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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은 파독광부가 독일땅에 온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63년 파독광부 1진이 독일에 도착하면서 재독동포사회가 시작되었고, 전세계 동포사회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독광부분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셨지만 정작 개인적으로는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고생도 많으셨을 겁니다.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어찌 몇마디 필설로 다하겠습니까만 파독광부분들중에 몇분이 독일땅에 와서 겪은 체험을 여기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파독광부의 삶은 그 자체가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러니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어렵게 글을 써가실 때, 서투른 점이 있더라도 많은 성원 바랍니다. 

김재승칼럼 어머님 죄송합니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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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4,751회 작성일 13-12-11 09:58

본문

하나뿐인 아들과 같이 살아보는 것이 어머님의 소원이셨다.
직접적인 표현은 안하셔도 만날 때 마다 그런 눈치를 주신 어머님을 생각하면 “어머님 살아생전 짧은 기간이라도 같이 살아야 될 텐데!” 하는 생각을 늘 가지고 어머님에겐 항상 죄를 진 것 같은 부담을 안고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들의 조건이 그것을 허락지 않았다.
우리는 가끔 한국에 휴가를 나가면 짧은 시간이지만 어머님을 모시 며칠이라도 꼭 여행을 다녔다. 제주도, 남해, 울릉도와 독도 등. 이것이 그나마 라도 어머님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또 어딜 같이 가시자고 하면 싫어하지 않고 같이 나서는 어머님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또 가끔 시골 이웃 어르신들도 한번 씩 모시고 나가 일일 여행을 시켜 드리곤 했다. 미니버스를 빌려 모시고 나가 구경을 시켜드린 다음 점심과 저녁을 대접해 드리면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다. 사실 어머님 좀 잘 좀 봐달라는 부탁을 한 셈이다. 이웃사촌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어머님을 모시고 울릉도에 갔을 때다.
며칠을 호텔에서 머무르는데 호텔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장모님인줄 알았는데 어머님을 모시고 여행을 왔다며 “효자 났네, 효자 났어.” 하시며 우리에게 말한 모습이 현재 한국의 실상을 말하는 것 같아서 입맛이 씁쓸했다.
물론 어머님은 독일도 오셔서 1년 정도 계시다 가셨다.
여기서 계시는 동안 편하기는 하셨겠지만 말이 통하지 않고 할 일이 없는 이곳이 어머님에겐 지루하기만 하셨을 것이다. 
이곳에서 더 머무르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서 한국시골에서 혼자 생활하고 계시는데 4째 동생 식구들이 원해서 그들과 같이 생활하고 계신 것이다. 한국 살림을 다 정리하고 독일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생활하시자 는 제안도 당연히 거절이다.
혼자 활동하실 수만 있다면 마음 편하게 혼자 생활하시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또 내가 여기서 어머님과 같이 산다고 해도 그냥 생활이지 특별히 해드릴 일도 없어서 시골에서 사시게 했던 것이다. 헌데 어머님과 같이 살겠다고 시골에 와서 살고 있는 여동생이  사고를 친 것이다.
가끔 한 번씩 한국을 나가서 보면 시골집이 손볼 곳이 너무나 많다.
잠깐 가서 있는 동안이지만 눈에 빤히 보이는데 휴가랍시고 모른 척 할 수가 없다.
허물어 진 곳이 있으면 수리를 해 주어야 되고 어머님 혼자 하시는 일이 있으면 거들어 주지 않을 수 없다. 서울에서 시골에 내려가면서 일부러 고무부께서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트럭을 몰고 내려가 냇가에 나가 모래를 파오고 시멘트를 사들여 허물어만 가는 행랑 체나 마당 패인 곳. 넘어진 담벼락 같은 곳을 수리하려고 내가 혼자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있어도 그 집에서 살고 있는 4째의 남편인 매제는 점심때가 다 되어도 일어나지 않고 잠만 자는 것을 보면서 말은 안했지만 영 못마땅했다. 내가 힘들고 힘들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처럼 처남이 먼데서 휴가를 나와 자기가 잠을 자는 지붕위에서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누워 있을 수 있냐는 것이다. 하나만 봐도 열을 안다고 그 사람들의 생활을 빤히 내다 볼 수가 있었다. 그들의 어린 아이들 뒤치다꺼리도 어머님 몫이다.
