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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의칼럼 검정밥(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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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10-28 08:13 조회4,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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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넨 남쪽사람이 아닐세
 
하루는 뮌헨에 사는 베를린 공대 동기생인 독일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박사학위를 획득한 후 광산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일이 마음에 들지 않다하고 자립해서 돌을 부수는 파쇄기를 생산 판매하다가 독일 통일 후에 사업을 동독으로 늘였다. 통일 후에 동독에 성냥 곽 같은 많은 건물을 무너뜨리고 다시 짓게 되었는데, 이때 폐건물의 벽돌을 파쇄해서 다시 쓸 수 있게 했기 때문에 그의 회사가 많은 재미를 보았고, 1993년 말에는 그 회사의 파쇄기 판매량이 유럽시장의 40%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에 리사이클링(Recycling) 전시회가 있기에 자기 회사의 기계도 전시하고 싶으니 나더러 좀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주저 없이 승낙했다.
 
떠나기 직전 공항에서 만난 푹스 씨로부터 친구 회사와 전시하게 될 기계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푹스 씨는 통일이 된 후 동독회사들의 진모가 드러났다고 하면서 지금의 상황을 나에게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산업체 중에서도 특히 생산 공장의 실태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퇴화(退化)되어 있었고 작업능률과 생산능률은 언급할 여지도 못 되었다. 통일 전까지 모든 사업체가 국영이었기 때문에 통일 후 회사를 경영하던 당의 요원들이 사라지자 사업체는 주인 없는 고아가 되었고 그러한 처지에 빠진 능력 없는 사업체를 잡고 일으킬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통일정부는 재정지원을 하면서 파산상태에 있는 동독의 산업을 살려 일으킬 서독의 사업가와 사업체를 찾았다.
 
동독의 막데부르크(Magdeburg)에 옛날부터 전통 있는 북카우라는 철공회사가 있었다. 사업을 팽창시키면서 성공의 물결을 타고 있던 친구는 그 회사를 책임지고 지금까지 있던 자기회사의 자본을 합쳐 새 출발을 하면서 그때까지의 5000명의 인력을 500명으로 줄이고 능률개선과 품질개선을 목표로 생산을 다시 시작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의 생산회사가 없이 파쇄기에 필요한 부속품을 구입해서 조립완성해서 팔았으나 이제는 파쇄기의 모터만 제외하고는 모든 부속품을 자기 회사에서 만들어 낼 수 있었기 때문에 생산량과 품질을 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시장을 세계적으로 넓힐 계획으로 아시아의 첫 시장으로 한국에 손을 뻗어보고자 했다. 나는 모든 기계의 성능과 부속품의 이름과 기능을 읽고 배웠다.
 
KOEX에서 전시회가 있었는데 첫날에는 다음날부터 시작될 전시장을 꾸몄다. 포스터를 벽에 걸고 모니터를 설치하고 기계설명서를 번역하고 복사를 해서 비치해두는 등 모든 준비를 서둘러서 마쳤다.  이튿날부터 전시회가 시작되었다. 전시회의 과정(過程)에 대하여 사전지식이 없었던 우리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뒷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입구를 지키고 있던 순경이 건물을 빙 돌아서 정문을 이용해야 된다고 했다. 나는 전람회에 순경이 보초를 선다는 것에 벌써 뱃속에 무엇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김영삼 씨가 대통령이 되고 민정이 시작되었다면서 어찌해서 국가에서 전람회의 경비(警備)를 맡는 비자유적인 영역으로 만드는 것일까 하면서 의문을 금치 못했다. 정문으로 들어가는 쪽에는 경관들이 즐비하게 퍼져있었고 정문에 들어가니 소지품검사장과 비행장과 같은 전자탐색기가 있는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무슨 전람회가 이러한 안전시설을 필요로 하는가? 오는 관객마다 이러한 경로를 거쳐야 한다면 하루의 관람객이 얼마나 될 것인가? 라고 속으로 물었다. 소지품검사장에 내 차례가 왔다.
 
