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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은 파독광부가 독일땅에 온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63년 파독광부 1진이 독일에 도착하면서 재독동포사회가 시작되었고, 전세계 동포사회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독광부분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셨지만 정작 개인적으로는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고생도 많으셨을 겁니다.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어찌 몇마디 필설로 다하겠습니까만 파독광부분들중에 몇분이 독일땅에 와서 겪은 체험을 여기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파독광부의 삶은 그 자체가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러니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어렵게 글을 써가실 때, 서투른 점이 있더라도 많은 성원 바랍니다. 

김재승칼럼 어머님 죄송합니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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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3,400회 작성일 13-10-11 08:02

본문

신혼살림을 차린 우리 집은 아주 오래된 집이어서 생활하는데 불편하기 짝이 없다. 바닥도 나무 바닥이어서 움직이면 소리가 많이 나고, 부엌 한쪽에 간단하게 씻을 수 있는 세면대 하나 걸어놓고 구석에 간단한 샤워시설 해놓고 세를 놓은 집이다.
화장실도 1층 복도에 있어서 옆집 세 들어 사는 집과 같이 사용해야 된다. 천정도 높아서 난방비도 많이 나올 것만 같다. 처음 시작한 살림이고 보니 이것저것 다 생각하지 못하고 싼 맛에 세를 얻었으리라 생각한다.
나야 광산까지 65Km가 되니 어차피 자동차로 출퇴근을 해야 되지만 집은 아내가 근무하는 병원 앞에 있는 집이라서 아내의 출퇴근을 위해서는 편리한 셈이다.
매일 65 km가 되는 거리를 출퇴근 하려니 나도 힘이 든다. 저녁 12시에 입항해서 아침 8시에 출항. 목욕을 하고 집에 오는 길은 항상 졸려서 운전하는 것이 여간 부담스럽다.
더군다나 겨울이면 아침 퇴근시간에 도로가 얼어붙어 고속도로에 소금을 뿌리기 전에는 미끄럽기 때문에 여간  위험한 것이 아니다. 아내는 빨리 직장을 옮길 준비를 하란다. 허지만 우선 다른 직장을 구하기 전해는 광산을 나갈 수밖에.
 
여기 있다가 귀국한 작은아버지께서 편지를 보내왔다. 아버지께서 15일전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렀단다. 알릴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어차피 오지도 못하면서 힘들어만 할 것 같아 알리지도 않고 장례를 치렀단다. 
그 때 아버지 나이 만 52세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부터 과음 때문인지 건강은 형편없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허황되게…….
자세히는 모르지만 틀림없는 아버지의 생활습관이 문제였을 것이다.
나는 뭐란 말인가? 가족을 위한답시고 어렸을 때부터 고향을 떠나 지금까지 헤매며 다닌 결과가 이거란 말인가? 독일로 떠나올 때 본 아버지 모습이 마지막이었다니.
오히려 가족을 위한다는 나의 행동이 부모님들에게 불효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다리에 힘이 쪽 빠진다. 우리가 결혼을 하던 날, 스스로 술을 한잔 따라서 앞에 놓으시고 이 잔은 며느리가 나한테 올린 술잔이라 생각하면 편지를 쓴다며 아버지의 마음을 편지로 적어 보낸 것이 우리에게 유일한 유산이 되었다.
살아계신 할머니와 어머니가 한집에서 살아야 되니 두 분 관계가 어떨 게 될까?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와 안 계실 때 집안 분위기는 완전히 다를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내가 금방 귀국할 형편도 안 되지 않는가? 어린 여동생들을 어떻게 성장할까? 학교는? 이만 저만 어깨가 무거워 지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결혼하고 막 살림을 시작한 우리가 귀국을 한다고 해도 막막하기만 하다.
아버지 비보를 듣고도 출근을 해야 된다. 그날 저녁에 출근을 하면서 “아빠의 청춘”이란 노래를 들으며 얼마나 울면서 운전을 한줄 모른다.
아내는 “지금 우리가 한국으로 귀국을 한다 해도 집안이 달라질게 없으니 내년에 아버지 탈상 때나 나갔다 와요.” 한다.   그렇게 하자. 일 년 동안 휴가비도 좀 저축을 해서 내년에 한국을 한번 다녀오자. 생각하니 마음이 차분해 진다.
아버지의 일생을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는 이론이 서있고 잘한다 하지만 가정을 위해서는 도움이 안 되었던 아버지였다. 오히려 여기저기 친인척들한테 금전적인 피해만 주고 가정하나 잘 꾸려가지 못한 아버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의 가족들한테는 우선 생활비를 보내주지 않을 수가 없다. 아버지까지 돌아가신 지금, 모른 척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 년은 빠르게 지나갔다. 제삿날에 맞추어 휴가를 얻어 아내와 같이 한국을 다녀오기로 했다. 제사도 제사지만 아버지가 안 계신 지금, 가족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한번 보아야 될 것 같다.
 
