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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승칼럼 어머님 죄송합니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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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10-30 08:43 조회4,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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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생활 4년 반을 마치고 사표를 냈다.
지겨운 작업환경도 환경이지만 장거리를 매일 출퇴근을 하려니 그게 더 고역이다.
‘설마 일 할 곳을 찾지 못하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에 무조건 사표를 내고 직장을 알아보고 있는데, 누가 Bochum에 Möninghof라고 하는 회사에 취직할 수가 있다는 귀띔을 해준다.
자동 선반기를 운전하는 공장인데 한국사람 몇 명이서 그 회사에 다니고 있단다.
‘설마 광산보다야 힘들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에 회사를 찾아가 이야기를 하니 당장 출근을 하란다. 하는 일은 주물공장에서 대강 필요한 모양으로 만들어  나온 쇠 덩어리를 필요한 모양으로 정밀하게 깎아 내는 일이다. 소위 선반일인데, 하나하나를 필요한 모양으로 깎아내는 것이 아니고 같은 모양으로 몇 백 개, 많으면 몇 천개도 깎아낸다.
사람이 하는 일은, 모양과 규격을 맞추어 놓은 기계에다 쇳덩어리를 물리고 스위치 넣어 깎고 나면 다시 꺼내는 작업이다. 자동기계이니 물건 하나를 깎아내는 시간을 정확히 시계로 제서 하루에 몇 개를 해야 된다는 작업량을 책정한다. 작업량을 마쳐야 계약된 월급을 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도급제다. 숫자를 채우려고 2-3kg이 되는, 큰 것은 10kg도 넘는 쇳덩어리를 쉬지 않고 하루에 4-500개를 깎고 나니 몸이 아프지 않는 곳이 한군데도 없다.
쇠를 깎을 때 열이 나지 말라고 뿌려주는 냉각수는 다른 화공약품을 섞어놓아 냄새가 어지간히 독하다. 쇠를 깎아낼 때 깎여 나오는 날카로운 쇠붙이와 냉각수를 다루니 고무장갑을 끼지 않으면 안 되는데, 하루만 껴도 갈라져 물이 새는 장갑을 일주일에 한 켤레 씩만 지급이 되니 손이 말이 아니다. 상처도 상처지만 일주일 내내 나는 구린내 같은 냄새는 생활하는데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다른 한국 사람들은 왜 그리 일들을 잘 하는지? 오래된 숙련공이서 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여유가 있어 보인다. 일을 할 때 보면 사람이 날라 다닌다고 할까? 기계같이 실수  없이 일을 하는 것을 보며 “난, 도저히 저렇게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도급량을 못 채운 것은 당연하다. 첫 달 월급을 받아보니 광산월급을 훨씬 못 미친다. 하는 일도 지금이 훨씬 힘든 것 같다. 회사에 출근하기가 싫어지고 일하기가 딱 싫어진다.
2개월을 견디어 보았지만 도저히 더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여기는 안 돼.” 무조건 의사한테 찾아가 몸이 아파서 도저히 일을 못하겠다고 거짓 병가를 내고 4주정도 쉬었다.
회사 인사과에서 호출이다. 정말 몸이 아파서 쉬는 건지, 아니면 하기 싫어서 쉬는 것인지를 묻는다. 몸이 아파서 쉰다고 하면서 곧 출근을 할 거라고 이야기 하고 돌아와서 다시 2주 병가를 더 내니 해고장이 날아온다. 독일에서 주는 실업자 수당은 사표를 스스로 내면 3개월 동안은 받지를 못한다. 회사에서 해고를 시켜야 실업자 수당을 금방 신청할 수가 있다.
 
Möninghof에서 해고를 당하고 그 다음 일자리를 찾은 곳은  정원 일을 맡아서 하는 정원 하청업체다. 몇 명이 그룹이 되어 차를 타고 다니면서 가정집이나 관공서, 학교의 정원 일을 하는 회사다. 헌데 며칠 해보니 월급이 너무 적다. 아침에 시작에 오후 늦게 까지 일을 하는데도 그렇게 긴 작업시간인데도 광산월급을 훨씬 못 미친다. .
