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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승칼럼 어머님 죄송합니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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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11-27 09:18 조회4,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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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몇 번의 토의를 거쳐 지금은 분교 측과 행동을 같이 하지만 나중에 우리와 학업을 같이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자는 의견을 모으고 현재 분교와 행동을 달리 하기로 했다.
우선은 강의도 따로 하고,  학비는 우리 측 회계를 선출해서 따로 관리를 한 다음 본교에 직접 보내며 본교에 우리 애로사항을 보고하면서 운영권을 허가받기로 의견을 모았다.
우선 우리의 입장을 분교장에게 통보하고 우리 학생 중 시간이 허락하는 한사람을 중국본교로 출장을 보냈다. 현재 상황을 보고하고 우리 스스로 학교를 운영할 수 있도록  인정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서다.
강의는 중단하면 안 되니까 교수님께 양해을 얻어 양쪽에서 이루어 졌다. 당장 사단법인을 설립하기로 결정을 하고 발기총회를 거쳐 사단법인 회장을 내가 맡았다. 학교운영에 모든 책임을 내가 진 것이다. 본교를 다녀온 동료는 확실한 대답은 아니지만 학교에서도 분교장의 사람됨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여름방학 소집강의 때 양쪽이 다 본교에 와서 모든 것을 논의하자는 제안을 했다.”는 보고를 했다.
어느 정도 가능성은 안고 온 것이다. 그 동료가 며칠동안 고생해서 얻어온 좋은 결과다. 북경에서 학교가 위치한 연길까지 32시간 열차를 타고 오가며 먹지도 못하고 고생을 한 이야기는 한편의 소설과 같았다.
 
우리는 강의가 가능한 건물을 세를 얻어 사단법인 주소를 그곳으로 정하고 사단법인 등록을 서둘렀다. 발기총회 회의록을 독일어로 번역을 해서 공증변호사를 찾아가 등록을 요청했다. 등록은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반대쪽에서는 우리들에 대한 Negative공작을 많이 했지만 우리는 굴하지 않고 이곳의 사정과 우리들의 요청을  학교 측에 틈틈이 보고했다.
 
이곳에서 학교를 시작한지가 1년이 되고 드디어 본교에 6주 소집강의를 받으러 가야 되는 시간이 되었다. 그동안 「중의기초학」과 「진단학」, 「약학」과 「방제학」의 강의가 끝나고 본교 강의를 마치면 이곳에서 「침구학」을 시작해야 되는데 교수님들 초청문제가 있으니 모든 문제를 빨리 결정을 하고 방학후의 일정을 세워야 되는 형편이다. 
반대 측과는 항공편도 서로 다른 항공을 이용해서 중국에 도착했다. 우리는 이곳에 오셔서 「기초학」과 「진단학」강의를 마치고 돌아가신 교수님께서 북경까지 마중을 나와, 북경에서 몇 군데 관광까지 마치고 본교로 갈 수가 있었다.
학교에서 편의를 봐준 것이다. 본교에 도착하니 본교에는 한국유학생들이 많이 있어서 유학생 기숙사가 새로 건축되어 있었다. 우리는 우선 기숙사에서 자면서 식사는 학교식당에서 해결을 했다.
 
조선족 자치주라서 언어는 불편함이 없다. 연변주 당서기도 조선족, 대학장도 조선족, 어지간한 유지급 단체장들은 조선족들이 다 치지하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한국의 어느 한 소도시에 와있는 느낌이다. 시내 간판도 위에다가 한글로 먼저 표기를 하고 밑에 중국어로 표기를 한다. 물론 문화시설은 한국과 비할 수가 없었다. 2-30년은 뒤졌다고 할까? 생활환경도 좋지 않아서 기숙사 상수도에서는 물을 틀면 흙탕물이 그대로 나온다. 욕조에 물을 받아 놓았다가 하루  지나고 나서야 윗물만 떠서 사용할 수가 있다. 식당의 음료수도 정수기를 통해 끓여서 나오지만 흙탕물 색깔에다 흙탕물 냄새가 그대로 난다. 자연히 물은 사서 마시게 되는데 조그마한 물 한병 값이 맥주 값 보다 더 비싸디. 아니면 급수차가 물을 팔어 다니는데 시간을 맞추어 물통을 들고 나가 받아와야 된다. 교통시설이나 통신시설도 뒤져 있어서 불편하다.
공중전화를 한번 하려도 우체국까지 가야 된다. 거리에 전화기를 내다 놓고 전화를 하고 나면 돈을 받는 아주머니 들이 앉아 있지만 시내전화나 가능하고 한국이나 독일로 전화를 하려면 우체국까지 꼭 가야 된다.
허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각오했던 일이고 또 우리도 옛날에 한국에서 그런 생활을 해보았으니 큰 어려움은 아니다.
 
