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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은 파독광부가 독일땅에 온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63년 파독광부 1진이 독일에 도착하면서 재독동포사회가 시작되었고, 전세계 동포사회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독광부분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셨지만 정작 개인적으로는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고생도 많으셨을 겁니다.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어찌 몇마디 필설로 다하겠습니까만 파독광부분들중에 몇분이 독일땅에 와서 겪은 체험을 여기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파독광부의 삶은 그 자체가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러니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어렵게 글을 써가실 때, 서투른 점이 있더라도 많은 성원 바랍니다. 

이정의칼럼 검정밥(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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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4,554회 작성일 13-11-08 09:32

본문

중국여행-1
 
고향생각과 향수에서 해방된 나는 이제 세상을 둘러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시간만 있으면 고향으로 가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 시간과 경비로 세계 각 국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내와 의논해서 격년마다 나 혼자 여행을 떠가기로 정했다.
 
첫 여행으로 중국을 택했다.
중국을 택한 이유는 극동아시아문화의 근원이라는 것과 현대화로 인하여 예전의 모습이 사라지기 전에 중국유람을 하고 싶었다.
 
여행사를 통해서 얻은 일행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우리는 내륙지방으로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에, 독일에 유학 중인 원지민이라는 중국인 대학생을 안내자로 채용했다. 나는 떠나기 전에 북경에서 사는 담(覃) 군에게 내가 북경에 언제 도착하는지 연락을 했다. 북경에 간 기회에 그를 만나고 싶었다.
 
담 군은 내가 아직 경영실적조사연구실을 담당하고 있을 때 독일 광산경영을 배우기 위해서 중국정부에서 독일로 보낸 사람으로 우리 광산에 약 일 년 반 연수자의 자격으로 있었다. 내가 동양인이니까 본사에서 그를 나에게로 보냈다. 영어와 독어를 독학으로 배웠는데 썩 잘 했다. 그는 내가 사무실에 없을 때는 내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낱낱이 읽어보고 제 노트에 기록했다. 내가 사무실에 있을 때는 나의 등 뒤에서 떠나지 않고 어깨 넘어 보는 것을 모두 기록했다. 나는 그것이 귀찮았다. 무슨 방법으로든 그가 제 책상에 앉아서 일을 하도록 많은 일거리를 주고 싶었다.
 
지하에서 1000m 깊이의 갱도와 1250m 깊이의 갱도를 연결하는 직경 8m의 수갱을 파기 위해서 우선 1,5m 직경인 작은 구멍을 밑에서부터 위로 뚫었다. 수갱을 파고 내려가면서 폭파시킨 돌을 그 구멍을 통해서 깔때기처럼 아래로 부어넣으면 운반비와 운반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고, 수갱의 바닥까지 통풍장치를 하는 데 큰 장점이 있었다. 그런데 수갱의 한복판에 뚫려야 할 구멍이 중심방향에서 벗어나 수갱의 복판에 나오지 않고 수갱의 가장자리에 연접했다. 그렇게 되면 수갱의 바닥에 놓인 돌을 그 구멍으로 넣을 때 구멍이 있는 쪽에는 돌이 저절로 미끄러져 떨어지지만, 반대쪽에는 돌을 6,5 m의 거리를 운반해야 했다.
 
나는 폭파시킨 돌무더기가 구멍을 통해서 저절로 떨어지지 않고 바닥에 남아있는 무더기의 부피, 그 무더기의 운반시간, 파괴된 돌을 다 제거할 최소한의 시간, 최대의 능률을 올리기 위한 바닥의 경사각(傾斜角) 및 최소한의 장비 응용시간을 계산하기 위해서 본사에 있는 컴퓨터에 방정식을 넣었다. 그 후에 나는 담 군에게 이러 이러한 난점이 있어서 내가 이것을 계산하려고 하는데 그가 미적분계산을 배웠는지 물었다. 그는 서슴없이 할 줄 안다면서 문제를 달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그 문제를 주었다. 컴퓨터는 사흘이 필요하니까 한 일주 정도는 그가 나를 질문으로 귀찮게 굴지 않을 것이다 생각하면서 나는 속으로 만족하게 웃었다.    
 
이튿날 그는 종이 한 꾸러미를 가지고 왔다.
문제를 풀었다면서 나에게 해답을 제시했다. 밤새도록 자그만 가감승제법(加減乘除法)밖에 못하는 계산기를 가지고 종이에 연필로 계산해서 해답을 가지고 왔다.
 
나는 우선 본사 통계실로 전화를 걸었다. 컴퓨터의 답이 언제 나오느냐고 물었다. 그쪽에서는 어제 저녁에 계산기에 넣었으니까 오늘 오후 경에 나올 것이라면서 답이 나오는 즉시 배달차로 보내겠다고 했다.
 
