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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은 파독광부가 독일땅에 온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63년 파독광부 1진이 독일에 도착하면서 재독동포사회가 시작되었고, 전세계 동포사회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독광부분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셨지만 정작 개인적으로는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고생도 많으셨을 겁니다.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어찌 몇마디 필설로 다하겠습니까만 파독광부분들중에 몇분이 독일땅에 와서 겪은 체험을 여기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파독광부의 삶은 그 자체가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러니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어렵게 글을 써가실 때, 서투른 점이 있더라도 많은 성원 바랍니다. 

김재승칼럼 어머님 죄송합니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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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3,348회 작성일 13-09-27 07:48

본문

다른 동료들도 귀국하지 않고 여기서 좀 더 머무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여기저기 다른 직장을 물색하느라 법석이다. 허지만 광산에서 연장을 하지 않고는 체류 문제 때문에 다른 직장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여기서 결혼을 한 사람은 문제가 해결된다.
부부 중 한쪽만 체류문제가 해결되면 같이 남아있을 수 있으니까.
간호사들이야 연장하는데 어려움이 없으니 간호사와 결혼한 사람들은 체류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총각인 나는 사정이 달랐다. 광산에서 근무성적이 좋은 사람들은 연장을 시키려고 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지만 아직 확실한 알림도 없으니 나도 무슨 방법을 찾아야 된다.
고민하고 있는 터에 Dingden에 있는 Akademie Klausenhof에서 한국 사람들을 상대로 직업학교교역자들을 모집을 한단다.
2년 교육을 시켜 한국으로 귀국을 할 때면 직업학교에서 교사를 할 수 있는 자격증을 준단다. 물론 2년의 교육기간에는 광산에서와 같이 많은 월급은 아니지만 생활할 만큼 수당도 지급이 되고 체류문제도 해결을 해 준단다.
우선 거기라도 응시를 하자. 시험에만 합격을 하면 우선 체류문제와 그동안 생활비는 해결이 되지 않는가? 응시하겠다는 편지와 이력서를 보내자 시험을 보러 오란다.
약속한 날짜에 시험을 보러 갔다. 시험관인 여자 분이 유창한 한국말로 우리에게 그날 일정과 시험을 치르는 방법을 설명을 한다.
한국에 몇 년 있으면서 한국어를 배웠다는데 유창한 한국말은 우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간단한 상식문제는 필기시험으로 보고, 손의 정교함을 보려고 철사도막을 나누어 주며 무슨 모양을 만들어 보란다. 몇 일후에 합격통지서가 왔다. 우선은 3년을 마치고도 꼭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한 가지 걱정은 없어진 셈이다. 외국인으로 독일에서는 5년 동안 직업을 가지고 체류를 하고나면, 정부에서 무제한 체류할 수 있는 자격을 준다.
5년만 버티면 여기서 계속 체류할 수 있으니 나의 앞길을 차분하게 계획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형편만 허락한다면 여기서 공부도 좀 하고 싶다.
가정형편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군대에 지원입대하고 월남에 다녀와서 여기 광부로 까지 왔지만 기회만 주어진다면 계속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항상 버리지 않았다. 여기서야 학비도 내지 없으니 생활할 형편만 된다면 공부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3년 동안이야 독일생활 적응하느라, 또 한 푼이라도 더 한국에 송금시키느라 정신없이 보낸 시간이었지만, 만일 여기서 계속 머무를 수만 있다면 나의 앞날을 차분하게 계획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걸어본다. 그런데 광산에서도 연락이 왔다.
그동안 근무성적이 비교적 좋은 사람들에게 원하면 연장신청을 하란다.
다행이 나도 해당이 되어 행복한 고민을 해야 될 것 같다. 광산에서 연장을 할 것 인지, 아니면 Akademie Klausenhof로 가야될 것인지를 빨리 결정을 해야 되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 더 남아 있으려고 했던 것은 3년 동안 헛고생만 한 셈이 되었으니 남아서 돈을 더 벌어야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지 않은가? Akademie Klausenhof는 우선 일시적인 연장을 위한 대책이었다는 생각을 하니 결정이 쉬워진다.
광산에 연장신청을 하고나서  Akademie Klausenhof 에는 입교를 하지 않겠다는 연락을 한 다음 한국 가족들에도 연락을 했다. 정말 하기 싫은 광산 생활이지만 지금 다른 방법이 없다. 우선 광산생활을 더 하면서 앞길을 생각해 보자. 3년을 견디기도 힘들 것만 생활을 연장을 하려고 하는 내 신세가 한심스럽기도 했다.
