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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은 파독광부가 독일땅에 온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63년 파독광부 1진이 독일에 도착하면서 재독동포사회가 시작되었고, 전세계 동포사회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독광부분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셨지만 정작 개인적으로는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고생도 많으셨을 겁니다.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어찌 몇마디 필설로 다하겠습니까만 파독광부분들중에 몇분이 독일땅에 와서 겪은 체험을 여기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파독광부의 삶은 그 자체가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러니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어렵게 글을 써가실 때, 서투른 점이 있더라도 많은 성원 바랍니다. 

김재승칼럼 어머님 죄송합니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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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4,472회 작성일 14-02-03 09:47

본문

한의원은 그런대로 운영된다. 찾아온 환자들에게 성의를 다해서 치료를 해준 덕분인지 치유 율도 80%이상 된다는 생각을 한다. 동양의학은 근본을 치료를 해야만 그 병 때문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증상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치료하는 시간은 좀 걸리지만 몇 십 년을 안고 살았던 만성병을 치료하고 나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힘이 난다.

원인은 하나인데 그 병 때문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증상들 때문에 여러 가지 약을 하루에도 몇 번씩 복용하는 환자들을 많이 보았다. 먹는 약이 많기 때문에 목록을 작성해서 약을 복용하는 환자들도 많이 보았다. 내원하여 치료를 받은 환자들 중, 원인이 되는 병이 치료가 되어 여러 가지 약을 한꺼번에 끊는 환자들을 많이 보아왔다.

현재 우리들은 현대의학 축복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근본적인 치료방법은 아직도 아쉬운 점이 많다. 독일에서 법적으로  변호사와 의료계는 광고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도 개원을 알리는 광고와 휴가를 알리는 광고만 할 수 있어서 나도 광고는 하지 않지만 불치병이라고 포기했던 환자들이 본인의 만성병을 치료를 하고 나서 주위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면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환자들로 그런대로 운영되어 가고 있다. 가끔 치료를 받아도 병이 호전되지 않은 환자들 때문에 속상해하는 나를 보고 오히려 환자들이 나를 위로를 한다. “내 병은 치유되지 못했지만 당신이 성의껏 노력했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워낙 오래된 질병이니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라고 말한다.

우리한테 오는 환자들은 치료비를 본인이 부담해야 되기 때문에 치료비를 부담해주는 사 보험 가입자나 불치병이라며 현대의학에 치료를 포기한 환자들만 여기가 마지막 희망이라고 하면서 찾아온다. 이곳 유럽엔 아직 동양의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내원하기를 망설이지만 내가 마술을 한다고 할 정도로 신기한 효과를 본 사람들에 의해 입소문이 나는 것이다.

간질이나 뇌종양, 만성대장염, , 중풍후유증, 정신병, 불임증 등 현대의학에서는 포기한  환자들이 치료가 되니 먼데서는 스웨덴, 러시아나 아르메니아, 크로아티아 같은 곳에서 찾아오는 환자들도 있다.  나한테서 뇌종양과 간질 치료를 받고 완치된 환자들이 크로아티아 수도인 차그렙(Zagreb)에 사는데, 크로아티아 휴가를 가면 그 사람들의 부탁으로 차그렙에 가서 며칠 머물고는 한다. 한번은 그곳으로 찾아온 환자들이 나를 보자 치료를 잘 한다고 해서 중국무술영화에서 본 머리와 수염이 하얀 할아버지인줄 알았는데 젊다는 이야기해서 한바탕 웃은 적도 있다.

우리가 휴가로 보내고 있는 크로아티아 아드리아 해변가 아파트까지 찾아오는 환자들이 있어서 우리가 여행을 온 것인지 치료를 하러 온지 구분이 안 될 때도 있지만 우리를 만나고 나서 고마워하는 모습들이 우리에겐 위안이 되곤 한다. 지금은 몇 년 째 그곳으로 여행을 가지 못하자 그곳 사람들이 언제 오느냐고 성화다. 한 환자 가정은 언제든지 아드리아로 휴가오고 싶으면 오라며 본인들의 소유인 해변 아파트 키를 맡겨 지금도 그 키를 가지고 있다. 가깝게는 홀란드나 벨기에서 복흠으로 치료를 받기위해  매 주 몇 백 Km를 달려오는 환자들을 보면 성심을 다 할 수밖에 없다. 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조금 전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2명의 환자가 항공편으로 오겠다며 다음 주 월요일로 내원 약속을 했다.

