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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은 파독광부가 독일땅에 온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63년 파독광부 1진이 독일에 도착하면서 재독동포사회가 시작되었고, 전세계 동포사회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독광부분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셨지만 정작 개인적으로는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고생도 많으셨을 겁니다.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어찌 몇마디 필설로 다하겠습니까만 파독광부분들중에 몇분이 독일땅에 와서 겪은 체험을 여기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파독광부의 삶은 그 자체가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러니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어렵게 글을 써가실 때, 서투른 점이 있더라도 많은 성원 바랍니다. 

김재승칼럼 어머님 죄송합니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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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4,595회 작성일 13-11-13 08:59

본문

Opel 자동차 공장에서 근무는 지금까지 어떤 직장보다 조건이 제일 좋은 것 같았다.
처음에는 미션을 조립하는 부서에서 근무를 하다가 몇 년을 착실하게 근무를 하면서 인정을 받으니 다른 부서로 옮길 기회를 주었다.
열처리를 해서 나온 1.2.3.4.5단 미션기어를 정밀하게 한 번 더 깎고 다듬어서 검사를 마친 다음 합격품을 전에 내가 근무했던 조립부서로 넘기는 부서다. 거기서 몇 년을 더 근무하고 나니 추천을 받아 일정의 교육을 마치고 구룹리더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곳은 어떤 다른 부서보다 근무조건이 좋은 곳이어서 다들 근무를 해보고자 하는 부서로 육체적으로 힘들지 않고, 기계만 한번 조정해 놓고 문제가 없는지만 감시하면서 하루 일과를 마치는 곳이다. 월급도 다른 부서보다 많은데, 구룹리더의 수당과 또 야간근무를 시작한 나는 월급의 25%를 세금도 떼지 않고 야간 근무수당으로 더 지급이 되니 한 달 수령액이 많은 편이다.  또 기계만 잘 돌아가면 나의 시간을 가질 있으니 공식적이진 않지만 눈치 보아가며 책도 얼마든지 읽을 수가 있었다. 근무를 하면서도 내 시간을 가지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근무 조건이 좋은데도 다른 동료들은 내가 좀 부지런히 하는 꼴을 못 본다. 책임은 다하고 싶은 생각에서 이것저것 하다보면 나 때문에 다른 동료들까지 일이 많아진다며 천천히 하라고 성화다.
이런 근무를 하고서도 그 많은 월급을 받기가 미안한 마음인데 그 일도 많다며 요령을 부리는 동료들을 보면서 참 양심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직장에서 일에 여유가 생기고 보수도 좋아지니 나의 생활도 훨씬 자유로워진다. 몸이 그렇게 지치지 않으니 교회봉사도 열심히 하고 구입했던 낡은 집을 열심히 수리도 한다.
Opel은 미국 GM Motor 회사인 만큼 한국의 대우 자동차와도 인연이 있다. GM과 동업관계인 한국의 대우자동차는 86년부터 Opel 회사로 엔지니어 급 직원들을 대거 연수를 보낸다.
Opel 본사가 있는 Rüsselsheim과 내가 근무하고 있는 Bochum, 그리고 Motor를 생산하고 있는 Kaiserslautern에 많은 엔지니어 들을 연수를 보낸 것이다. 영어가 가능하면 연수 받는데 문제가 없겠지만 한국식 영어공부를 한 대우 직원들은 연수를 받을 만큼 영어를 한 사람이 드물다. 여기서 통역을 구해야 되어서 독문학을 하고  있는 한국학생 몇 명과 Opel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 사람들 중 내가 선발이 되었다. 아마도 실제로 근무를 하고 있는 내가 그 사람들에게는 더 필요했을지 모른다.
그 사람들과 같이 여러 부서를 돌아다니며 자료를 요청하고 자동차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배우는 관계로 통역은 나에게는 자동차에 대해서 많을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Kaiserslautern까지 다니며 2년 가까이 그들을 돕고 나니 나에게도 자동차를 만들어 내는 전 과정을 훤히 꿰들어 볼 수가 있었다. 또 연수도중 각 부서장을 찾아가 소개받고 도움을 청해서 대우자동차 엔진지어들을 돕고 나니 부장급 인사들도 많이 안면이 생겨 여기서 근무하는 동안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난, 모든 일에 관심이 많은 편이고 가능하면 스스로 하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생활에 필요한, 또 집을 수리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들은 거의 다 혼자 한다. 수도관 용접, 전기공사, 타일 놓기 등등 혼자다 할 수 있다. 처음 낡은 집을 사고 경사가 진 지붕을 평평하게 하고나서 얻어진 공간에다 목욕탕을 하나 더 만드는데 샤워장, 화장실, 세면대, 벽에 타일 붙이는 일들을 누구 손 하나 빌리지 않고 혼자 다 했다.