첫해의 본교 강의는 「인체해부학」과 「생리학」이란다. 우리는 강의는 분교 측 학생들과 같이 받아야 된다는 대에는 의견을 같이하고 양편이 같은 교실에서 강의를 받는다. 양편이라 하지만 분교장 측 학생들은 그동안 다들 포기하고 4-5명에 불과했다. 우리 편은 18명 사실상 우리 편이 유리한 셈이다.  중국에서는 독일과의 시간차와 무덥기만 한 더운 날씨 때문에 강의를 받으면서 6주를 생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목적이 있는 우리에겐 견디어 내는 길 밖에 없다.
학과 후에는 대표되는 학생들이 학교 간부들과 만나서 우리의 애로사항을 이야기 하고 그분들이 동조를 얻어내는 일도 중요하다.
지금 생각하면 학생이면서 독일 사단법인 대표로 학교간부들과 술자리도 참 많이 했던 것 같았다. 우리는 짬이 나는 대로 학교 간부들과 개인면담을 하고 학교 측과 학생들의 공청회를 통해 모든 문제는 학교 측의 결정에 따르기로 하고 강의는 계속 받았다.
드리어 본교 소집강의가 끝날 무렵 학교발표가 있는 날, 의학대학 학장님이 직접 나와 독일 분교 운영권을 우리에게 넘기겠다는 발표를 했다.
우리들의 학교 측에 전달한 내용들이 사실로 확인되고 우리들의 진심을 인정해 준 것이다.
본교에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가 졸업할 때까지는 분교를 운영 할 테니 우리만 잘 하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분교장편에서 행동을 같이했던 사람들도 원하면 우리와 같이 학업을 계속하도록 할 것임을 약속하고 모든 연락과 행정 처리는 나를 통해서 할 수 있도록 결정을 해 주었다. 나의 책임이 그만큼 더 무거워 진 것이다.   
학업을 계속할 수 있다는 안도감에 우리는 자축도 했었다.
중국물가는 독일에 비해서 워낙 저렴하니 매년 중국에 가는 문제는 항공료를 제외하고는 큰 부담이 되지 않아 다행이다. 물론 외에도 수업료, 교수님들을 위한 독일내의 숙소마련, 거주비, 오가는 항공표 부담이 있긴 하지만 중국에서의 생활비라도 저렴해서 그나마 다행인 것이다. 물가가 외국에 비해 워낙 저렴하기 때문에 중국내에서 외국인들에게 공식적으로 교통비나 호텔비, 그리고 음식 값도 2배가 넘게 받을 수 있도록 허가가 되어있다. 우리는 생활하면서 될 수 있으면  외국인 티를 내지 않고 다닌다. 한번은 주말에 장백산(백두산) 천지를 여행을 하기로 하고 학교 측의 배려로 학교 소유인 자동차를 몇 대 나누어 타고 학교에서 새벽에 출발해서 장백산을 간적이 있었다. 천지를 구경하고 내려와 다른 쪽 폭포수가 있는 밑으로 가면 온천에서 솟아난 물이 섭씨 70도가 넘어 상인들이 달걀을 그 물에 삶아서 파는데 1개에 중국 돈 1원이다. 학교 교무처장의 인솔로 가서 중국어로 계란을 달라고 하니 1원에 팔더니 우리끼리 한국말을 하니까 당장 3원씩을 내란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지만 물가가 워낙 싼 나라니 이해도 간다.
 