북한 동포들을 치료한 경험도 있다. 몇 년 전 여기 Frankfurt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북한 서커스 단원들이 공연을 한 적이 있었다. 세계 시합에서 1등을 한 서커스단이다. 매일 공연을 마치고 나면 허리를 다치거나 무릎이 아파서 찾아오면 단원들이 4-5명씩 되었다.

몸이 아프다고 다음 공연을 안 할 수 없기 때문에 침을 맞고 나서 다음날 다시 공연을 하곤 했다. 효과가 좋았던지 매일 더 많은 공연단 동포들이 찾아온다. 꼭 지도원?의 안내를 받고 찾아온 이들은 한의원 안에서도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하루는 그네를 뛰는 단원이 같이 인솔해서 오기 전에 혼자 찾아와 치료를 받고 나서 지도원에게 혼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치료를 무료로 해주었는데 인솔한 지도원이 자기 단원들은 홀란드 사람이 서커스단을 사서 이곳에서 공연을 하기 때문에 치료비는 자기네들이 내는 것이 아니고 홀란드 주주가 내니 치료비를 받으라고 이야기를 해서 치료비를 받았다. 단원을 인솔한 지도원은 영수증은 치료비보다 더 많은 액수를 원하면서 북한으로 가면서 가지고 갈 약품들을 사달라는 부탁을 해서 우리 환자 중 이곳 약사가 있어서 그분을 통해 많은 약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 서커스가 끝날 무렵, 널을 뛰며 재주를 부린 한 여자 분은 안내자와 동료들이 인사를 하고 한의원을 나간 다음 일행들의 눈을 피해 도와줘서 고맙다며 여기 Kiosk에서 파는 손가락 크기만 한 Underberg 술을 한 병 카운터 놓고 빨리 뒤따라 나갔다. 마음이 고마웠다. 중국 연변의 북한 식당을 가서도 느낀 것이지만 남북한 서민들은 다 선량할 한 민족이며 통일 갈망한다. 한데 왜 통일은 되지 않는 것일까? 만일 남북한 정치인들이 국민을 위한 진실한 정치를 했다면 지금까지  통일되지 않은 분단국가로 남아 있을까를 생각해본다.

 

주말을 이용해 의료봉사도 하고 있다. 여기서 350km가 떨어진 유럽에서 제일 오래된 Regensburg이라는 도시에 2개월에 한번 씩 내려가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의료봉사도 하고 있다.

처음에는 금요일 Bochum에서 환자를 보고 250km 떨어진 집으로 내려와, 준비를 해서 저녁10시경 Regensburg으로 출발을 한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자동차로 3시간 반 거리지만 늦게라도 그곳의 호텔에 가서 잠을 자야 이튿날 아침부터 환자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힘들지만 내가 찾아가면 좋아할 그곳 사람들을 생각하니 힘든 줄도 모른다.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이렇게 새벽에  내려간다면 오히려 못할 것 같은 생각을 하면서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면서 얻어지는 기쁨의 힘을 느끼곤 한다. 요즈음은 아내 없이 혼자서 아침 일찍 열차를 타고 내려고 저녁까지 봉사를 마치고 새벽열차로 집에 오곤 한다. SaarlandDilingen, 홀란드 Breda, 북독일의Wilhelmshaven등 환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 주말을 이용해 찾아다닌 환자들도 참 많다.

 

의술을 계속 배우고 나름대로 연구하는 것도 중단하지 않는다.

한의학을 전공하고 Heilpraktiker자격증이 있다고 해서 치료를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 배우고 실습을 했다고는 하지만 미미하고 이론이 위주다. 치료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본인의 경험이 제일 중요하다. 지금이야 환자가 오면 차분하고 자신 있게 대할 수 있지만 처음엔 무엇을 먼저 해야 되는지 모르고 당황하곤 했다. 여기서 한의원을 처음 시작한 나는 선배들의 조언이나 어려운 환자가 있을 때 문의할 곳이 없다는 것이 제일 큰 어려움이었다. 배울만한 곳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분의  양해를 얻어서 치료경험이나 치료 방법 등을 배우고, 한국에도 내가 필요한 치료방법에 대한 강의라고 생각되면 찾아가 강의에 참석하고는 했다. 물론 어렵게 배운 치료방법이나 비방이라고 하는 것들이 전부 나에게 유익한 것만은 아니지만 우선 배운 다음 내 것을 만들든지 버리든지 하는 것은 내 몫이다.

