업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공동체 생활 경험을 위한 공동농사 : 발트롭 농장주가 밭을 그냥 임대해 주겠다고 하니 시작합시다.
-가래떡 기계를 보흠(Bochum)교회 집사님이 싸게 넘겨준다고 하니 사서 재정사업을 시작합시다.
-손주들 키우러 오신 어머님들이 많은데 ‘경로잔치’ 사업으로 동포사회 대중속으로 갑시다.
-한마음조합을 공동체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가능한 공동으로 휴가를 함께 갑시다.

한마음 조합원들은 그 빨간 배경의 살인마 전두환을 기억하며 광주의 오월항쟁을 정신을 계승 실천으로 뭔가는 해야 할 것만 같았다.

81년 한마음조합 여름휴가 캠프
이런 조합원들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우리는 1981년 여름휴가 캠프를 추진하였단다.
여행사를 통해서 네덜란드 북해의 브레스켄스에 팬션이 저렴하기에 그곳으로 가기로 였다. 벨기에와 네덜란드 국경지역이었단다.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인데도 많은 조합원들이 참석하여 1981년 여름 우리는 신났다.

독일에 와서 7년만에 처음 휴가를 갔다. 그 동안은 휴가가 6주나 되었으나 그냥 집에서 보냈단다. 모두가 장기 체류가 불투명해 그저 열심히 일만 했던 것이다.
 
헌데 니가 커서 유치원 다니는 걸 보고 휴가를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마침 한마음조합에서 추진한 여름 휴가캠프에 참여한 것이다. 물론 엄마와 아빠가 너희들은 데리고 휴가를 갈 수 있는 경제적 조건도 만들어졌던 것이다.
74년 파독 광부로 와서 천사같은 너희들 엄마를 만나 결혼하여, 가정도 이루고, 너와 훈이를 갖게 되니 아빠는 가난했던 시절 꿈꾸었던 소원이 다 이루어져 버린 셈이 됐다.

복흠(Bochum)에서 네덜란드 북해를 향하여 약 300km 정도 달린 후, 큰 배에 차를 싣고 바다를 건너서 제1회 한마음조합 여름캠프 장소인 네덜란드 브레스켄스에 도착했다. 모두들 함성이었다. 커다란 배를 타고 북해를 지나는 기분은 너무 신났다. 아빠는 솔직히 그때 휴가도, 큰 배를 타는 것도 처음이었다. 아마 조합원들 다 똑 같았을 거다. 또 20여 명이 함께 휴가를 즐기는 일도 처음이어서 너무 좋았다.
날씨는 그리 좋지 않았으나 그 동안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해온 것들이 있어서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 되었으며, 날씨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휴가를 즐기면서 동시에 우리 조합의 주요한 과제와 여러 사소한 문제를 함께 열린 공간에서 토론할 기회가 만들어진 것이 너무 잘 됐다고들 생각했다.

모두 공동체가 되어 함께 준비하고, 나누면서 한마음조합의 미래를 설계하는 꿈을 꾸었단다. 교회도 같은 데 다니지, 주말 농사도, 떡도 함께 생산하고 팔지, 이러다 보니 우리 조합원들은 공동체 생활을 느꼈던 거 같다.
우리는 그렇게 늘 함께 실천하는 체험을 통해서 특별한 사이가 돼버렸으니 처음 가는 여름휴가 캠프가 신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참 그리고 네 동생 훈이가 돌이 지났는데도 혼자 걷지를 못했는데 휴가지에서 드디어 걷기 시작해서 우리를 너무 즐겁게 만들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에서 총 맞아 죽으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재독 동포사회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서있었던 유학생들이 귀국을 했다. 하지만 광주민중항쟁 후 동포사회는 침묵의 늪으로 빠진 듯했다. 유신독재 시절보다 더 참혹한 학살을 지켜본 동포들은 몸을 움추렸고, 소수 활동가들만이 베를린, 프랑크푸르, 루르 지역에서 열심이 뛰었다.
70년대까지는 체류권 투쟁을 했지만, 이제 장기 체류가 가능해지자 조금은 안정적인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한마음조합의 조합원들도 장기 체류자가 대부분이어서 장기적 실천사업을 고민하며 공개적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1981년 한마음조합의 휴가를 이용한 일주일간 공동체훈련을 여름휴가 캠프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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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음조합 활동과 떡기계 구입

주일 예배를 보고 나오는데 강상구 집사님(후에 이 분은 미국으로 가서 목사님이 되었다고 하더라)이 "최형!" 하고 불러서 가봤다. 그는 "한마음조합이 떡 장사를 하면 어떨까?" 하고 내게 물었다. 떡 장사를 하려고 한국에서 가래떡 기계를 사왔는데 혼자 할 수 없고, 자기 사정도 변해서 한마음조합에서 구입한다면 반값에 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나는 조합원들과 이 제안을 놓고 상의를 했다. 한데 문제는 그 반값의 돈이었다. 기계 값이 3,000마르크 였는데 당시 노동자들의 두 달 봉급이었단다. 이제 막 정착해 가는 중인 조합원들한테는 부담이 되는 금액이었다. 헌데 에발트광산에서 일하는 윤형이 우리들의 고민을 듣고는 그 돈 전액을 이자 없이 빌려줄 테니 한 번 해보라면서 돈을 내놓았다.