그즈음 나도 여자를 사귀고 있었다. 그녀는 지인의 결혼식에 갔다가 신부 측 친구로 결혼식을 도외주고 있었던 아가씨다. 결혼식을 마치고 난 그날, 결혼식에 수고한 사람 몇몇을 초대해,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저녁 늦게까지 회식을 했었는데, 나도 그 자리에 초대되어 몇 명의 신부 측 친구들과 같이 시간을 가졌었다. 그중에서 제일 행동이 무게가 있어 보이고 진실성이 있어 보이는 아가씨가 있었는데 그녀가 지금 36년 동안 나와 생을 같이 하고 있는 아내다. 인연이 되려고 했던지 결혼식 후에 Witten에서 신혼생활을 하고 있는 그 집의 초대를 받아 가는 도중,  Duisburg 역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 같이 가려고  서성이는데 우연히 그 아가씨를 만난 것이다. Neuss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그녀는 다른 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단다. 우리는 서로 안면이 있는 터라 자연스럽게 그녀까지 대동하고 그 신혼집으로 갔었다. 저녁 내내 잠도 자지 않고 이야기를 하면서 뜬 눈으로 보냈어도 얼마나 재미있었든지 피곤해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이튿날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를 Neuss까지 태워다 주려고 다른 일행과 같이 그녀 기숙사로 갔었다. 그녀 왈, 밥을 해 줄 테니 저녁밥을 먹고 가란다. 같이 갔던 사람들이 다들 원하는 눈치다. 난, 그날 저녁 야간반 공휴작업을 하기로 약속이 되어있어서 집에 가서 잠깐이라도 눈을 부치고 가려고 했었는데, 내 차를 타고 같던 그들 때문에 혼자 가버릴 수도 없었다. 기숙사 좁은 방에서 저녁을 얻어먹고 K-Lintfort에 다른 일행들을 실어다 주고서 아슬아슬 하게 입항시간에 맞추어 직접 광산으로 가서 하루 힘든 공휴작업을 한 일이 있었다. 2일 동안을 뜬눈이로 보낸 것이다. 같이 갔던 지인들은 나와 그녀를 엮어주었으면 하는 욕심에서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후로 그녀와 연락을 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Sauerland 캠핑도 다녀오면서 내가 휴가를 받아 그녀 기숙사를 찾아갈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지나고 보니 3년이란 시간이 참 빨리 지나간 것 같았다. 열심히 노력한다고 했었는데 한국에 남는 건 하나도 없지, 아버지의 생활도 달라진 것이 없지 참 한심한 생각만 들었다.
하나 있는 외아들을 월남 전쟁터로, 독일 광부로 보내고 나서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은 아버지를 원망도 해보지만 근본적인 해결방법은 없다. 한 푼이라도 아껴서 집안을 다시 일으켜야 되겠다는 생각이 아니고, 옛날 그대로 지역의 해결사 노릇이나 하면서 무슨 사업을 하겠다고 집안일은 신경을 쓰지 않은 아버지의 생활, 그 자체가 변해야 되는데 가끔 전해들은 고국 소식은 그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가정하나 책임 못 지고 옛날과 변함없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엉뚱한 생활만 하고 있는 아버지는 집안 식구들도 포기한 상태인 모양이다.
월남에서 귀국해서, 전부터서 집안 식구들이 가지고 싶어 했던 신작로 옆에 우리가 소작하고 있는 김 씨 문중 논 위의 밭뙈기와 같이 사주고 온 다른 논 몇 마지기도 무슨 사업자금 한다고 다 팔아버렸다는 연락이다. 정말 해도 너무하신다. 도저히 아버지를 믿고 더 이상 송금을 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이 밑의 여동생들의 학비는 서울에 계시는 고모한테 직접 송금을 시켰더니 학교들은 다니고 있는 모양이다.
내 고민과는 관계없이 한국에서는 또 송금을 시켜 달라는 연락이 꾸준히 온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마침 광산에서 3년을 마친 사람들에게 지급되는 Korea Fond라는 돈을 한국으로 송금을 시켜야 되는데 송금시킬 주소를 보내라는 연락이 왔다. 독일에는 연금제도가 잘 되어있다. 지금은 연장이 되어 65세가 넘어야 연금이 지급되지만, 그 시절 60세가 되면 지급되는 연금을 위해서 평생 일하는 동안 본인이 50%, 회사에서 50%를 부담해서 본인 몫으로 연금보험을 들어준다. 60세가 넘어야 찾을 수 있는 연금보험금을 한국 사람들에게는 부어 놓은 전액을 지급 하는 것이다. 광산생활 3년을 마치고 여기서 연장을 한 사람에게도 3년 동안 부어 놓은 금액을 Korea Fond라는 명목으로 지급을 하는데, 이 돈은 여기서 찾을 수 없고 무조건 한국으로 송금을 시켜야 된다. 그 시절 1만 3천 마르크이었으니 꽤 큰돈이 또 아버지에게 송금되게 생겼다. 얘라 모르겠다. 버린 셈 치자. 송금을 안 시킬 수 없고 할 수 없이 아버지께 또 송금을 시켜 주었다.
 
결혼식 날짜가 잡혔다.
