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의칼럼 검정밥(37)
페이지 정보
작성자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5,081회 작성일 13-11-24 11:25본문
당포의 추억
1997년 가을에는 지현이가 시집간다고 해서 고국에 들어갔다. 지현의 혼례식을 마친 후에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고향 부산으로 가려고 서울을 떠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부산으로 직접 가지 않고 김천에서 내려서 문경 가는 차를 탔다. 문경에서 동북쪽으로 당포라는 조그만 마을이 있다. 옛날 이 마을에 사촌누님이 시집와서 살고 계셨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조카들은 다들 부산에서 살고 있지만, 아버님이 별세하신 해에 내가 늦가을부터 서너 달 지냈던 추억이 남아있는 곳이기에 찾아가기로 했다.
당포 마을 앞에는 큰 개울이 흐르고 마을 뒤에는 하나의 반석으로 형성된 성주봉이 우뚝 솟아 있다. 나는 당포에 있을 때 성주봉에 자주 올라갔는데 하루는 그 산꼭대기에 나와 경아를 위하여 돌탑을 쌓았다. 내 키와 같이 높은 탑을 쌓고 그 속에 내 이름과 경아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마을에서 성주봉을 쳐다보면 봉우리 꼭대기에 서 있는 탑을 볼 수 있었다. 경아와 이별한 후 일년이 되었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경아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었다. 지난 일년동안 나는 경아를 잊기 위하여 몸부림치며 질서없이 이 여자 저 여자들을 사귀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헤어졌다. 그들을 경아에 비교하면 모두가 올챙이 같았다.
세월을 보내며 순간 순간 다시 타오르던 경아에 향한 그리움도 완전히 꺼버렸지만 우리는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오늘까지 자식을 가지고 행복한 생활을 하면서 환갑이 넘도록 살아왔어도 나는 경아를 내 마음속에서 완전히 잊지 못한 채 살고 있다. 나는 실제로 지금껏 하루도 경아를 잊은 적이 없다.
성주봉을 향하여 걸음을 걷는 내 눈앞에 경아의 모습이 티 없는 웃음을 머금고 나타났다. 나는 성주봉에 올라가서 그 탑을 헐고 경아의 행복을 빌면서 영원한 이별을 하고 싶었다. 마을을 벗어나 산길에 들어서서 성주봉 꼭대기에 올라가려면 약 삼십 미터나 되는 암반(巖盤)을 가로질러야 하는데, 이 암반을 가로질러 건너갈 수 있는 곳 바로 밑에 암반이 뚝 잘라져 절벽을 이루고 있고 그 절벽에는 산 제비들이 집을 짓고 살았다. 산 아래까지 가서 미끄러운 암반의 등을 타고 수십 미터의 절벽 위를 지나던 곳에 오니, 지금 나이에 보통 구두를 신고 도저히 건너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성주봉 아래 암반 곁 바위 위에 앉아 경아의 모습을 다시 한 번 그려보며 마음속으로 경아와 또 한 번 긴 이별을 한 후 발길을 산 아래로 돌렸다.
내가 누님 댁에 와서 지낼 때에 이 마을의 청년 손 군을 사귀게 되었다. 하루는 손 군이 천렵(川獵)을 가자고 했다. 동네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물에 고기를 잡으러 가는 사람들이 낚시도 그물도 없이 어른 머리통처럼 굵은 대장간 큰 망치와 소쿠리와 바구니를 들고 나섰다. 나는 고기를 손으로 잡을 것이냐? 망치로 때려 잡을 것이냐? 물었다. 손 군은 허허 웃으며 이 일에는 내가 부산 촌놈이니까 잠자코 보기만 하라고 했다.
우리는 동네 앞강에 왔다. 그들은 개울에 놓여 있는 바위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들고 온 망치로 바위를 내리쳤다. 쾅 하는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바위 아래에서 놀던 몇 마리 고기가 기절을 해서 배를 희뜩 뒤집고는 물 위에 떠올랐다. 나는 신기했다. 이렇게 고기를 잡는 법도 있구나 하며 손뼉을 쳤다.
송어, 메기, 뱀장어 등 고기들을 가지고 갔던 바구니에 가득 채웠다. 일년에 한번씩 동네 청년들이 하는 천렵이었다. 망치로 때려잡은 고기가 바구니에 가득 찼다. 우리는 바구니를 들고 강가 술집으로 갔다. 술집에서 끓여주던 그 국 맛이 지금도 내 입속에 맴도는 것 같았다.