그 윤형은 다름 아닌 79년도 파독광부 체류권 투쟁을 중심에서 했던 분인데 조합원은 아니었단다. 헌데 그 돈은 지하 1200m 광산에서 탄을 캐다가 사고로 척추를 다쳐서 1년 넘게 치료를 받으면서 고생 한 후 밀린 봉급으로 6,000마르크를 받았는데 그 중에서 반을 우리에게 빌려준 것이었다.
떡 기계 공장은 복흠시 오버달하우젠(Oberdahlhausen) 독일인의 집 지하실에 있었다. 마침 가을이어서 바로 가래떡을 만들어서 주말이면 광산기숙사, 지역교회, 한인들의 행사장 등을 떡보따리를 들고 다니며 팔았다. 그때는 가래떡이 흔하지 않기도 했지만 조합원들의 적극적인 판매 활동으로 소문이 나서 장사가 잘 되었단다. 떡 빼는 일은 무척 덥고, 많은 손이 필요했다. 그래도 조합원들은 공동 노동을 해서 가래떡을 생산하는 과정이 즐겁고 신도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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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농사

어느 날 우리가 김장거리 심을 밭을 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교우 한 분이 발트롭에 아는 독일 농장주가 무상으로 밭을 임대해 준다고 하니 가보자고 해서 조합원 몇 명과 함께 갔다. 거리가 좀 멀긴 했지만 농장 주인이 너무 친절했다.
독일인 농장주는 무상으로 임대를 해주면서 또 트랙터가 있으니 밭도 갈아주겠다며, "뭘 심겠냐"고 묻더라. 우리가 "독일에는 없는 한국 무우, 대파, 쪽파, 열무 등등 한국에서 씨앗을 가져와 심겠다"고 했더니 그런 작물들에 대해 궁금해 하는 거 같았다.
땅이 있는데 우리가 농사 짓겠다니까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곳 농협은 시장을 콘트롤하고, 땅은 국가에서 필요한 만큼 임대해 주는 것 같았다. 김장농사를 위해 여러 통로를 통해서 씨앗을 구해서 주말에 밭으로 가서 열무, 대파 등을 심었다.
주말만 되면 조합원들은 뿌린 씨앗이 어떻게 되었을까, 궁굼해서 밭으로 가서 김도 매고, 솎아주기도 하니 마치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시절이 생각났단다. 언제부터인가 주말이면 '할머니'들이 오셨는데 농사짓는 우리를 보고 혀를 차며 웃으셨단다. 밭농사의 전문가들인 할머니들 눈에는 우리가 농사짓는 게 소꿉놀이 하는 것처럼 보였던 거다.
웬 할머니들이냐고? 독일 정착이 보장되자 파독 한인들은 아이들을 낳기 시작했는데, 거의가 맞벌이 여서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지자 이집 저집에서 고향에 있는 어머님들을 모셔왔다. 아빠도 할머니가 한 약속을 지켜줄 거라고 생각하고 큰집에 연락했더니 약속대로 할머니가 독일로 오셨다. 종자를 키워 주시겠다고 말이다.
이렇게 오신 할머니들의 독일 생활은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이었단다. 아빠와 엄마는 교대근무라서 함께 할 시간도 별로 없었고, 텔레비전을 켜도 알아들을 수 없으니 재미도 없고, 애기를 업고 밖으로 나가려 해도 길도 모르고, 말도 안 통하니 혼자 다닐 수가 없었단다.
이방인들을 접해 보지 못한 네 할머니는 코 큰 사람들 보는 게 무척 겁난다고 하셨단다. 그러나 니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할머니는 신이 나셨다. 너를 대동하고 나갈 수 있었으니까. 이런 할머니들이 같은 한국인들끼리 모여서 농사짓고, 같은 처지에 있는 할머니들도 만날 수 있고 하니 얼마나 좋았겠냐?
할머니들은 주말을 손꼽아 기다리셨다. 그 덕분에 한마음조합 농사도 아주 잘 됐다.
그해 첫 농사 결과 대파는 잘됐는데 무는 토양이 맞지 않아서인지 벌레 먹고 형편이 없었다. 그래도 할머니들과 우리가 지은 첫 농사라 좀 나은 것들은 추리고, 배추는 농장주인 것을 받아서 염가로 팔기도 하면서 김장 장사를 했단다. 재정사업에 도움이 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온 가족들이 모여서 함께 일하면서 신나는 공동체가 굳건해진 한 해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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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께 일하고 조금씩 준비한 음식으로 들밥이 꿀맛이었다.]


그동안 한마음조합은 토요강좌를 진행하고, 학습도 진행했는데 교재가 <노동의 역사> 등으로 노동운동과 연관된 책으로 중심이 옮겨졌다. 물론 아주아주 조용하게 열심히 했단다.

81년 12월 31일. 우리 집 거실에서 한마음조합 전체회의와 송년잔치를 가지면서 82년 사업을 논의했는데 공개적 사업으로 경로잔치를 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내부적으로는 ‘한마음’이라는 조합지를 발행 하자고도 했다. 조합이 그동안 가래떡과 김장 판매 사업으로 동포사회에 떡 조합이라는 애칭까지 얻을 정도 인정을 받았으니 더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경로사업을 하자는 의견에 동의했다. 한마음 조합지는 조합원들이 공부하거나 경험하거나 꿈꾸는 이야기들을 모아보기로 했다. 이렇게 82년을 맞이하였단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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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님의 댓글

초롱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연재 다시 시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간 기다렸어요. 뜻있는 일 하시느라 바쁘신 줄 알아서 재촉은 못 드렸지만... 노동의 역사를 직접 겪으신 분에게서 듣을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건강 유의하시고 좋은 글 계속해서 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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