작업이 힘든 것은 아니지만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일을 하고 또 작업시간이 길기 때문에 태어난 우리 아이를 키우는데 영 어려움이 많다. 아내가 근무를 나가면 내가 집에가 있어야 되고 내가 근무를 나가면 아내가 집에 있어야 되는데 도저히 근무시간을 조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도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Opel 자동차회사에서 사람을 모집한다며 같이 응시하자고 그 지역에 사는 한국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정원 일을 하는 회사에서는 무단결근을 하고 Opel를 찾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와있다. 이력서를 제출하고 신체검사를 마치고 조금 기다리니 8월 1일부터 Opel 제 2공장으로 출근을 하란다. 2공장은 모터와 미션(Getriebe)을 생산하는 공장인데 1공장 자동차 조립을 하는 일보다는 훨씬 수월하다는 소문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정원 일을 하는 회사에 사표를 내니 사표를 낼 수 있는 시간이 있는데 급하게 사표를 낸다며 월급을 반달 것을 주지 않는다.
OPel 로 첫 출근을 했다. 내가 앞으로 할 일을 배우면서 시작한 근무는 지금까지 어떤 작업환경보다 좋은 환경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월급도 그 어느 곳보다 많고 일도 힘들지 않으니 큰 탈만 없으면 여기서는 좀 견디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크나큰 사건들이 많이 일어난다.
3선 개헌을 하고 유신헌법 까지 만들어 장기집권을 노렸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민중들의 반대 운동이 거세지자 자꾸 무력으로 민중을 억압하는 정책을 쓴다. 이에 항거하여, 제일 믿고 그에 측근인 중앙정부부장이었던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한 79년의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그해 보안 사령관인 전두환이 반란을 일으켜 무력으로 참모총장인 정승화 대장을 직위 해제하고 구속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한국 정치의 봄바람을  꿈꾸고 있었던  민족의 염원을 군화발이 무참히 짓밟고 전두환은 새로운 권력자로 나선다.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었던 10.26 사건이후 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 발표되기 까지는 국민들은 이제는 한국에도 민주주의 바람이 불거라는 희망에 차 있었다. 갑자기 국회를 해산하고 대통령 출마를 꿈꾸었던 몇 분들을 죄목을 붙여 자택에 감금하고 구속함으로 광주에서는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다.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제 5공화국 시절에도 계속되는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들 중 희생되는 학생들이나 민주화 인사들이 많이 있었다.  특히 5.18 민주화 운동 때는 이곳에 사는 우리들은 한국 사람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한국의 참상들이 이곳 TV에 방영되고 독일 사람들도 무슨 모임에 우리들이 있으면 옆에 오기가 무섭다며 다른 장소를 찾아가곤 했었다.
광주에서 죽은 시체들이 묶여 있는 사진들, 거리에다 학생들을 묶어서 엎드려 놓고 밧줄로 학생들을 목 졸라 죽이는 영상들이 이곳에서 방영되고 하니, 이곳 독일 사람들은 정말 같은 동족을 저렇게 무참히 학살하는 장면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국내에서는 언론 통제를 했기 때문에 국민들은 잘 알지 못하나 오히려 외국에서 사는 우리들은 더 생생하게 그런 모습들을 접하게 되었다.
전두환 정권시절 남덕우 국무총리가 유럽 순방을 한 적이 있었는데 미국에서 귀국한 나의 처남이 모 일간신문사 정치부장으로 있으면서 남덕우 국무총리 수행기자로 이곳을 다녀간 적이 있었다. 정치부 부장까지 하고 있는 그 처남도 광주의 참상은 알지를 못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모아 놓은 잡지나 TV방송을 녹화시켜 VIDEO로 보여 주었더니,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은 알았어도 이렇게 까지 한 줄은 몰랐다며 울분을 토한 적이 있었다.
 
그 후에도 85년 김근태 고문 사건, 86년 귄인숙 부천 성고문 사건, 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6월 항쟁으로 이어질 때 까지 많은 민주인사들이 희생당하는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다.
이곳 독일에서도 군부가 발표하는 내용들을 믿고 그들을 공산주의 빨갱이들로 알고 군부를 추종하는 사람들과 이런 군부의 악랄한 짓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면 이에 항거하는 세력들로 나누어진다. 특히 우리가 출석하는 교회에서는 빨갱이 교회라고 알려질 만큼 한국까지 붉은 세력이 모인 교회라고 소문이 날정도로 억압받는 그들을 위해 많은 대변인 역할을 했다.