며칠 후에 동네에서 청년들 모임이 있었다. 동네 청년들을 다 초대했기 때문에 손 군이 나를 데리고 갔다. 지난 천렵 때에 사귄 사람들이라 이제는 다 얼굴이 익었고 나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밤이 깊어지자 누가 닭이 먹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은 모든 사람의 귀에 당장 들어갔고 말없는 찬성이 눈짓으로 이루어졌다. 한 사람이 벌써 누런 유황 조각 같은 것을 가지고 왔다. 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 일어났다.
당포에서 문경 가는 길에 약 오리 떨어진 곳에 조그만 건너 마을이 있었다. 우리는 논두렁을 따라 그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 뒷산의 언덕바지를 따라서 조금 올라가니 사립문이 있는 아래채가 있는 농가가 보였다. 그 아래채가 닭장이라고 누가 나에게 귀띔을 해주었다. 앞에 가던 사람이 살그머니 사립문짝을 밀어열고는 우리더러 들어오라고 했다. 창으로 손전등 불을 켜서 들여다보니 많은 닭들이 장대에 올라가서 자고 있었다. 한 사람이 닭장 안으로 살금 들어가서 가지고 왔던 유황 조각에 불을 붙인 후 닭이 자고 있는 아래로 던졌다. 얼마 있지 않아서 자고 있던 닭들이 마취되어 장대에서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닭장 안에서 내어주는 닭을 한 마리씩 들고 우리는 그 집을 살금 나와서 당포로 다시 돌아왔다.
모두 열두 마리를 훔쳐왔다. 마구간 옆에 있는 쇠여물을 끓이는 큰 가마에 닭의 털을 뽑은 후 넣었다. 장작불을 집혀 놓고는 닭이 익을 때까지 방안에서 화투를 치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이와 동시에 닭장에서 유황의 냄새에 마취되어 떨어졌던 닭들이 정신이 들자 장대 위에 오르려고 푸드덕거리는 소리에 집주인이 잠에서 깨어났다. 닭장으로 가서 보니 닭 도둑이 들어왔던 것이 분명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직업적으로 하는 도둑이 아닌 것을 알아챘다. 도둑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더 많은 닭을 훔쳐갔지, 몇 마리만 가져갈 리가 없었다. 그는 틀림없이 이웃 마을 청년들의 장난이라고 여기고 당포로 올라가서 깊은 밤중에 아직 불이 켜진 집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마구간 옆에 있는 가마에는 닭 삶는 냄새가 나고, 방안에서는 청년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나왔다.
그는 솥 안에 든 닭들을 건져내어서 소쿠리에 담았다. 그 다음에는 마루 아래에 놓여 있던 우리의 신을 모조리 쓸어서 끓고 있는 가마에 넣어 던졌다. 솥뚜껑을 덮은 후에 닭이 든 소쿠리를 들고 숨소리를 죽이며 가만히 사립문을 벗어났다.
한참 화투를 치다가 누가 이제는 닭이 다 익었을 것이니 가지고 들어오라고 했다. 솥을 방으로 들고 오기 위해서 네 사람이 나갔다. 마루에서 섬돌에 내려선 사람들이 누가 신을 숨겼냐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우르르 나가서 보니 신이 없었다. 한 사람이 누가 장난치느라고 숨긴 것 같다고 하면서 닭을 먹고 난 후에 숨긴 사람을 잡아내자고 제안하니 그러자고 모두 찬성했다.
방 한복판에 솥을 놓을 수 있게 가마니를 깔고 네 명의 장정이 솥을 들고 들어와서 가마니 위에 내려놓았다. 누가 닭의 내장을 빼지 않아 냄새가 고약하다고 불평을 터뜨렸다. 아닌 게 아니라 솥뚜껑을 여니 솟아오르는 김과 함께 고약한 냄새가 온 방안에 퍼졌다. 이상하다고 하며 한 사람이 바가지를 넣어 닭을 퍼 올렸다. 바가지에는 올라오라는 닭은 보이지도 않고, 삶겨서 오그라진 구두가 들려 나왔다. 아무리 바가지를 뜨거운 물속에 넣어 휘저어도 비비 틀어지고 오그라지게 삶긴 신만 들어 있었지, 닭은 온데간데 없었다.
우리는 어처구니없어서 서로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도사(道士) 위에 도사 있다더니, 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닭 주인 같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대책을 강구했다. 우리가 닭을 훔쳤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신을 보상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지만, 도대체 누가 그런 장난을 했는지 알고 싶었다.