연변은 고국의 한과  영혼이 숨어있는 곳이다. 고대에는 부여와 북옥저, 고구려, 발해의 영역이었다, 그의 후손들인 조선족이 약 80만 명 정도가 살고 있으며 총인구 40%가 조선족으로 조선족 자치주이다. 이곳 연변자치주는 길림성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했던 흔적이나 한국적인 풍습을  한국보다  오히려 더 고이 간직하고 사는 곳이다.
초등학교부터 본인이 원하면 조선어로 공부를 하는 조선족 학교와 한(漢)족들이 공부하는 학교를 자기 마음대로 선정해서 다닐 수가 있다. 독일에서 몇 년 살았다고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잘 못 가르치는 우리들을 부끄럽게 하는 곳이다. 고국에서 견디지 못하고 만주로 피난 갔던 후예들이 대부분이다.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숨어서 살던 곳이기도 하다.
주말에 용정에 있는 혜란 강 옆 일송정에 올라가 “선구자”라는 노래를 합창을 할 때는 참 감개무량하다. 역사에 기록된 용정중학교, 윤동주 시인의 생가를 찾아다니며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시간도 우리에게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다니면서 집 모양만 봐도 그 집이 한족이 사는 집인지 조선족이 사는 집인지를 금방 알아볼 수 있다.
그만큼 연변에서 사는 조선족들은 우리말을 지키고 우리 문화를 간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 불리는 백두산 천지를 올라가 봐도 2/3가 중국 땅이란다. 사는 사람들과 풍습은 한국인데 땅은 중국에 속해버린 이곳을 보면서 누구의 잘못일까? 생각하며 선조들을 원망도 해 본다. 요즈음 남한과 북한의 악화된 관계를 보면서 만일 북한이 혼자 유지할 힘이 없어진다면 연변과 같이 중국에서 또 차지하려는 욕심을 내지 않을 까 하는 염려도 된다.
 
독일에 돌아와 모든 문제를 정리하고 나서 시작한 학업은 어려움 없이 계속되었다. 처음에 교수님 초청이 지연되어 몇 주 강의를 쉴 때는 중국에서 중의학과 현대의학을 전공하고 여기서 병원생활하고 있는 중국교수들을 초청해서 침구학이라도 열심히 배우면서 학업은 지속을 시켰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주말에는 강의, 다른 시간에는 분교운영에 대한 모든 서류준비와 본교와 연락을 하면서 강의를 위해 와 있는 교수님들 뒷바라지까지 해야되니 힘들었지만 무엇이든지 원하면 이루어진다. 라는 말이 실감 나듯이 그런대로 분교운영은 잘 되어 갔다.
그동안 열심히 했던 교회봉사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직장, 학교, 학교운영, 교수 뒷바라지, 이것이 나의 일과가 되었다. 처음엔 내가 학교를 시작한다고 하니 시큰둥하게 생각했던 주위사람들도 이제는 뭐가 좀 되어가나? 하는 시선들이다.
 
공부는 열심히 했다. 독일에서의 강의와 본교 소집 강의도 학생들 중에서 제일 공부를 열심히 하며 실력이 좋다는 인정도 받았다. 본교소집 강의 때 배운 중국어 시험을 보았는데 중국어 교수님이 나를 부른다. 내가 중국어 시험을 100점을 맞았는데 여기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도 이런 점수가 나오질 않아서 나에게 도저히 그 점수를 성적표에 올릴 수가 없으니 이해를 해달라는 것이다. 시험점수가 문제인가? 내 실력만 쌓으면 됐지! 하는 생각에 교수님 생각대로 하시라고 말하고 교무실을 나오면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왕 시작한 학업 열심히 하자.
 
본교를 오가며 시작한 학업이 어느 덧 5년이 지나 졸업을 한다. 운영상의 어려움과 가정적인 어려움들도 많았지만 5년이란 세월이 흘러 금년에 본교에 나가면 졸업식을 한다. 교육부에서 치루는 통일고시는 사실 지난 2월에 벌써 치렀어야 되는데 우리는 우리 1년 후배인 한국 유학생들과 내년 2월에 치르기로 계획이 잡혔다. 중국에서는 통일고시에 합격을 해야 졸업이 인정된 셈이어서 그해에는 우선 학교에서 주는 졸업장을 받고 이듬해 통일고시를 마치고 인정된 졸업장을 받기로 되어있다. 금년 말에 중국에 다시와  3개월 정도 머물면서 시험 준비를 해서 내년 2월에 시험을 치르기로 되어있는 것이다.
 
금년에는 마지막 여름방학을 이용한 소집강의에 참석하게 된다. 년 말에 다시 나갈 때는 오직 통일고시를 위한 보충수업이지 학업을 위한 소집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마지막인 셈이다. 이번에는 몇몇 동료들의 가족들도 같이 중국엘 간단다. 졸업식이 있으니 강의 끝날 무렵에 몇몇 가족이 중국으로 나오기로 되어있다. 아내도 병원에 휴가신청을 하고 다른 가족들과 같이 몇 주후에 오기로 되어있다. 난, 아내에게 “이번 기회에 어머님을 중국으로 한 번 모셔 여행을 시켜드리면 어쩌겠느냐?”며 의견을 물었다.  아내도 찬성이다. 한국에 연락해서 아내가 중국으로 오는 날짜를 맞추어 어머님을 중국으로 오시게 일정을 맞추어 놓고 나는 먼저 중국으로 들어갔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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