집회를 열어 독일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전두환이 이곳을 국빈자격으로 방문하면 그때 수도였던 Bonn 광장에 또는 Köln Dom 성당 광장에 플래카드와 농악 등을 준비해서 데모를 수없이 했었다. 우리가 행사를 하고 있으면 정보부 출신인 대사관 직원들이 행사장 근처에서 사진을 찍으며 우리 행동을 감사하고 했던 시절, 한 도시에서 사는 한국 사람들 끼리 한 패는 대통령 방문 환영대회, 한 쪽은 방문 반대데모에 참여하며 서로 편들이 갈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들은 정치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고 또 반정부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억울하게 죽어가고 고통 받는 자들을 대신해서 억울함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을 뿐이다.
정부에 반대하는 언사와 행동만 해도 무조건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던 시절, Bochum에서 유학을 하면서 옳은 소리를 냈던 학생들이나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참 많은 오해를 받고 살았다.
정말 많은 집회를 가졌었다. 집회도 집회지만 한국에서 이곳 인권운동 단체들과 연대하고자 독일을 방문한 분들의 손님들 대접도 참 많이 했었다.
성고문 사건 피해자 귄인숙씨, 5.18 재단 이사장인 강신석 목사님, 송기숙 교수님, 명노균 교수님과 그의 부인 안성례 장로님, 고영근 목사님 등 많은 인사들이 다녀갔다.
그 때는 우리도 작은 집에 살다가 아이들이 성장하자 은행에서 빚을 얻어 정원이 넓고 방이 좀 많은 집으로 이사를 가서 인권운동을 하는 그 분들이 독일에서 일을 보는 동안 며칠을 머무를 때면 우리 집에서 머무르곤 했었다.
이곳 생활을 하는 맞벌이 부부는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둘이 교대근무를 하면서  아이들 키우면서 살림을 하기란 절대 수월한 일이 아니다. 어떤 부부는 서로 근무를 교대하면서 시간이 비는 시간에 아이를 혼자 나두고 나가면서 아이가 사고를 낼 까봐 아이한테 술을 먹이고 나간 동료들도 있었다. 지금이야 가당치나 한 일인가? 세월이 많이 흘러 지금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손자, 손녀를 돌보며 힘들어 하는 주위사람들을 보면 참 세상이 많이 편해졌다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요즈음 젊은 부부들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돌봐주지 않으면 아이들을 못 키울 것 같이 생각하며 부모들에게 아이를 맡기려 드는 젊은이 들을 보면 우리들이 아이들을 키울 때가 다시 한 번 생각이 난다. 
 
이런 힘든 환경에서도 손님대접을 해야 하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지만 한국에서 온 그분들도 다 남을 위한 일들을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하는 생각으로 그 고통을 같이 나누곤 했었다.
 
생각해 보면 옛날에는 전혀 생각 밖이었던 나라 안의 정세에 나도 모르게 신경이 써지는 것이다. 판단력이 생겼다고 할까? 먹고 살기가 힘들었던 이유였을지는 모르지만 나의 주위사람들이 이야기 하고 또 국가 차원에서 알리는 소식들은 무조건 믿어왔던 내용들이 “이건 아니지 않은가?”라는 생각들이 자꾸 든다.  잘못된 부분들이 있으면 그것을 분별할 줄 아는 안목이 생긴 것이다. 내가 조금 노력해서 그 노력이 이웃의 기쁨으로 된다면 그것도 나의 보람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여기서 몇 가지 행사를 주관했었는데 그 영향이었는지 우리가 한국에 휴가를 가면 형사들이 집으로 찾아와 한국에 온 특별한 이유, 앞으로의 일정을 물러보고는 우리의 행동하나를 감시한다. 집에서는 독일에서 무슨 죄를 지었기에 휴가 온 너를 이렇게 까지 감시를 하느냐며 난리다. 우리와 독일에 같이 있던 동료한사람도 한국에 휴가를 와서 간첩으로 몰려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형을 살고 나온 사람이 있다. 서슬이 시퍼런 군사정권시절에 잘못 엮이면 사실이건 아니건 빨갱이로 몰려 무조건 대가를 치렀던 시절이라 겁을 먹기에 충분한 사안들이다.
허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반정부도 아니고 반국가는 더더욱 아니지 않는가? 죄 없이 고통 받는 사람들을 대변해서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일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운동을 하는 운동가도 아니다. 그냥 어려운 사람들의 억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어려운 사정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뿐이다.<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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