한 사람이 의견을 내었다. 내일 몇 사람이 그 집을 찾아가 우리가 닭을 훔쳤다고 실토를 하자. 만약 그가 우리의 신을 몽땅 망쳤다면 닭 값을 바라지 않을 것이고, 만약 그가 아니라면, 우리가 닭 값을 보상한 다음에 진짜 신 망친 놈을 잡아서 보상을 받기로 하자고 결정하고는 헤어졌다.
이튿날 손 군을 따라 나는 두서너 명의 동네 청년과 함께 건너마을 닭을 키우는 집으로 갔다. 싸리문에 들어서니 중년의 남자가 발을 헝겊으로 싸맨 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맞이했다. 우리는 직감적으로 그가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손 군이 능청스럽게 닭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없이 엉뚱하게 어찌하여 발을 다쳤느냐고 물었다. 집주인은 웃으면서 실토를 했다.
어젯밤에 닭들이 푸덕거리는 소리에 깨어서 닭장을 들여다보니 닭이 몇 마리 없는지라 이웃마을 청년들의 장난으로 생각하고 당포에 가니까 닭이 가마 안에 삶기고 있더라고 했다. 젊은 사람들의 놀이에 화를 내는 것보다 그도 장난으로 대답하자 생각하고는 우리의 신을 모조리 솥 안에 집어넣은 후 닭이 든 소쿠리를 들고 나왔는데, 그때 뜨거운 물이 닭에서 흘러내려 발등 위에 떨어져도 소리를 내지 못하고 삽짝 바깥까지 나왔더니, 발등이 뜨거운 물에 데었다고 했다.
그래서 발을 붕대로 싸매고 있었다. 그는 또 우리의 신이 훨씬 더 값이 많고, 그 많은 닭을 자기네 식구끼리 다 먹을 수 없으니, 기왕에 죽은 닭 열 마리를 가지고 가라면서 반쯤 삶겼던 닭을 그가 다 익혀서 우리에게 주었다.
나는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드리는 그의 아량이 마음에 들었다. 아버님이 옛날에 세월과 함께 인정도 메말라 간다고 하시면서, 옛날 자기가 젊었을 때는 이웃동네 돼지 훔치는 것도 청년들의 장난으로 취급되었으나, 오늘날에는 닭을 훔쳐도 도둑으로 몰리는 세상이라고 하시던 말이 기억났다. 우리는 그 집에서 우선 막걸리 두서너 되를 사서 그와 함께 닭 두 마리를 뜯어먹고는 나머지를 들고 당포로 돌아왔다. 제대하고 난 후에 맞추었던 구두를 망쳐버린 후 고무신을 사서 신었다.
구정(舊正)이 닥치기 전에 부산으로 내려가고 싶었다. 손 군이 내가 떠나기 전날 이별잔치를 한다며 나더러 막걸리를 사게 하고는 안주는 자기들이 장만하겠다고 하면서 부산 촌놈에게 별미안주인 참새구이를 해주겠다고 했다.
산골의 겨울, 늦은 저녁은 눈앞에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캄캄했다. 참새를 잡으러 간다고 나선 사람들의 손에는 짧은 새끼줄과 빈 쌀자루 하나와 손전등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나를 아무 말하지 말고 따라다니며 보기만 하라고 했다. 우리는 동네어귀까지 가서 걸음을 멈추었다. 마을의 첫 집 삽짝을 열고 들어가면서 여기서부터 참새 잡이가 시작된다고 했다. 그들은 손전등으로 초가집의 처마끝을 비추었다. 처마끝에는 참새들이 구멍을 파서 그 속에 들어가서 자고 있었다. 전등불에 눈이 부시어 눈을 뜨고 있었으나 움직이지 못하고 그냥 들어앉아 있었다. 구멍 앞에 가지고 왔던 자루를 벌려서 덮으니까 그제야 참새가 날아서 도망을 쳤다. 도망쳐 들어간 곳이 자루 안이었다. 자루에서 참새를 끄집어내어 참새 머리를 들고 있던 새끼에 꽂았다.
마을을 한바퀴 다 돌고 나니 잡은 참새가 여든 마리가 넘었다. 주막 앞에 꽁꽁 얼어붙은 강가 돌밭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긴 꼬챙이에 산버섯과 함께 끼워서 불에 구운 참새고기는 정말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이 있었다.