나는 담 군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밤잠을 못 자고 문제를 푸느라고 애를 쓴 표적이 그의 얼굴에 들어 났다. 나는 그에게 오늘은 근무할 필요가 없으니 집에 가서 자라고 하고 그의 노력에 감사했다. 그는 집에 가지 않았고 오후 두 시까지 버티면서 나와 함께 자기가 푼 문제를 검토했다. 그의 해답은 정확했다. 나는 다시 한 번 그에게 칭찬과 감사를 하고, 내일 나와 함께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먹자고 초대했다. 그 이튿날 본사 통계실에서 해답을 보내왔다. 해답은 담 군의 것과 동일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친하게 되었고 나는 그를 우리 집에 자주 데리고 갔다.
담 군이 나에게 온지 3개월 후에 자기 부인과 아들이 온다고 했다. 북경에서 기차를 타고 몽고와 소련을 거쳐서 모스크바에서 베를린 오는 차를 갈아타면 자기가 베를린까지 마중나가서 데리고 오겠다면서 비행기는 비싸니까 기차로 온다고 했다. 나는 부인이 소련 말을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못한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벙어리마냥 말 한마디 못하는 여인이 다섯 살 먹은 어린 아들을 데리고 한 주 동안 기차를 타고 낯설고 물선 땅들을 거쳐 남편을 찾아오는 용단에 나는 놀랬다. 그들은 중국을 탈출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부인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회사에서 집을 하나 주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아들 조주(照周)가 엄마와 함께 다니면서 통역을 했다.
담 군은 가족과 함께 일 년 남짓 독일에서 지낸 후 귀국해서 산서(山西)의 대동에 있는 광산에서 일하다가 북경대학에 교수로 역임했다. 담 군이 귀국한 후에도 우리 사이에는 편지가 자주 오고 갔다. 담 군의 부친은 수력발전소 전문가로 중국에서 이름이 높았다.
 
북경공항에 담 군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운 인사를 나눈 후 그는 우리와 함께 북경에서 지낼 호텔로 왔다. 내가 중국여행을 왔으니, 자기도 며칠 휴가를 내어 내가 북경에 있는 동안 같은 호텔에 방을 빌려 나와 함께 지내려 하는 것을 보고, 말없는 차근한 우정에 나는 내심으로 감탄했다.
 
그래서 나는 담 군과 함께 중국여행의 첫발을 내어 디디었다. 북경의 하늘은 희색의 면사포가 덮인 것처럼 언제나 부옇다고 하는 담 군의 북경소개가 시작되었다. 고비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먼지로 인해서 항상 희색의 하늘인데 거기에 또 공장과 자동차의 폐기가스로 인하여 이제는 길거리에서 숨쉬기조차 힘 든다고 했다. 나는 작년여름의 서울을 회상했다. 며칠간 북경에서 머물면서 수많은 고궁유적과 북경주위에 있는 종묘, 신도(神道), 만리장성 등을 관람한 후에 서안(西安)가는 기차를 타려고 북경 역으로 갔다.
 
북경역 앞 광장에는 천명 이상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봇짐 옆에서 자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하루 이틀이 아니라 벌써 며칠 동안 그곳에서 날을 보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어, 담 군에게 그 사연을 물었더니, 차표를 구하지 못했거나 일자리와 잘 곳이 없어서 여기에서 산다고 하면서 어떤 사람은 아예 이렇게 노천에서 전 가족이 보따리 짐 위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들을 위한 공공기간이나 또한 그들의 권리를 위하여 나서는 사람도 없어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중국에서 잊혀진 체 하루하루의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담 군과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서안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중국 내륙지방의 여행은 서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소형 버스를 빌려서 난주(蘭州), 무위(武威), 장액(張掖), 가욕관(嘉峪關)을 지나 돈황(敦煌)을 둘러보고 다시 난주로 와서 하하(夏河)로 향했다. 중국 북부지방을 둘러보는 동안 밀을 타작하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들의 도리깨가 우리나라 도리깨와 똑 같았다. 누가 먼저 만들고 누가 누구에게서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동일한 타작방법을 보면서 중국과 한국의 하나인 타작문화를 인식했다.
 