나는 그동안 여기서 학교를 진학해 보고 싶은 생각에서 여러 곳에 연락을 했는데, Hamburg과 Frankfurt Hochschule 에서는 입학이 가능하다는 연락이 왔었다. 아내도 학교에 진학한 것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분위기다. 한국에 가서 한번 집안사정을 보자. 한국 식구들이 생활이 나의 도움 없이 가능하다면 학교에 진학하고 싶은 나의 욕심이었다. 외아들이면서 장남인 나의 처지가 어떤가를 또 한 번 실감나게 한다.
 
독일에 온지 4년이 조금 넘어 돈은 모아 논 것이 없지만 결혼을 해서 아내와 함께 가족을 방문하기 감개무량하다. 그동안 아내는 첫 아이를 임신하여 장거리 여행이 위험한 시기지만 한국을 가지 않을 수 없어서 같이 출발을 했다. 처갓집 처형들도 동생이 6년 만에 휴가를 오고 또 결혼을 해서 처음 시가집에 인사를 드리러 가는데 예의는 차려야 된다면서 이바지로  시할머니, 시어머니 이불이랑, 시누이들 옷가지 준비를 하느라 법석이란다.
공항에 내려 아내는 먼저 광주 언니 집으로 가고 나만 시골로 갔다. 처갓집 장인, 장모님들은 일찍 돌아가시고 오빠는 모신문사 정치부 기자인데 특파원 자격으로 미국에 가 있으면서 유학을 하고 있어서 처형들이 부모 대행을 하는 것이다.
아내는 한국에서 꽤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을 한 사람이다. 장인께서는 병원을 운영하면서 정미소 까지 운영을 하셨던 터라 아내의 성장환경은 나하고 비 할 바가 아니어서 가난은 격어보지 않은 사람이다. 어떤 이야기를 하다보면 같은 세대이면서도 통하지 않는 부분이 많고 가난했던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해가 가지 않은 부분이 참 많다고 한다.
아내의 언니들도 부모님들이 계시지 않으니 오히려 더 신경을 쓰는 것 같다. 부모님 안 계신 다고 소홀히 할 수가 없다며 그런 이바지를 준비한 것이다. 한국에 도착한지 2일 후에 아내는 이바지를 한차 싣고 신행을 하는 형식으로 처형들과 같이 시골에 우리 집으로 와서 마당에 자리를 깔고 그 많은 시집식구들에게 인사를 먼저 한다.
얼마나 서먹서먹하고 불편한 시집 생활인가? 나는 형식적인 것이 무엇에 필요하냐며 반대를 했지만 말을 듣지 않는다. 임신까지 한 아내를 혹사를 시키는 것 같아서 참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집안에는 씻을 곳도 없고 화장실도 수세식이 아닌 재래식 화장실, 광주에서 시골로 들어가면서 화장지를 일부러 사가지고 갔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화장지 대신 짚이나 그냥 종이로 해결해야 될 판이다.
며칠 후에는 아버지 기일. 그때만 해도 마당에 영정을 만들어 놓고 상주인 난 상복을 입고 하루 종일 조문오신 손님들을 맞이해야 된다. 하루 종일 영정 앞에 앉아 있으면서 오는 손님마다 큰 절로 맞이하고 접대를 하고나니 녹초가 되었다. 그 시절에는 한국을 가려면 18시간 비행기를 타고 가야 되었다. 러시아에서 항공로를 허용하지 않아 먼저 Alaska로 가서 주유를 한 다음 비행을 계속하기 때문에 비행시간도 길고 항공료도 비쌌다. 18시간 비행에 독일과 한국의 시간차 적응도 되지 않은 시간에 하루 종일 적성에 맞지 않은 손님들을 맞이하고 나니 몸이 녹초가 된 것이다.
탈상을 마치고 이틀 후에는 처갓집 동네에 인사를 가야 했다. 고향이 해남인 아내는 그곳에 부모님들 산소도 있고 해서 인사를 간 것이다. 곡성에서 광주를 거쳐 해남까지 아스팔트도 되어있지 않은 시골길을 택시를 타고 가는데 택시가 얼마나 흔들리고 빨리 가는지 머리가 처 천정에 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해남을 다녀오고 나니 아내는 하혈을 한단다. 임신 초기어서 위험한 시기이라는 것은 알고도 무리를 했으니 당연한 결과인 것 같았다. 산부인과를 갔더니 당장 낙태를 시키잔다.
어머니는 두말도 않고 한의원에 거서 한약을 지어 오신다. 한약을 달여 마시면서 견디어 보자고 했다. 휴가를 온 형편에 움직이지 않고 누어있을 수는 없으니 조심해서 생활하면서 견디어 볼 수 있을 때 까지 견디어 보자고 한 것이다.
2년을 먼저 독일에 온 아내도 6년 만에 처음 나가본 한국이라 할 일도, 인사 다닐 곳도 많다. 연락하지 않으면 서운하다고들 하고 몇 년 만에 한국에 나와서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큰 부담인지는 전혀 이해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대로 휴가기간을 빨리도 지나간다. 아내도 그럭저럭 참고 견디며 독일에 와서 산부인과 의사와 상의를 하기로 하고 독일로 오기로 했다.
집안 형편은 살펴보니 내가 독일로 출발하기전과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아버지께서 갚아야 될 남의 빚은 아직도 2천만 원이 있단다. 빚은 오히려 더 늘어난 셈이다. 둘째 작은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재승아 너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신 것이 서운해서 그렇지 당신이 해보고 싶은 짓은 다 해보고 돌아가셨다.| 얼마나 뼈에 박힌 말인가? 그 한마디로 그동안 아버지께서 어떻게 생활하셨는가를 물어보지 안 해도 알만하다. 빛도 친척들끼리 얽혀진 빚이라 갚지 않으면 안 될 빗이란다. 그럼 이 빚을 또 갚아야 된단 말인가?
 