어지간한 자동차 수리도 집에서 혼자 한다. 내가 타던 자동차 모터가 고장이 나서 정비소에 갔더니 6000 DM를 달라고 한다. 그 많은 돈을 주고 수리를 한다는 것이 너무나 아까웠다. 출 퇴근 하면서 Opel 조립부서에 들려 부속을 몇 개 얻어다가 집에서 모터를 내려 완전히 분해를 한 다음 실린더 수리까지 해서 다시 맞춘 다음 타고 다닌다.
자동차를 집에서 고친다는 소문이 나자 주위사람들까지 와서 자동차를 수리해 달란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수리해 달라고 찾아오면 그 사람들 손님접대까지 하려니 부담이 간다. 아내에겐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다. 허지만 내가 조금 노력해서 자동차를 고쳐주면 기뻐하면서 가는 모습을 보면 나도 기뻐진다. 한번은 광산생활을 마치고 여기서 Abend Gymnasium에서 Abitur를 마치고 독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지인이 자동차가 힘이 없어서 정비소에 가서 400MD을 주고 수리를 했는데도 마찬가지란다. Gas를 주어도 모터에 힘이 없어 차가 잘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루 쉬는 날 아침에 오라해서 모터를 검사해 보았더니 4개 플러그 중 하나가 선이 끊어져 있었다. 눈으로 보이지 않으니 보아서 알 수 없지만 검사를 해보니 틀림없는 플러그 선이 끊어졌다. 이야길 해도 그는 도저히 믿지 못하는 눈치다.
준비된 플러그 선이 없어서 집에서 쓰는 전기선을 잘라 그 플러그에 연결을 시키고 운전을 해보라 했더니 돌아와서는 정비소 욕을 하면서 억울해 한다. 학생에게 400DM은 큰돈이다. 기뻐하면서  돌아가는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가없다.
또 한 번은 우리 교회 목사님 차를 한 대 구입해 드렸는데 이차가 가끔 한 번씩 선다. 운행 중 갑자기 시동이 꺼지니 독일말도 잘 통하지 않은 목사님에게는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교회 집사님 한분이 책임을 지고 차를 가지고 정비소에 다니면서 수리를 해 보았는데 여기저기 다니면서 수리비로 3000.―DM 이상이 들어갔지만 마찬가지란다.
제직회에서 목사님 자동차를 사 드리잔다. 난, 수리할 수 있는 자동차를 수리하면 되지 왜 새 차를 사느냐고 반대를 하자 “어떻게 네가 정비소 Meister들 보다 더 알은체를 많이 하느냐?”며 목사님과 다른 제직들이 난리다.
이튿날 다른 제직들이 나에게 전화질이다. 내가 반대를 해서 차를 구입해 줄 수가 없으니 허락을 해 달라는 것이다. 난 구입을 허락하고 그 말썽 부리는 차를 내가 구입을 했다.
수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날 폐차장에 가서 플러그에 전기를 순서대로 보내주는 Verteiler를 헐값에 구입해서 바꿔 주었다. 얼마나 잘 굴러다닌 지 모른다. 그 차를 타고 교회를 갈 적마다 보는 눈들이 곱지가 않다. 목사님이야 더 좋은 차를 타고 다니니 좋을지 몰라도 교인들이 주는 눈총은 따가웠을 것이다. 결국 나는 그 자동차를 목사님 입장 때문에 오래타지는 않고 다른 사람한테 팔아 넘겼다. 다 직장의 근무조건이  좋아져서 생긴 여유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그동안 한국에는 계속 송금을 시켜 아버지께서 유산으로 우리에게 물려준 2000만원의 빚은 다 갚았다. 여기 은행에서 융자를 얻고 또 푼푼히 모아 놓은 돈으로 그동안 어린 동생을 학비, 가족 생활비를 충당하고 남의 빚도 다 갚은 셈이다.
생각하면 참 아내에게 고맙다. 시집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잔소리 않고 송금을 시키잔다. 처갓집이야 아내가 막내여서 다른 형제들을 도울 필요가 없지만 나는 장남에 외아들이라는 부담이 이렇게 큰 줄을 몰랐다. 아내의 이해가 없고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어떻게든 시골에 어머님 혼자 살아가실 수 있는 집과 전답이 몇 마지기 있으니 시골에서 살고 싶어 하시는 어머님은 그런대로 생활할 만하시고 더 필요한 어머니 생활비는 우리가 결혼한 여동생에게 사업자금으로 목돈을 좀 대주고 그 목돈의 이자를 낸 셈 치고 어머니 생활비를 보내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으니 결국은 그 목돈도 흔적이 없어졌지만 그 때는 우선 안심이 되었다.
 