나는 초가가 없어지고 기와가 얹혀 그때와 같이 참새 잡이를 할 수 없는 마을을 천천히 걸어서 지나갔다. 손 군은 어디에 사는지 마을 사람에게 물어보니 모른다고 하면서 아마 상주로 이사를 갔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나는 짧은 세월동안 그와 재미있게 지냈던 날들을 돌아보면서 천렵을 하던 바위 위에 앉아서 잠깐 시간을 보내고는 문경으로 가는 차를 탔다.<다음계속>
당포 마을 앞에는 큰 개울이 흐르고 마을 뒤에는 하나의 반석으로 형성된 성주봉이 우뚝 솟아 있다. 나는 당포에 있을 때 성주봉에 자주 올라갔는데 하루는 그 산꼭대기에 나와 경아를 위하여 돌탑을 쌓았다. 내 키와 같이 높은 탑을 쌓고 그 속에 내 이름과 경아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마을에서 성주봉을 쳐다보면 봉우리 꼭대기에 서 있는 탑을 볼 수 있었다. 경아와 이별한 후 일년이 되었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경아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었다. 지난 일년동안 나는 경아를 잊기 위하여 몸부림치며 질서없이 이 여자 저 여자들을 사귀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헤어졌다. 그들을 경아에 비교하면 모두가 올챙이 같았다.
세월을 보내며 순간 순간 다시 타오르던 경아에 향한 그리움도 완전히 꺼버렸지만 우리는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오늘까지 자식을 가지고 행복한 생활을 하면서 환갑이 넘도록 살아왔어도 나는 경아를 내 마음속에서 완전히 잊지 못한 채 살고 있다. 나는 실제로 지금껏 하루도 경아를 잊은 적이 없다.
성주봉을 향하여 걸음을 걷는 내 눈앞에 경아의 모습이 티 없는 웃음을 머금고 나타났다. 나는 성주봉에 올라가서 그 탑을 헐고 경아의 행복을 빌면서 영원한 이별을 하고 싶었다. 마을을 벗어나 산길에 들어서서 성주봉 꼭대기에 올라가려면 약 삼십 미터나 되는 암반(巖盤)을 가로질러야 하는데, 이 암반을 가로질러 건너갈 수 있는 곳 바로 밑에 암반이 뚝 잘라져 절벽을 이루고 있고 그 절벽에는 산 제비들이 집을 짓고 살았다. 산 아래까지 가서 미끄러운 암반의 등을 타고 수십 미터의 절벽 위를 지나던 곳에 오니, 지금 나이에 보통 구두를 신고 도저히 건너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성주봉 아래 암반 곁 바위 위에 앉아 경아의 모습을 다시 한 번 그려보며 마음속으로 경아와 또 한 번 긴 이별을 한 후 발길을 산 아래로 돌렸다.
내가 누님 댁에 와서 지낼 때에 이 마을의 청년 손 군을 사귀게 되었다. 하루는 손 군이 천렵(川獵)을 가자고 했다. 동네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물에 고기를 잡으러 가는 사람들이 낚시도 그물도 없이 어른 머리통처럼 굵은 대장간 큰 망치와 소쿠리와 바구니를 들고 나섰다. 나는 고기를 손으로 잡을 것이냐? 망치로 때려 잡을 것이냐? 물었다. 손 군은 허허 웃으며 이 일에는 내가 부산 촌놈이니까 잠자코 보기만 하라고 했다.
우리는 동네 앞강에 왔다. 그들은 개울에 놓여 있는 바위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들고 온 망치로 바위를 내리쳤다. 쾅 하는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바위 아래에서 놀던 몇 마리 고기가 기절을 해서 배를 희뜩 뒤집고는 물 위에 떠올랐다. 나는 신기했다. 이렇게 고기를 잡는 법도 있구나 하며 손뼉을 쳤다.
송어, 메기, 뱀장어 등 고기들을 가지고 갔던 바구니에 가득 채웠다. 일년에 한번씩 동네 청년들이 하는 천렵이었다. 망치로 때려잡은 고기가 바구니에 가득 찼다. 우리는 바구니를 들고 강가 술집으로 갔다. 술집에서 끓여주던 그 국 맛이 지금도 내 입속에 맴도는 것 같았다.
며칠 후에 동네에서 청년들 모임이 있었다. 동네 청년들을 다 초대했기 때문에 손 군이 나를 데리고 갔다. 지난 천렵 때에 사귄 사람들이라 이제는 다 얼굴이 익었고 나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밤이 깊어지자 누가 닭이 먹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은 모든 사람의 귀에 당장 들어갔고 말없는 찬성이 눈짓으로 이루어졌다. 한 사람이 벌써 누런 유황 조각 같은 것을 가지고 왔다. 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 일어났다.
