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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승칼럼 어머님 죄송합니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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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09-10 08:46 조회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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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선배들이나 작은아버지께서도 귀국날짜가 되어간다. 광산에서 근무 중 사고를 당한 적도 있었으며 또 병가들을 많이 내서 곡가점수도 좋지 않고 또 정부에서 3년을 마치면 다 돌려보내려는 정책 때문에 연장이란 생각할 수도 없는 모양이다.
그동안 여러 번 만나 여행도 같이하고 또 고향 선배들 중 생일만 돌아와도 서로 초대해서 거창한 생일잔치도 하면서 고향사람들끼리 우정을 다져왔는데 벌써 귀국들을 할 시간이 되었다.
작은아버지와는 지금까지 생활에 변함이 없는 아버지 이야길 하면서 집안걱정을 많이 했지만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집안을 살려보겠다고 외아들인 내가 월남으로, 독일광부로 헤매고 다녀도 옛날에 대책 없는 그 생활에는 변함이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송금을 시키지 않으면 다른 식구들의 생활이 빤하니 대책이 없다 .
 
형제 중 제일 막내인 작은아버지도 아버지한테는 직설적인 충고를 함부로 못한다.
워낙 꽐꽐한 아버지 성격 때문에 집안 식구들이 아버지한테는 다들 눈치만 보는 실정이다.
작은아버지는 나더러 빨리 장가를 가란다.  장가를 가야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고 둘이 벌어서 우리 가정 위주로 경제력을 살려라 는 것이다.
꼭 장가를 가기 싫은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 주제에 어디서 여자를 구해?” 하는 생각에 다른 사람들 같이 주말에 일부러 여자들을 찾아다니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인연이 있으면 누굴 만나겠지. 우선 착실하게 근무나 잘 하자. 세월이 흐르다 보면 무슨 수가 생기겠지.” 남들은 아는 곳이 없어도 한국 간호사들이 와 있는 기숙사를 찾아다니며 여자들을 사귀려고 주말만 되면 바쁘게 돌아다니지만 나는 아직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몇 년이 지나자 이제는 누구의 도움 없이도 혼자 독일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말도 잘은 못하지만 어디 가서도 내 생각을 전달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으니 통역 도움도 필요 없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내가 처리할 수가 있어서 독일생활을 하는데 부담이 훨씬 적어진 기분이다. 독일은 국민들이 법을 잘 지키고  가식이 없이 정직하게 살아가는 나라다.
노력한 만큼 얻어서 사는 나라다.
누구를 속이려고도 하지도 않고 주어진 일에 충실하며, 직장에서도 한번 직책이 주어지면 그 자리에서 승진에 신경 쓰지 않고 20-30년 연금이 들어갈 때 까지 한 책상에서 근무를 하다 퇴직을 한다. 한국같이 몇 년에 한 번씩 승진을 하지 못하면, 또 후배가 먼저 승진을 하면 선배는 자연히 퇴직을 해야 되는 그런 사고방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 공장에서 근무를 하는 사람들도 한곳에서 똑같은 동작을 몇 십 년 하다가 퇴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주어진 직업을 천식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일곱 사람이 모여야 담배를 피우려고 성냥불을 켠다는 절약형 국민들이라는 이야기는 들어왔지만 국민들의 검소한 모습들을 실제 체험하며 살아가는 우리들도 이 사람들을 점점 닳아 가는 것 같다.
 
법은 만민에게 평등하다 는 말을 실현하는 나라다. 오히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법을 철저히 잘 지키는 나라가 독일이다. 면허증을 심사하고 감독하는 관공서 주임이 음주운전을 하다가 경찰에게 적발되었는데 안 그래야 될 사람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 하여 1년 징역형을 보너스로 선고한 나라다.
또 NRW 주지사 자동차가 시내에서 과속으로 적발되어 회의시간 때문이라면 이유를 말하자, 정말 공무를 위한 과속인지를 확인해서 벌금을 물리는 나라다.
한국에서는 가능한 일인가? 자기 상관을 적발할 경찰이 한국에는 있을까? 싶다.