이제는 우리도 우리 앞길을 생각하자. 우리도 아이들이 2명이나 된다. 먹고 생활하기에는 맞벌이를 하니 집을 살 때 융자 받은 이자 갚아나가면서 생활할만하다.
허지만 계속되는 이런 생활이 전부가 아니지 않는가?
 
신문에 중국연변대학의학대학 중의학부에서 독일 분교를 세운다는 기사가 났다. 여기 남독에서 생활하고 있는 형제교포가 중국에 있는 학교를 찾아다니며 계약을 맺었단다. 여기서 생활하고 있는 교포들을 상대로 교수는 본교에서 파견하고 직장인들을 위해서 주말에 강의를 하고 여름방학 6주 동안에는 본교에 가 5년 동안 총 2800 시간 강의를 받으면 학교를 졸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것에 관심이 생긴다.
학비는 6개월 한 학기에 3000 DM정도이며 매년 강의를 위해 중국에 가는 항공비와 중국에서 6주 동안 머물면서 들어가는 생활비도 만만치만은 않을 것 같다. 허지만 더 못 믿을 것은 사실 여부다. 신문 광고가 난 그 시기에는 아내의 4자매가 전부 여기 독일에 모여 있을 때다. 오빠만 제외하고 여기에 모인 것이다. 아내의 평생소원이 4 자매가 여기 독일에서 한번 모여서 지내는 것이었는데 그 소원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 처형들에게 분교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니 썩 찬성하는 사람이 없다. 어떻게 믿느냐는 것이다. 며칠을 생각했다. 허지만 믿지 못하면 아예 처음부터 시작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속담에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는다.”란 말 같이 부딪쳐 보지 않고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생각을 아내에게 말하니 아내는 찬성하는 분위기다. 처형들과 스위스 Jungfrau 여행을 가면서 설명회가 있는 그곳을 가보았다. 다름 사람들도 멀리서는 밀라노와 파리에서까지 찾아와 설명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연변대학교는 중국에서도 북한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조선족 자치주다. 학교 교장도 한국계 중국인으로 중국에서는 조선족으로 통한다. 조선족이기 때문에 우리말로 강의가 가능한 것이다. 물론 어려움은 많을 것이다. 여기서 주말강의에 참석하려면 매주 400km넘는 이곳까지 와서 3일 동안을 머물러야 되며 방학 때면 본교, 학비를 계산하면 비용도 많이 들겠지만 근무를 하면서 병행 할 수 있는 학업이기에 수입원이 없으면서 학교를 다니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확실한 연락은 여행을 다녀와 하겠다고 약속들 하고 스위스로 차를 몰았다. 나중에 주최 측에 연락을 해보니 30명이 넘는 인원이 입학신청을  했단다.  여행을 다녀와서 나도 입학지원서를 냈다. 9월에 입학식 때는 학교에서 대학장님과 교무처장, 그리고 처음 우리에게 중의기초학과 약학을 강의할 교수님이 파견되었다. 본교에서 나온 대학장님이나 교무처장님 그리고 교수님을 보니 한편은 마음이 놓인다. 우리만 잘 협조하고 학교에서 계획대로 교수만 파견된다면 어려움이 없을 것 만 같다.
중의학(한의학)에 속한 강의는 여기서 하고 총 2800 강의 시간 중 1/3에 속하는 양 의학 과목은 교수들과 실험실 관계로 본교에 들어가 한단다. 예를 들면 해부학, 약리학, 생리학, 미생물학, 병리학, 생화학과 중국어 등이다. 몇 개월은 수업도 계획대로 잘 진행되었다.
허지만 얼마를 지나자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중국에서 교수님을 모셔와 소위 분교장이라고 하는 사람들 집에서 같이 생활을 하는데 괄시가 이만 저만이 아니란다. 그리고 자기들도 한의학을 전공했다고 우리에게 소개해 놓고 하는 짓을 보면 한의학이라는 한자도 모르는 것 같다. 애를 써서 분교를 허가를 받는 데는 수고를 했지만 그들의 목적은 단지 영리가 목적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교수님들에게 먹을 것과 모든 행동까지 제한을 하고, 비밀이 탄로 날까봐 우리들과 따로 만나지도 못하게 하면서, 강의가 없는 주중에는  보수도 없이 그들이 운영하고 있는 침구센터에 치료행위를 시키며 꼭 하인 다루듯 한다는 소문이 들린다. 본교와의 계약내용도 우리에게 소개된 내용과 영 다르다. 이대로는 도저히 학교생활 5년, 중국 교육부에서 치를 통일고시준비까지 하면 6년이란 세월이 유지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들만 든다.
지금 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우리가 졸업할 때 까지 이 분교는 유지될 수 없다는 판단아래, 학교를 중단하든지, 아니면 체제를 바꾸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로 몇 학생들과 의견을 모으고 우리와 뜻을 같이 할 학생들의 의견을 모으기로 했다.  먼저 교수님의 의견을 물었다. 우리가 학교를 직접 상대해서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데 우리와 뜻을 같이 하겠느냐고.
교수님은 OK다. 교수님도 현 체재로는 분교 운영이 어렵다는 상황 판단을 하시고 본인이 무슨 욕을 먹더라도 적극 협조하시겠단다.
이제는 우리와 같이할 학생들의 수가 중요하다. 30명이 넘는 학생들 전체가 우리와 뜻을 같이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우리와 같이 하는 학생들 수도 본교에 보고해야 되고, 앞으로는 학비도 분교장에게 내지 않고 자치적인 운영방식으로 변하기 때문에 우리 인원이 적으면 불가능하다. 학생을 입장은 반반이다. 그래도 분교장과 같이해야 졸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를 못 미더워 하는 편과 우리 학생들 자체운영을 선택한 편으로 나뉜 것이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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