하하(夏河)에서는 우리 일행 중 4명이 배탈이 나서 꼼짝 못하고 눕게 되었는데 다행이도 독일에서 평양까지 자전거로 여행 중이던 쾰른에서 온 독일의 젊은 의사를 사찰의 객사에서 만나게 되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젊은 독일의사는 중국이 싫다고 했다. 그래서 타고 다니던 자전거는 절의 중에게 주고 자기는 내일 버스로 난주로 가서 거기서 비행기로 북경으로 가면 삼일이내에 중국을 떠나야 된다고 하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티베트의 수도 납살(拉薩 = 라사)에서 미국에서 관광 온 여인이 가방을 도난당했다. 중국인 경관들이 그 가방을 훔친 젊은 남자를 체포했는데, 순경들이 그 사람을 옆 골목으로 끌고 가더니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으로 개를 죽이듯 총으로 쏘아 죽였다. 그것을 목격한 독일의사는 왜 사람을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하느냐고 항의했다. 이러한 연유로 그는 칠일 이후에 중국을 떠나라는 지시를 받았고 중국에서 원하지 않는 인물로 낙인이 찍혔다. 여기에 있는 사찰의 스님에게 무엇을 전해 주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이곳으로 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일본군들에게 개죽음을 당했던 우리 국민의 역사를 돌이켜 보았다.
우리는 젊은 의사와 함께 분한 마음을 나누며 언제나 티베트에도 자주독립의 기쁨이 닥치기를 염원하면서 향을 피워 올렸다. 젊은 의사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설사약을 모두 우리에게 주고는 난주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러한 설사 때문에 버스여행 중 우리는 찻길 옆에 옥수수 밭을 볼 때마다 차를 세우고 밭으로 들어갔다. 내심으로 우리는 이러한 강냉이 밭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사천성(四川省)의 수도 성도에서 며칠을 머문 후에 버스를 대절하여 아미산(峨嵋山)과 약산(藥山)을 둘러보고 서창(西昌)을 거쳐 반지화(礬枝花)시로 향했다. 길을 가는 동안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것은 가라오케 술집이었다. 요즈음 중국에서 병적으로 유행하는 것이 가라오케 술집인데 특별히 사천성(四川省)에는 곳곳이 가라오케장이 즐비해 있었다. 비록 조그만 마을이라도 사람 사는 곳이면 가라오케장이 없는 곳이 없으며 술집마다 저녁이면 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TV뉴스에는 주민들이 술집 노래장의 소음 때문에 귀찮아했다.
 
TV 말이 나왔으니 생각나는데, 중국해방 50주년 기념이어서 그런지 매일처럼 항일투쟁운동과 그때 민간인들의 일본인에 대한 혐오와 투쟁심을 보이는 영화를 보여주었는데 이렇게 대일감정이 노골적으로 큰 줄은 몰랐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여행할 경우 대만 혹은 한국에서 왔다고 말한다고 했다. 이런 것을 듣고 보면서, 또 일본수상이 히로시마 원폭재해 50주년 추도식에서 처음으로 그것도 공식적이 아닌 개인적인 발표로 유감을 표시하는 것을 볼 때에 중국인에 비해 우리는 너무도 쉽게 35년 동안의 일본의 잔악성을 잊지 않았는가 생각했다.
 
반지화시에서 우리는 여강(麗江)으로 길을 계속했다. 여강에는 길가에 차일(遮日)을 친 개장국 집이 즐비해 있었는데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우리 일행의 안내역을 맡았던 원 군이 내가 한국인이니까 개장국을 좋아할 것이다 생각하고, 나더러 길가에 솥을 걸고 개고기음식을 파는 곳에 가자고 했다. 나는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하고 개고기 외에 다른 것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얄미울 정도로 이상야릇한 웃음을 입가에 띠우더니 나더러 함께 가자고 했다. 그러나 독일 사람에게는 제 나라의 음식문화를 보이기가 어색했던지 함께 가겠다는 일행에게 개장국 먹으러 간다고 대답했다. 개를 먹겠다는 우리가 그들에게 마치 야수처럼 보였던지 그들은 주춤하면서 함께 가겠다는 생각을 털어버렸다. 원 군과 나는 개장국 집들을 지나 시장으로 들어갔다. 한참 사람들 틈을 부비며 걸어가니 음식점이 즐비한 골목이 나왔다. 음식점 앞에는 오리, 개, 원숭이, 곰 등을 넣은 굵은 철사로 엮어진 철장들이 쌓여 있었다. 여기저기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이상하게 생긴 짐승들도 보였다. 원숭이들은 마치 옛날에 귀양살이 가는 죄수가 큰칼을 목에 쓴 것처럼 머리들을 철장 바깥에 내어밀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목 부분에는 구멍이 좁아서 머리를 우리 안으로 끌어드리려고 해도 들어갈 수 없게 했다.
 
나는 원 군에게 왜 그렇게 하는지 물었다.
그 순간 그가 내 팔을 잡으며 나를 세웠다. 그가 눈짓하는 곳으로 내가 보니 요리사가 칼과 그릇을 들고 나왔고 그의 뒤를 따라 손님처럼 보이는 남자 두 사람이 나왔다. 그들이 머리를 내밀고 있는 원숭이를 이리저리 검사하듯 훑어보더니 한 원숭이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제야 요리사가 앞으로 나와서 그 지적된 원숭이의 머리를 잡고서 들고 있던 칼로 수박꼭지 치듯 원숭이의 머리를 쳤다. 뚜껑이 열린 머리에서 피가 물컥물컥 솟아 나오는데 요리사는 손으로 머리 속에 든 뇌를 끄집어내어 그릇에 담은 후 골이 빈 원숭이를 들고 다시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고 두 명의 손님도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나는 이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니 창자가 꿈틀거리고 속에 든 것을 토해낼 것 같았다. 원 군은 나를 쳐다보며 빙긋이 입을 비뚤이면서 웃었다. 그는 원숭이의 뇌는 아주 별미라고 하면서 방금 죽인 아직까지 뜨거운 뇌가 제일 맛이 있다고 했다. 나는 더 이상 그 골목을 걷기가 싫었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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