고향에 금호타이어 공장이 들어서자 시골 아주머니나 아저씨 들이 공장에 출근을 많이 했는데 동생도 공장에 출근을 하는 관계로 그 가족들 살림까지 어머님이 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어머님은 외롭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힘겨워 하시는 모습을 볼 때 그들이 와서 같이 살면 어머님께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빗나갔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우리 작은 아이가 한국을 다녀오는 해다. 한국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시골집이 누구한테 넘어간 것 같단다.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전부는 못 알아들었지만 이해하기로는 집뿐이 아니고  조금 있는 논밭까지 누구한테 넘어갔다는 이야기다. 설마 했다. 사실 시골에 있는 집과 전답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전부 내 앞으로 이전이 되어있는데 나의 동의 없이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불가능 하지 않는가? 허지만 작은아이도 무슨 소릴 들었으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한국 큰 동생 집에 연락을 해 보았더니 모두 사실이다.
시골에서 살고 있는 동생네가 농협 돈이나 남의 돈을 빌려 쓰면서 보증을 어머님을 세우고 빌려 썼단다. 어머님뿐이 아니고 작은집이나 친척들도 몇 명이 같은 피해를 입었는데 내 앞으로 되어 있는 전답도 이미 어머님 앞으로 이전이 되어 있어서 집, 전답을 담보로 보증을 세웠다는 것이다. 어머님 말씀은 본인도 모르게 도장을 가져다 보증을 슨 것 같이 위조를 했다고 하지만 어머님이 보증을 서 준 것이 아닌가 싶단다.
집도 경매로 넘어가 어머님께서는 그 집에서 살지도 못하고 이사를 해야 될 형편이라며 모른 척 하고 있으란다. 문제는 그렇게 처리를 하고도 남은 빚이 많으니 숨죽이고 있어야지 내가 나섰다가는 잘못하면 나한테 까지 영향이 미친단다.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전부 털어서 빚잔치를 해야 된다니 억장이 무너진다. 아내 볼 낯짝도 없다. 지금까지 나름대로 노력했던 결과가  겨우 이것이었다는 말인가. 내가 어렸을 적부터 우리 집안 좀 남들처럼 살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 소원이었었는데 어머님이 살아가실 거처조차 없어져 버린 형편이 되었다.
여기서는 무슨 방법이 없다. 있어도 없는 척, 마무리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뿐이 없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뿐이 아니고 여동생들도 얼마씩 다들 피해를 입었단다.
이 와중에 내가 어머님을 중국으로 오시라고 한 것이다.
어머님과 아내, 그리고 나는 중국에서 몇 주 동안 집을 세를 얻어 머무르고 있었다.
집은 짧은 기간이라도 조선족 가족들에게 세를 얻을 수 있다. 그들은 그동안 다른 친척집이나 친구 집에서 머무르는데 우리가 주는 집세가 중국 수입으로 따지면 만만치 않기 때문에 잠깐이라도 그런 불편을 겪으면서 세를 놓은 것이다.
중국에서 머무르는 동안 평일에는 나는 학교로 가고  어머님과 아내는 그곳 조선족들을 시켜 여행을 시키면서 졸업식을 할 때 까지 보낼 계획이다.
시장에 가서 보면 물건 값이 싸기 때문에 어머님은 이것저것 사고 싶어 하신다. 시장에 가서 옷도 몇 벌 사 드리고 꼭 필요한 물건들은 한국으로 가지고 갈 만큼 구입을 해 드렸다.
돌아가실 때 수의를 만드신다며 삼베를 사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독일분교를 맡아서 책임 있게 운영을 한 나였기에 학교에서 교수님들도 어머님이나 아내에게 신경을 더 쓰는 모습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들덕분에 중국에서의 여행도 하고 아들과 같이 보낸 시간은 어머님께 꽤 좋은 시간이었던 같은 눈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들과 한집에서 살면서 며느리와 시장도 다니고 내가 저녁에 퇴근하면 같이 식사도 하면서 정말 나에게도 아들이 있다는 것을 느끼셨을 테니까.
그 시간도 잠깐, 모든 일정을 마치고 우리가 독일로 출발하기 전에 어머님을 먼저 한국으로 보내드려야 된다. 중국에서 마지막 날 저녁, 어머님이 시골에 그 집을 다시 사달라신다. 이대로는 낯부끄러워 도저히 시골에서 떠나지를 못하겠으니 그 집만 다시 사주면 어떻게든 시골에서 살고 싶으시단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 하느냐고 여쭈어 보지만 빚 청산은 다 되었으니 이제는 그 집을 다시 사주기만 하면 된단다. 믿기지 않은 소리였지만 지금까지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동네에서 자식 빚 때문에 그곳을 쫓겨서 나오실 어머님 입장이 이해도 갔다. 아내와 의논하고 그 집을 다시 사드리기로 하고 우리도 독일로 돌아왔다. 은행에 가서 융자를 얻어 집값을 어머님께 다시 송금을 시켜 드렸다. 제발 잘되기만을 빌면서.........
며칠 후에 바로 밑 여동생한테서 “왜, 어머님께 송금을 시켰나?” 며 전화가 왔다. 조용히 마무리 되어갈 판국에 나한테 온 돈 때문에 또 한 번 소란만 일어나고 어머님은 안산 다섯째 동생 집으로 우선 와 계시기로 했단다. 어머님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소란만 피우고 시골 집 한 채 값만 또 날아간 셈이다. 그 돈을 갚으려면 또 몇 년은 갚아야 된다. 정말 이제는 모른 척 하자. 도우려고 해도 도울 수 없는 것이 우리 처지인 것 같았다. 웃고 말자. 다 내가 걸어갈 길이라고 생각하고.
몇 주 후에 들은 이야기로는 어머님은 맨 몸으로 안산에 다섯째 집으로 오셔서 어린아이들을 돌보며 살고 계신단다. 이것도 내 운명이라고 받아드리자.
나는 연말에 중국으로 다시 들어가 2월까지  몇 개월 동안 머물면서 시험 준비를 하여 중국교육부에서 치루는 통일고시까지  무사히 마쳤다. 어렵기만 했던 학교를 무사히 마친 셈이다. 당당히 중의사, 한국의 한의사가 된 셈이다. 앞으로 무엇이 되든지 어려움이 많았던 학업을 마쳤다는 성취감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했다.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했던 옛날을 생각하며 지금이라도 학교를 마칠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허지만 앞으로 할 일도 많이 남아있다.
 