여기서 광산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작은아버지도 생활이 영 힘든 것 같았다. 특별한 기술도 없고 옛날 직장에 다시 복직할 수도 없는 형편이어서 여기서 귀국한 고향 사람들끼리 고향의 한 친구에게 투자를 했는데 그 친구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이다. 원래 미남형에 날씬한 체구를 가진 그분은 춤을 잘 추는 제비족이 되어 주로 돈 많은 과부들과 관계를 맺었는데 마지막엔 돈 많은 과부가 그분에게 사준 차를 몰고 다니다 교통사고가 난 것이다. 어디다 하소연 할 곳도 없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4-5명이 된 고향사람들의 전 재산을 몽땅 날리고 죽어버렸으니 관계한 고향사람들은 3년 동안 고생해서 모은 돈을 한입에 넣은 꼴이 되었다. 작은아버지는 독일에 있을 때 장만한 서울의 집도 차압이 들어와 털리고 무엇이라도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고향 사람들끼리 무슨 회사를 차렸다나.
그들끼리 누구는 사장, 누구는 전무, 누구는 상무 하면서 사무실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기가 참 애처롭기까지 했다. 고향사람들 중 한 선배만은 한국에서 공대를 졸업하고 독일에 두 번째 왔다간 분이 있었는데 그분은 따로 플라스틱 공장을 차려 운영하면서 잘 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한번 실패면 충분하지 두 번째 실패를 한다면 그 선배도 다시는 희망이 없을 텐데 잘되었구나 싶어서 공장으로 일부러 찾아가 식사를 한 끼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왔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작은아버지의 부부애가 남달라 부부간의 갈등은 없다는 것이다. 집에 차압이 나와 살림살이를 길가에다 나 내어 놓고 갈 곳이 없이 서 있으면서 작은어머니가 작은 아버지께 “ 그래도 난 당신 있으니까 행복해요.” 했다니 얼마나 잉꼬부부인가? 참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 안에서 아내와 난 진학하고픈 학교는 포기하기로 했다.  지금 한국 사정이 사정인 만큼 송금을 시키지 않고 내가 공부를 시작 한다는 것은 도저히 가능하지가 않을 것 같다. 포기하자. 나중에 또 기회를 보기로 하자.
 
독일로 돌아온 우리는 산부인과 먼저 갔다. 의사는 몸에 이상만 없으면 낙태를 시킬 필요 없다며 며칠 입원을 해서 몸조리를 하잔다. 한국의사와 독일의사들의 차이가 이것인가 싶다. 조금만 이상해도 낙태를 시키자는 의사와 왜 낙태를 시키느냐며 입원을 시키는 차이는 생명을 죽이고 살리는 차이다. 이렇게 고생을 해서 태어난 아이가 지금 34살이 된 우리 첫 아이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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