한국 같으면 그 차를 세웠다고 경찰이 문책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경상도 상주에선가 경찰서장이 출근하는 시간에 신호등을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빨간 신호에 한 번도 걸리지 않고 출근할 수 있도록 했다는 기사를 읽고 정말 독일에서는 가능한 일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법을 지키지 않는 나라, 지위가 높을수록 국민의 4대 의무를 다하지 않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 그리고 자식들까지 군대를 다녀 온 사람들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생각해보면  대한민국과 비교가 되는 나라가 이곳 독일이다.
“진짜 사회주의가 이 나라가 아닐까?” 국민들의 정직한 준법정신이 이 나라를 견고하고 빠른 발전을 이루지 안했나 싶다.
잘못을 저지른 만큼 처벌을 받고, 법은 전 국민이 똑같이 지켜야 되고, 그렇게 잘사는 사람도 못사는 사람도 없으며, 도시나 시골이나 생활수준이 같고 똑같이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바로 사회주의자들이 원하는 나라가 아닌가 싶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살다보니 우리도 이 사회에 젖어간다.
지연, 학연, 혈연이 통하지 않고,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지만 법을 위반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지 고발을 하는 고발정신이 강한나라, 히틀러의 만행을 인정하고 지금도 유대인에게 변상을 계속하면서 추모 지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알리는 나라. 직장이 없어서 가난한 사람에게는 정부에서 지원금을 주면서 생활에 어려움이 없게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있는 나라다. 
사회가 너무 맑아서 부정이라는 것을 모르고 생활하는 이곳 독일에서 정치인들도 조그만 잘못된 과거나 잘못이 발각되면 변명하려고 하지도 않고 깨끗이 물러난다.
사회가 너무 맑고 가정위주로 살아가는 곳이어서 한국남자들에게는 너무 매력 없는 나라라는 말들을 농담 삼아 하곤 했지만, 어쩜 우리에게는 마음 놓고 노력하며 살 수 있는 이 나라에 매력을 더 느낀다.
독일에 온지 3년이 거의 다 되어 가는데도 고국의 집은 별 변화가 없는 눈치다. “깨진 독에 물 붓기”란 속담이 생각난다. 3년만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면 한국에 가서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을 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닌 모양이다. 아버지를 믿고 여기서 송금을 한 내가 잘못이었을까? 허지만 어떻게 한단 말인가? 급하다며 송금을 시켜 달라는데.
이대로 귀국을 할 수가 없다. 남는 게 하나도 없는 눈치인데 이대로 귀국을 한다한들 한국에 가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 광산에서 더 연장을 할 수 있다면 더 연장을 해서 근무를 하고 싶은 생각이다.
작은아버지는 귀국을 하면서 “어떻게든 남아있을 수가 있으면 남아 있어라!”는 말을 남기고 귀국을 했다. 남아 있을 수 있는 무슨 방법이 있겠지.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마음이 조급해 진다. 아직 광산에서는 연장에 대한 말이 없다.
차라리 결혼을 할까? 그렇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건네 온 곳은 몇 군데 있다. 그전에 다녀온 4개국 여행 때 만났던 몇 몇 여자들에도 연락이 온다. 여행 가서야 45명이 넘는 인원이 여행을 했는데도 총각은 딱 4명뿐이었으니 충분히 여자들이 관심을 가졌을 만 했다. 허지만 그렇게 마음이 내키는 곳이 없다.
이러는 동안에 여기에 유학 온 학생 한 사람이 자기가 중매를 서겠다고 나선다.
자기 동생이 Berlin에서 간호사 생활을 하고 있는데 결혼할 처녀가 한사람 있다면서 만나볼 수 있게 자기하고 같이 Berlin을 가잔다.
그 시절이야 동, 서독으로 분단되어 있었으며 서독의 Berlin은 동독 안에 있었으니 동독을 지나야 Berlin에 들어갈 수가 있다. 한번 다녀오면 여권에 동독을 통과했다는 도장을 찍히는데 한국정부에서 그것을 좋게 보지 않는다며 통과하는 것보다 그 도장 받는 것을 꺼려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 유학생도 적극적이고 나도 한번쯤은 다녀오고 싶은 생각도 있고 해서 다녀오기로 약속은 했는데 그 학생의 여권이 거주허가 신청을 위해 시청에 제출된 상태라 여권이 없단다.
나중에 갈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이왕 가려고 마음먹었으니 남의 여권을 빌려서 라도 가기로 했다. 그 시절 남의 여권을 빌려서 외국을 다녀온 예는 참 많다.