우선 독일로 돌아와 Bochum에  한약방 문을 열 준비를 했다. 독일에는 한약을 독일 약국에서만 취급하게 되어있는데, 독일에서 유일하게 NRW에서도 Ansberg지역에서만 한약방을 운영하는 것이 가능하다.
Bochum에 사는 한 독일인이 한약에 관심을 가지고 한약도매상을 개업하면서 몇 번의 법정싸움 끝에 한약을 가정에서 단약으로 사용할 수 있는 약초로 인정을 받아 개업을 하게 되었다. 한약 중에서도 독이 있다고 인정되는 것은 취급할 수가 없지만 독일어로 이름 지어진 한약들은 Freiverkäufliche Arzneimittel로 독일에 약사가 아니더라도 약초를 취급할 수가 있는 것이다. 먼저 IHK에서 실시하는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사설 학원을 다녀서 아내와 내가 약초취급 자격증을 따서 복흠에 약방을 개업했다. 
개업을 할 때쯤 한국 KBS“한민족리포트”라는 프로그람에서 취재를 나와 며칠을 머물면서 준비하는 과정까지 촬영을 해서 한국방송에 보도하고는 했다.

치료행위를 할 수 있는 한의원을 개원하고 싶지만 독일 의료법이 한국에 한의사나 중국에 중의사 자격증이 인정이 되지 않은 곳이다. 다시 말하면 한의사라는 제도가 없는 것이다.
의료법이 50년도에 개정된 법이라 문제가 있지만 아직도 개정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 법을 적용하고 있으니 모순이 많지만 우리 같은 서민들은 방법 없이 그 법을 따라야 한다.
독일은 한약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한 독일약사들이 한약을 취급할 수가 있으며 여기서 중의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중국에 가서 몇 주 침 교육을 받고 와서는 중의사라며 침술행위를 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내과 의사는 벽에 16시간 침구교육을 마쳤다는 증명서를 벽에 걸어놓고 침을 놓은 것을 보았다. 나더러 침을 맞게 놓고 있는지를 보아달라고 해서 가보았는데 한마디로 엉망이다. 허지만 환자 앞에서 잘못 놓고 있다는 말을 할 수 없지 않은가?
독일에서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단지 일반 의사나 Heilpraktiker 뿐이다. 나도 중국에서 중의학은 공부했지만 여기서 의료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여기 Heilpraktiker 자격증을 얻어야 된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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