한약을 원료로 해서 주사약을 만드는 방법을 설명해 놓은 얇은 책을 저자를 만나 직접 구입하는데45만원을 주고 사올 때와 비방참법 배운다고 10시간 강의를 받기 위해  120만원을 바쳐야 될 때는  “아무리 비방이라 하지만 이것은 의술의 전파가 아니고 완전히 돈벌이만을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에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한번은 <대통령 각하 암을 정복했습니다. 라는 책을 쓴 저자가 스페인에서 의료행위를 하고 있다고 해서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그분이 운영하고 있는 진료소를 찾아간 적이 있다. 마드리드에서 치료행위를 하고 있는 그분을 찾아보기 위해1주일 호텔을 예약해 놓고 아내와 같이 찾아가 그분이 치료하는 것을 견학하고 그분이 만들어 놓은 암 치료제라는 주사약을 몇 천 유로를 주고 사오고, 다음에는 그분을 이곳으로 초청해서 환자들을 모아 치료를 시켜본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위험한 짓이었는지 모른다. 하도나 자신있어하고 환자를 치료한 경험담을 설명하기에 배우고자하는 욕심과 불치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도 도움을 주고 싶은 욕심에 한 행동이다. 나나 그분이 법을 위반한 행위를 한 것은 그 다음문제이고 그분이 말 한데로 효과가 없으니 나를 믿고 찾아온 환자들에게 괜히 피해만 주지 안했나 하는 생각 때문에 괜한 짓을 했구나 하는 생각을 지금도 하고 있다.

후에 나도 스스로 연구하고 원칙을 장악을 한 후 암 환자들을 치료를 해서 6-7명의 한자들을 치료를 한 예가 있는데 결국은 치료방법은 본인이 터득하고 경험을 해서 내 것으로 완전히 만들어야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곳 교민들을 위해서 발행되는 신문지상에 건강에 대한 글도 몇 년 연재를 했더니 여기저기 한인 단체들이 건강세미나도 요청을 한다. Laptop Baemer를 준비해서 성심껏 쫓아다녔다. 먼 거리라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찾아가자 하는 신념으로 독일 내에서 아무리 먼 곳이라도 찾아다니곤 한다. 한인회, 간호사회, 광부출신들의 친목단체, Senioren 단체들이 요청을 하면 단체 성격에 맞게 준비를 해서 세미나를 마치면 다들 좋아하는 모습들을 보면 나도 기쁨이 있다.

나는 원래 글을 쓰는 재주가 없는 사람이라 처음에 이곳  OOOO 신문이 원고 요청이 할 때는 사양을 했었다. 나 같은 사람의 글을 누가 글이라고 하겠느냐 생각하면서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신문사 발행인이 여러 번 다시 부탁을 한다. 혹시 한 사람에게라도 내가 쓰는 글이 도움이 된다면 하는 생각에서 시작해서 2년 동안 글을 써보니 나도 솜씨도 느는 것 같고 독자들의 반응도 좋을 것 같아서 다음에는 이곳 OO신문 요청을 받아드려 2년 동안 다시 연재를 하고 나니 이곳 동포들의 반응이 좋았음을 느꼈다. 종종 전화로 글을 잘 읽고 있다고 연락을 하는 동포가 있는가하면 2년 동안 연재를 하고 마감을 하자 북독일 에 사는 한 독자는 잘 좋은 글을 더 못 읽게 되어 서운하다며 그동안 글에 감사하다는 엽서를 보내오곤 했다. 교포들의 모임에 가면 신문에 연재되었던 글들을 전부 스크랩해서 모아놓고 있다는 독자들이 많아서 참 흐뭇하기도 했다.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다시 원고를 부탁하는 신문사도 있으니 다시 시작해 볼까 한다.   

 

이런 의술을 고향에서 가서 고향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은 지금도 하고 있다.  한국에 휴가를 가 시골에서 머무를 때면 소문을 듣고 찾아온 시골 이웃들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할 지경이다.