나는 파이프를 태웠기 때문에 흡연기구가 든 책 크기만한 손가방을 가지고 다녔다. 내가 손가방을 내어주니까 검사하는 여인이 열었다. 열어서 보니 담배가 든 통이 동그란 통이 아니고 사각형의 작은 도시락 같은 폭탄처럼 생긴 통이 들어 있었고, 파이프를 소제하는 화약심지처럼 생긴 소제도구가 있었고, 폭탄의 뇌관처럼 생긴 파이프 필터가 들어 있었다. 겁이 덜컥 난 검사관은 펄떡 일어서면서 이것이 무엇이냐고 고함을 쳤다. 옆에 있던 사람들도 우르르 몰려들었고 경비원들의 신경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만약의 사태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억누르고 있던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폭소를 터뜨리는 것과 겁에 질린 검사관의 신경질이 포함된 비명 같은 “이것 열어욧!” 하는 명령 비슷한 소리가 나온 것은 같은 순간이었다. 나는 차츰 웃음을 멈추면서 담배통의 뚜껑을 열었다. 노란 담배가 드러나면서 아늑한 향기가 퍼졌다. 그제야 몰려왔던 사람들이 흩어지고 검사하던 여인은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혔다. 웃음을 완전히 그치지 못한 체 전람회장소로 들어가면서 영문을 몰라 눈이 둥그렇게 나를 쳐다보던 푹스 씨 부부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푹스 씨는 한국에 오니까 옛날 동독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이제는 내가 부끄러웠다.
 
전시장소에 와서는 모든 준비를 하고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파이프에 담배를 넣고 불을 붙였다. 우리 전시장소 앞에 왔다 갔다 하던 어떤 젊은 사람이 나에게 오더니 불을 끄라고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어디에 부딪히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어제 준비시설을 할 때 전람회 책임자에게 여기서 흡연할 수 있는지 확인한 후에 전람회 손님들을 위해서 재떨이 네 개를 빌려서 여기 테이블 위에 두었는데 왜 담배를 꺼라하느냐? 당신은 누구냐? 하고 물었다. 그는 경호원이라고 하면서 오전 열한시까지만 담배를 좀 삼가 달라고 했다.
 
내가 왜 열한시까지냐고 물었더니, 대통령 영부인께서 오신다고 했다. 그러니 순서가 끝나고 대통령 부인이 퇴장하고 나면 담배를 피워도 된다고 했다. 나는 그제야 경비가 왜 그렇게 엄한지 짐작했다. 나는 오늘의 순서를 몰랐고 전람회 주최 측에서도 우리에게 그러한 프로그램을 알리지 않았다. 나는 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것은 대통령 부인이 있는 동안 담배연기에 시달릴까 봐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화재의 염려 때문에 그런 것인가? 그렇다면 대통령 부인이 있을 때는 냄새도 나서는 안 되고, 불이 일어나서도 안 되지만, 그가 없을 때는 연기가 자욱해서 눈을 뜰 수 없어도 되고, 불이 나도 된다는 말인가? 나는 아직까지 백성 중심이 아닌, 인물과 권력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이 사회가 불쌍했다.
 
그러나 나는 이번 전람회에 대통령 부인이 개장식을 한다는 것은 반가웠다.
리사이클링은 우리가 사는 대기권내의 자연을 더 이상 파괴하거나 소모하지 않고 우리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시행해야 할 현대국가의 의무적인 정책의 하나로, 국가는 물론 국민들의 관심과 호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선전과 계몽이 필요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국가의 명망 있는 사람들이 참석해서 개회를 한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푹스 씨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대통령 부인이 지나가거나 우리가 유일한 외국 참가자이기 때문에 우리 전시장에 한번 둘러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기다렸다. 대통령 부인은 몇 마디 말을 하고 개관 테이프를 자른 후에 몇 걸음 전시회장 내에 들어왔다가는 퇴장했다고 했다.
 
자기가 전람회를 열면 전시회장을 한번 돌아보고 여기저기에서 묻기도 하고 짧은 대화도 하면서, 전람회의 주제(主題)에 대하여 전력을 기울이는 회사나 사람들에게 격려를 하며 지나가는 민주사회의 지도자를 회상하면서 나는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바쁘다면 처음부터 아예 못한다고 하던지, 다른 사람에게 넘길 것이지, 기왕에 왔으면 한국의 리사이클링에 대한 방침이 어느 정도 정부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전람회 참가자와 방문객들에게 보여줄 의무가 있었다. 대통령 부인에게 그 전람회의 개회를 맡긴 것은 그의 뒤에 대통령의 그림자를 보고, 그가 하는 말과 행동에 정부의 방침과 계획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관광객의 “나도 거기 갔다 왔다" 식의 수박 겉핥기의 사진관광을 연상했다.
 