생각하면 7남매 중 외아들이면서 장남인 나에게 시집을 오겠다고 결단을 한 아내가 될 사람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장남만 되어도 결혼하기가 힘들다고 한 시절이 아닌가? 그렇다고 가진 것이 있나? 늦어질 줄만 알았던 결혼식 날자가 잡히자 부모님들은 환영하는 분위기다.
독일에 와서 5년을 근무한 그녀는, 오빠가 있는 미국으로 건너갈까 생각하고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터였단다. 이종 사촌 오빠 한분이 이곳 Frankfurt에서 살고 있었는데 소식을 듣자 이분이 더 서두르는 것 같았다.
결혼할 날을 받고 결혼식은 우리 광산 기숙사 앞에 있는 교회에서 한국목사님을 모시고 기독교식 결혼식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지금까지 여기 와서 교회에 나가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부담스러웠지만 교회에 나가는 동료들의 도움으로 결혼식을 치르기로 했다.
그녀가 Bochum 한인교회에 교인으로 교적등록이 되어 기독교식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것이다. 요즈음이야 여기서 결혼식을 하면 한국에 친인척들도 결혼식에 참석하곤 하지만, 그 시절에는 결혼식 때문에 가족들이 여길 올 수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지금이야 무비자로 3개월은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못가는 나라가 없지만 그 시절은 외국을 나가려면 무조건 비자를 받아야 된다. 그것도 초청대상은 60이 넘은 사람으로 여기서 체류하는 동안 경제적으로나 형사상 문제를 책임지겠다는 공증을 받아 초청장과 함께  한국에 있는 독일 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받아야 올 수가 있었을 것이다. 항공료도 알라스카를 경유해야 이곳을 왕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무척 비쌌다. 3000마르크가 넘는 금액을 지불해야 한사람 항공 표를 구입할 수 있었으니 항공료와 다른 비용이 부담이 되어 가족을 초청한 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혼식은 한국에서 남독 교회에 파견 나와 있는 박OO 목사님 주례로 올렸는데 그날 잊히지 않는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한 사건은 결혼식을 마치고 2층에서 피로연을 하는데 갑자기 경찰차와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우리에게로 오는 소리가 났다. 일어나서 나가보니 피로연에 참석했던 동료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2층 피로연하는 복도에서 난간으로 지하실 까지 떨어졌다는 것이다. 부상정도는 구급차가 실고 갔으니 모르겠단다. 궁금하고 마음이 불안했지만 신랑인 입장에서 병원으로 달려갈 수도 없고 피로연을 계속하는 방법뿐이 없었다.
또 다른 사건은 결혼식 날, 신랑, 신부가 타는 자동차를 고향선배 되는 사람이 운전을 하겠다고 나선데 부터다. 그 선배는 한국에서 운전을 했던 사람이지만 한국면허증을 이곳에 와서 독일면허증으로 바꾸지도 않고 음주 운전을 하다가 적발되어 한국면허증 압수당해 면허증도 없는 사람이다. 면허증이 없이 어떻게 운전을 하느냐고 내가 묻자 나의 면허증을 달랜다.
나를 위해서 운전을 해주겠다고 하는데 거절할 수가 없어서 나의 면허증을 주었더니, 그날 저녁에 피로연을 마치고 우리 집으로 가는 도중에 음주운전으로 경찰에 적발 된 것이다. 헌데 이 선배는 오늘 결혼을 한 신랑이 자가라고 이야길 했단다. 2층에서 떨어진 사건이 있어서 경찰서에서도 한국인 결혼식이 있다는 내용은 알고 있었는데 면허증을 보니 신랑이름이요, 자동차 트렁크를 열어보니 선물로 꽉 차 있었으니 결혼한 신랑이라고 인정을 할 수밖에.
지금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날 경찰이 “오늘 결혼한 신랑을 음주운전으로 적발 한다는 것은 우리도 너무 매정한 처사인 것 같아서 오늘 한번 봐 줄 테니 여기다 차 세워놓고 택시타고 가라” 하면서 택시를 불러주어 왔다며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 들으니 2층에서 떨어진 동료도 큰 부상 없이 괜찮은데 하루 병원에 입원하기로 했다며 병원을 다녀온 동료가 일러주어 안심을 하고 이튿날 병원을 찾아가니 오히려 소란을 끼쳐 미안하다며 쑥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만일 2층에서 떨진 동료가 심한 부상이나 당했다면 우리 입장에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경찰이 음주운전으로 적발하고 나중에 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경우 면허증을 빌려준 나와 그 사람은 무슨 처벌을 받았을까? 생각만 해도 아슬아슬한 사건들이었다.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 아내도 Castrop-Rauxel로 병원을 옮겨서 근무하고 있었다. 결혼식후 우리는 Castrop-Rauxel에 화장실도 밖 복도에 있는 방2칸짜리 집을 얻어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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