밤중이고 새벽이고 관여치 않고 찾아와 아픔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귀찮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치료해 주고나면 이렇게 오래된 고질병이 나았다며 좋아하는 모습들을 보면 뿌듯한 마음이 생긴다. 종종 독일 가면서 꼭 가지고 가라며 참기름이나 꿀을 병에 넣어 가져오고 한의사니 약재가 필요할 거라며 산에서 채취한 엄나무 같은 것을 가져 온다. 받고 싶지 않지만 서운해 하는 모습 때문에 감사하다며 받아놓고 시골집에 놓고 오곤 했다. 시골뿐이 아니고 서울에 있어도 마찬가지다. 내가 머무르고 있는 동생 집이나 친척집에 환자들이 찾아와 그 집 식구들에게 내가  미안할 정도다. 허지만 몰려드는 환자들을 몰라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여기서 사용하는 침은 한국에서 사다 쓰는데 한국에 다니러 갈 때는 우선 침을 구입하기 전에 사용하려고 여기서 침을 한통씩 가지고 나간다.

 

허지만 요즈음은 나의 고향인 시골에는 찾아가지 않는다.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워 찾아갈 수가 없다. 동생이 저지른 일 때문에 어머님이 고향에서 쫓겨 나오다 시피 나와 버린 뒤엔 고향을 찾아가지 않는다. 문중 산에 있는 조상들의 산소를 찾아갈 때는 마을로 지나가지 않고 먼 곳으로 돌아서 성묘만 하고 나와 버리고는 한다.

내가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우리집안에서 일어난 일들 때문에 내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는 것이다. 몇 년 전에는 마을 이장께 연락을 해서 마을 앞에서 만나 마을 어르신들 식사나 한 끼 하시라고 하면서 금일봉을 좀 전하고 온 일은 있다.

작은 아버지 한분이 시골 면소재지에서 생활하고 계시기 때문에 한 번씩 찾아가 뵐 때도 고향인 우리 마을은 그냥 지나치곤 한다.

사람들이 고향은 평생 가슴에 안고 사는 모양이다. 지금도 꿈을 꿀 때면 유년시절 내가 자랐던 그 시골 오두막집이 무대가 된다. 없이 살았지만 추억이 묻어나는 곳, 방한 칸에서 한 가족이 먹고 자고 했던 불편하기 짝이 없는 집이었지만 추억의 고향이기에 꿈속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이다. 허지만 그곳이 갈 수가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을 하면 서글픈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면 들 수롤 가능하면 한국으로 돌아가 어머님 모시고 살아야지 하는 계획도 세워봤는데.

한국을 한 번씩 찾아가서 동생들과 함께 할 때면 오빠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동생들이 내가 누워있는 옆으로 와서 “나 오빠하고 같이 자야지.” 하면서 내 팔을 베고 누운 것을 볼 때는 내가 얼마나 아들 노릇, 오빠노릇을 못하고 사는 가를 실감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한국에 나가서 살고 싶은 생각 때문에 한국에다가 조그마한 거처를 마련하자고 아내와 의견을 모았다. 한국에 계시는 처남에게 부탁을 해서 용인에 아파트를 하나 구입하기로 했다. 몰론 은행에서 융자를 얻고 전세를 안고 사는 아파트라 금전적인 큰 부담은 없지만 집 가지고 혼 줄이 난 우리들이라 한국에 집을 산다는 것은 망설여졌지만 우선 완전 귀국은 하지 안한다 해도 한국을 오가며 거처할 용인에 아파트를 하나 구입하기로 했다.   우리는 독일 여권을 가지고 있기에 행정처리가 복잡했지만 한국에서 거주하는 외국인을 위해서 발급되는 F-4 거소 증을 만들어 아파트를 하나 구입할 수가 있었다. 

내가 구입한 아파트 서류정리를 하려고 한국에 다니러 갈 있을 때 좋아하시는 어머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제는 지금까지 소원이셨던 아들과 며느리와 같이 살게 되나보다 하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완전히 귀국은 못해도 내가 65살이 되어 독일 정부에서 연금을 타면 한국을 오가며 어머님을 모실 수 있지 않을까 한 생각을 한 것이다.

어머님뿐이 아니고 동생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좋아하는 분위기다. 오빠가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는 것이다.  내가 다시 출국할 때 공항으로 전송을 나온 동생들이 오빠가 한국에 와서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자기들은 든든하다는 말을 하면서 눈물을 머금는 모습에 평생을 가정에 장남 노릇을 못하고 사는 것 같아서 마안한 생각만 앞섰다.

전세를 끼고 산 거처지만 전세금만 갚으면 한국에 나가서 지낼 수 있는 공간은 마련한 셈이다.

 

이런 생각하면서 계획을 세워나가는데 어머님 비보가 들려온 것이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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