리사이클링은 아직 전문가의 말이었기 때문인지 방문객이 적었다.
찾아오는 사람들은 주로 그런 계통에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었고 일반 방문객들은 옆에 있는 전시장에 의료와 화장품 전람회가 동시에 열려서 거기에 왔다가 우리 쪽으로 많이 들어왔다.
 
하루는 대구에서 왔다는 한 일흔이 넘어 보이는 노인이 나와 함께 앉아서 기계에 대한 설명을 해달라고 했다. 원래 노인들과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나는 기꺼이 모든 것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한 시간 가량 우리는 이야기했다. 노인은 천천히 일어서며 고맙다고 하면서 나에게 결정적인 말을 던졌다.
 
“자네는 남쪽 사람은 아닐세.”
“노인장님 내가 부산 토박인데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나는 어이없는 모습으로 노인에게 반문했다.
 
“자네 말은 남쪽에서 쓰지 않는 말이네.”
 
그는 확신 있게 말하며 자리를 떴다.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그 노인의 말이 옳았다. 내가 쓰는 말에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쓰지 않는 말이 많이 들어 있었다. 내가 쓰는 말은 1960년도 초기에 쓰이던 젊은이들의 말이었다. 나는 그때의 말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가 오늘 풀어놓았는데, 그 노인은 세월과 함께 바뀌는 말을 세월과 함께 지나면서 생활화시켰기 때문에 옛날에 쓰던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어쩌면 살아 있는 말의 박물관 같았다.
나는 운전수라고 하는데 한국에는 모두 기사라고 했다. 나는 변소라고 하는데 모두 화장실이라고 했다. 나는 전차라고 하는데 모두 전철이라고 불렀다. 나는 길을 가다가 돌아서 가라고 하는데 모두 유-턴하라고 했다. 이 외에도 나의 표현에는 지금 한국에서 쓰지 않는 말들이 수없이 많았다.
 
삼십 년이라는 긴 세월에 산천이 세 번이나 바뀐다는데 어찌 말이라고 바뀌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갑자기 슬퍼졌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향도 그러한 것이 아닌가? 내가 꿈에도 잊지 못하고 눈물로 그리던 고향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다. 벌써 세 번이나 바뀐, 고향의 모습이 사라진 땅이요 도시다. 나는 고향이라고 찾아오지만 내가 찾아온 고향은 실제로 내 고향이 아니다. 내 말이 남쪽의 말이 아닌 것처럼 내가 마음 깊숙이 지니고 있고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고향은 내 고향이 아닌 것이 아닌가? 고향은 다시는 찾아볼 수 없는 상상과 추억 속의 마을이지, 현실이 아니었다. 친척들의 집에 들어 있을 때 고향이고 친구와 함께 정다운 얘기를 나눌 때에 고향이지, 문밖에 홀로 섰노라면 뉴욕이나 홍콩이나 런던이나 독일이나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얼굴만 다르다 뿐이지, 아무 것도 다른 것이 없었다. 나는 또 한번 고향을 잃는 것을 느꼈다.
 
나는 독일에 사는 교포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한국의 얼과 관습과 전통과 문화를 자식들에게 물려주겠다고 한다. 그들이 한국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얼마나 한국적인가? 우리가 쓰고 있는 말도 한국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것이 한국말이기 때문에 자손에게 물려주려고 하지 않는가?
“당신들이 하는 말은 남쪽 말이 아닐세.”
“당신들은 남쪽사람은 아니구먼.”
 
남쪽 말이 아니고 남쪽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남은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한국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내 말과 내 고향처럼 지금은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사라진 것을 한국적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려고 한다. 나는 꿈속에서 살았고, 그 꿈속에서 고향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그들의 곁에서 고향이라고 느낄 수 있는 친한 고추친구들은 고향에 없다. 재찬이는 미국에서, 보덕이는 호주에서 살고 있다. 그 물새와 그 물새가 살던 고향의 남쪽바다는 흙으로 메워져서 없어지고, 어릴 제 뛰어 놀던 동무들은 뿔뿔이 다 헤어져서 제 나름대로 마음속에 간직한 고향을 고향인양 그리워하고 있다.
 