당포에서 문경 가는 길에 약 오리 떨어진 곳에 조그만 건너 마을이 있었다. 우리는 논두렁을 따라 그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 뒷산의 언덕바지를 따라서 조금 올라가니 사립문이 있는 아래채가 있는 농가가 보였다. 그 아래채가 닭장이라고 누가 나에게 귀띔을 해주었다. 앞에 가던 사람이 살그머니 사립문짝을 밀어열고는 우리더러 들어오라고 했다. 창으로 손전등 불을 켜서 들여다보니 많은 닭들이 장대에 올라가서 자고 있었다. 한 사람이 닭장 안으로 살금 들어가서 가지고 왔던 유황 조각에 불을 붙인 후 닭이 자고 있는 아래로 던졌다. 얼마 있지 않아서 자고 있던 닭들이 마취되어 장대에서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닭장 안에서 내어주는 닭을 한 마리씩 들고 우리는 그 집을 살금 나와서 당포로 다시 돌아왔다.
모두 열두 마리를 훔쳐왔다. 마구간 옆에 있는 쇠여물을 끓이는 큰 가마에 닭의 털을 뽑은 후 넣었다. 장작불을 집혀 놓고는 닭이 익을 때까지 방안에서 화투를 치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이와 동시에 닭장에서 유황의 냄새에 마취되어 떨어졌던 닭들이 정신이 들자 장대 위에 오르려고 푸드덕거리는 소리에 집주인이 잠에서 깨어났다. 닭장으로 가서 보니 닭 도둑이 들어왔던 것이 분명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직업적으로 하는 도둑이 아닌 것을 알아챘다. 도둑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더 많은 닭을 훔쳐갔지, 몇 마리만 가져갈 리가 없었다. 그는 틀림없이 이웃 마을 청년들의 장난이라고 여기고 당포로 올라가서 깊은 밤중에 아직 불이 켜진 집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마구간 옆에 있는 가마에는 닭 삶는 냄새가 나고, 방안에서는 청년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나왔다.
그는 솥 안에 든 닭들을 건져내어서 소쿠리에 담았다. 그 다음에는 마루 아래에 놓여 있던 우리의 신을 모조리 쓸어서 끓고 있는 가마에 넣어 던졌다. 솥뚜껑을 덮은 후에 닭이 든 소쿠리를 들고 숨소리를 죽이며 가만히 사립문을 벗어났다.
한참 화투를 치다가 누가 이제는 닭이 다 익었을 것이니 가지고 들어오라고 했다. 솥을 방으로 들고 오기 위해서 네 사람이 나갔다. 마루에서 섬돌에 내려선 사람들이 누가 신을 숨겼냐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우르르 나가서 보니 신이 없었다. 한 사람이 누가 장난치느라고 숨긴 것 같다고 하면서 닭을 먹고 난 후에 숨긴 사람을 잡아내자고 제안하니 그러자고 모두 찬성했다.
방 한복판에 솥을 놓을 수 있게 가마니를 깔고 네 명의 장정이 솥을 들고 들어와서 가마니 위에 내려놓았다. 누가 닭의 내장을 빼지 않아 냄새가 고약하다고 불평을 터뜨렸다. 아닌 게 아니라 솥뚜껑을 여니 솟아오르는 김과 함께 고약한 냄새가 온 방안에 퍼졌다. 이상하다고 하며 한 사람이 바가지를 넣어 닭을 퍼 올렸다. 바가지에는 올라오라는 닭은 보이지도 않고, 삶겨서 오그라진 구두가 들려 나왔다. 아무리 바가지를 뜨거운 물속에 넣어 휘저어도 비비 틀어지고 오그라지게 삶긴 신만 들어 있었지, 닭은 온데간데 없었다.
우리는 어처구니없어서 서로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도사(道士) 위에 도사 있다더니, 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닭 주인 같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대책을 강구했다. 우리가 닭을 훔쳤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신을 보상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지만, 도대체 누가 그런 장난을 했는지 알고 싶었다.
한 사람이 의견을 내었다. 내일 몇 사람이 그 집을 찾아가 우리가 닭을 훔쳤다고 실토를 하자. 만약 그가 우리의 신을 몽땅 망쳤다면 닭 값을 바라지 않을 것이고, 만약 그가 아니라면, 우리가 닭 값을 보상한 다음에 진짜 신 망친 놈을 잡아서 보상을 받기로 하자고 결정하고는 헤어졌다.