나는 푹스 씨에게 잠깐 자리를 비어야 되겠다고 하고는 전시장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밀리며 천천히 걸었다. 내 머리 속에는 어떤 말 못할 생각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부딪치는 것 같이 혼잡했다. 나는 어떤 결정의 실마리를 찾고 있었다.
 
머리 속에는 그 노인의 말이 경종처럼 울리고 있었다. “자네 말은 남쪽 말이 아닐세.” “자네는 한국 사람이 아닐세.” “자네 고향은 한국이 아닐세.”
 
나는 뒷문으로 나왔다.
나는 고향이라고 찾아왔는데, 고향은 나더러 ‘너는 여기 사람이 아니다’ 하면서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나처럼 생겼고, 나와 같은 말을 하면서도 ‘네 말은 우리말이 아니야’ 하면서 나를 보고 비웃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부르짖고 있었다.
“아! 내 조국, 내 고향은 어디란 말인가?”
나는 바깥에 나와서 파이프에 담배를 눌러 넣고 불을 붙였다.
주차장 건너편의 봉은사에서 부처님의 생신을 축하하는 축제의 염불소리가 확성기를 통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그 시끄러운 염불소리를 듣고 있었다. 저 염불은 1000년 전이나 오늘이나 같은 염불일 것인데, 그렇다면 저 염불의 몇 %가 도대체 남쪽 말인가? 천년 전이나 오늘이나 같은 염불을 드려도 부처님은 ‘네가 올리는 염불은 남쪽 말이 아니야’ 하며 듣기를 거절하지 않기에 오늘도 옛과 같은 염불을 올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 인간의 사바세계는 왜 이렇게도 존속성이 없는가? 내 말이 남쪽말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북쪽말인가? 북쪽에서도 ‘자네 말은 경상도 사투리 투성이니까 북쪽말이 아니다’ 라며 나를 밀어낼 것이 아닌가? 아! 내 말이 거절당하지 않는 땅은 어딘가?
 
외국에서 살아가는 동안 고국은 벌써 나를 잊어버리고 “너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다”하며 나를 고국 바깥으로 밀어내고 있건만, 나는 이 고국을 잊지 못하여 어린아이가 엄마의 치맛자락을 움켜잡듯 나를 버리고 돌아서는 고국에 매달려 몸부림치며 서른 성상을 눈물 속에 넘기지 않았는가. 고국으로부터 배척당한 쓰라림과 향수라는 안개 속에서 방향을 찾지 못한 어리석음이 봉은사에서 들려오는 염불소리에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에 문득 원효대사의 <대승기신론>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깨우침이라는 뜻은 마음과 몸이 망념을 여의는 것을 말한다. (所言覺義者 謂心體離念).
 
물론 불교의 깨우침(覺)은 부처의 경지를 말하는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두 가지를 포함한 완전한 인식(認識)을 표현하겠지만, 어떤 생각(念)이 심체(心體)에 자리 잡고 그것을 지배하고 있는 한, 실제를 볼 수 있는 깨우침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망념으로부터 떠나야 되는 이치는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고향이라는 망념에서 심신을 떠나게 하자!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아랫배까지 깊이 내렸다. ‘망념에서 심체를 떠나게 하자!’ 생각하면서 머리와 마음을 정리했다. 내 마음이 차근하게 내려앉는 것과 함께 마음속에 평안이 스며들었다. 나는 타향살이 삼십년에 처음으로 내 속에 있던 고향을 끄집어내었다. 이제는 그 고향을 손바닥 위에 놓고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얻었다. 이제는 그 고향이 내 마음속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내 가슴을 찌르지 못했다. 나는 처음으로 눈물 없이 내가 지금까지 간직해 왔던 고향을 쳐다보면서 어릴 때의 기쁨을 상기하고 웃을 수 있었다. 이제는 고향생각을 눈물 없이, 향수를 아픔 없이 가질 수 있었다. 나는 내 마음속의 고향과 일대일로 마주서서 고향에 묶여 살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었다. 살 속에 깊이 박힌 가시에 시달리다 가시를 빼낸 후 그 가시를 손바닥에 놓고 쳐다보는 순간이었다.
 
삼십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동안 고향 때문에 흘린 눈물이 잔잔한 호수가 되는 것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순간 고향과 고향생각에서 해방되었다. 대구 노인에게 무언의 감사를 보내면서.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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