이튿날 손 군을 따라 나는 두서너 명의 동네 청년과 함께 건너마을 닭을 키우는 집으로 갔다. 싸리문에 들어서니 중년의 남자가 발을 헝겊으로 싸맨 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맞이했다. 우리는 직감적으로 그가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손 군이 능청스럽게 닭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없이 엉뚱하게 어찌하여 발을 다쳤느냐고 물었다. 집주인은 웃으면서 실토를 했다.
어젯밤에 닭들이 푸덕거리는 소리에 깨어서 닭장을 들여다보니 닭이 몇 마리 없는지라 이웃마을 청년들의 장난으로 생각하고 당포에 가니까 닭이 가마 안에 삶기고 있더라고 했다. 젊은 사람들의 놀이에 화를 내는 것보다 그도 장난으로 대답하자 생각하고는 우리의 신을 모조리 솥 안에 집어넣은 후 닭이 든 소쿠리를 들고 나왔는데, 그때 뜨거운 물이 닭에서 흘러내려 발등 위에 떨어져도 소리를 내지 못하고 삽짝 바깥까지 나왔더니, 발등이 뜨거운 물에 데었다고 했다.
그래서 발을 붕대로 싸매고 있었다. 그는 또 우리의 신이 훨씬 더 값이 많고, 그 많은 닭을 자기네 식구끼리 다 먹을 수 없으니, 기왕에 죽은 닭 열 마리를 가지고 가라면서 반쯤 삶겼던 닭을 그가 다 익혀서 우리에게 주었다.
나는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드리는 그의 아량이 마음에 들었다. 아버님이 옛날에 세월과 함께 인정도 메말라 간다고 하시면서, 옛날 자기가 젊었을 때는 이웃동네 돼지 훔치는 것도 청년들의 장난으로 취급되었으나, 오늘날에는 닭을 훔쳐도 도둑으로 몰리는 세상이라고 하시던 말이 기억났다. 우리는 그 집에서 우선 막걸리 두서너 되를 사서 그와 함께 닭 두 마리를 뜯어먹고는 나머지를 들고 당포로 돌아왔다. 제대하고 난 후에 맞추었던 구두를 망쳐버린 후 고무신을 사서 신었다.
구정(舊正)이 닥치기 전에 부산으로 내려가고 싶었다. 손 군이 내가 떠나기 전날 이별잔치를 한다며 나더러 막걸리를 사게 하고는 안주는 자기들이 장만하겠다고 하면서 부산 촌놈에게 별미안주인 참새구이를 해주겠다고 했다.
산골의 겨울, 늦은 저녁은 눈앞에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캄캄했다. 참새를 잡으러 간다고 나선 사람들의 손에는 짧은 새끼줄과 빈 쌀자루 하나와 손전등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나를 아무 말하지 말고 따라다니며 보기만 하라고 했다. 우리는 동네어귀까지 가서 걸음을 멈추었다. 마을의 첫 집 삽짝을 열고 들어가면서 여기서부터 참새 잡이가 시작된다고 했다. 그들은 손전등으로 초가집의 처마끝을 비추었다. 처마끝에는 참새들이 구멍을 파서 그 속에 들어가서 자고 있었다. 전등불에 눈이 부시어 눈을 뜨고 있었으나 움직이지 못하고 그냥 들어앉아 있었다. 구멍 앞에 가지고 왔던 자루를 벌려서 덮으니까 그제야 참새가 날아서 도망을 쳤다. 도망쳐 들어간 곳이 자루 안이었다. 자루에서 참새를 끄집어내어 참새 머리를 들고 있던 새끼에 꽂았다.
마을을 한바퀴 다 돌고 나니 잡은 참새가 여든 마리가 넘었다. 주막 앞에 꽁꽁 얼어붙은 강가 돌밭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긴 꼬챙이에 산버섯과 함께 끼워서 불에 구운 참새고기는 정말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이 있었다.
나는 초가가 없어지고 기와가 얹혀 그때와 같이 참새 잡이를 할 수 없는 마을을 천천히 걸어서 지나갔다. 손 군은 어디에 사는지 마을 사람에게 물어보니 모른다고 하면서 아마 상주로 이사를 갔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나는 짧은 세월동안 그와 재미있게 지냈던 날들을 돌아보면서 천렵을 하던 바위 위에 앉아서 잠깐 시간을 보내고는 문경으로 가는 차를 탔다.<다음계속>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