우리가 서양 사람들 보면 얼굴을 잘 구별 못하듯이 이곳 유럽에서도 동양 사람들의 얼굴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여권을 관공서 제출하고 여권이 없을 때나, 다른 나라를 갈 때 비자가 필요했던 그 시절, 비자를 받아놓은 동료들의 여권을 가지고 이웃인 Holland나 다른 유럽 국가들을  여행했던 예가 참 많았다.
우리도 남의 여권을 빌려서 가는 방법뿐이 없었다. 나도 나의 여권을 빌려도 주어보고 남의 여권가지고 유럽 다른 나라를 다녀온 적도 있었으니 가볍게 생각하고 그 학생을 위한 여권을 동료로부터 빌려 Berlin으로 나섰다. 자동차를 몰고 하노버를 거쳐 동독으로 넘어가는 국경에서 1시간이 넘도록 기다리긴 했지만 무사히 통과해서 Berlin에 갈 수가 있었다.
도착한 저녁에는 그 동생 집으로 가서 저녁을 얻어먹고 그 친구를 소개 시켜 주어 만나곤 했다. 그녀도 촌티가 나는 나에게 별 관심이 없었겠지만 나도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 여자는 초면인 나에게 자기는 5만 마르크란 돈을 모아 놓았단다. 우리끼리 유행어로 여자가 돈을 만 마르크를 모았으면 별이 한 개, 2만 마르크를 모아놓았으면 별이 2개 하고 표현했는데 별이 5개인 셈이다. 그 소리를 듣고 나니 오히려 나를 돈 가지고 꼬이려고 하나? 하는 생각에 괜히 Berlin을 왔구나 하는 후회까지 생긴다.
저녁에 헤어지고 나는 그 학생과 함께 Hotel에서 잠을 자고 이튿날 그냥 내려오기로 했다.  모든 비용은 내가 썼으니 연료비, 호텔비, 식사비 등도 하루를 더 머무르면 머무를수록 내 돈만 없어지는 판국이다. 이튿날 내려오기로 결정하고 그 동생들과는 인사를 하고 우선  Berlin에서 연료를 가득 채우고 서독으로 출발했다.
헌데 사건이 여기서 터진 것이다. 동독으로 넘어가는 국경에서 우리들의 여권을 제출하고 통과 허가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 여권을 가지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검문소 경찰이 우리 차를 한쪽으로 세우라며 그 학생의 여권이 본인 것이 아니란다.
우리가 계속 우기자 이 사람들은 그 학생의 사진을 찍어 얼굴 모양을 비교한다. 먼저 귀 모양이 사진 두 장이 일치하지 않는단다. 귀 모양을 보고 본인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그 경찰한테는 우리가 모든 걸 고백할 수밖에는 없었다.
국경에서 실랑이 하는 시간이 벌써 3시간이 지나자 우리도 지치고 그 검문소 경찰들도 자꾸 신경질적이 되어 가는데 더 이상 버틸 근거도 힘도 없다.
우리가 모든 것을 고백하자 또 여권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3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다. 그 몇 십 분이 그렇게 불안 할 수가 없었다.
그 학생은 이제는 유학이고 뭐고 다 틀렸다며 불안해하고 나도 남의 여권을 빌려 왔으니 여권을 빌려준 그 동료한테 무슨 변명을 해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한참 후에 그 경찰이 나와서 “우리가 당신을 감옥으로 보낼 수도 있고 벌금을 물리수도 있고 여권을 압수할 수도 있지만 오늘은 특별히 봐주니 남의 여권을 가지고 온 당신은 Berlin으로 돌아가 비행기를 타고 서독으로 넘어가고 당신을 자동차로 내려 갈 수 있습니다. 단, 다시 자동차로 넘어가려고 시험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오늘 특별 근무를 할 터이니 다시 넘어가려다가 발각이 되면 그때는 감옥행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선 안심은 되었다. 법적인 처벌은 면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 시절 공산주의에 대한 선입견이 얼마나 무섭다는 생각만 했었는가? 사상교육을 철저히 받았던 때라 우선 북한 생각을 하면서 인권이 유린당하면서 사는 사회가 공산주의가 아닌가?
만일 우리를 연행해서 법적인 조치를 취한다면, 하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우리 생각 이었지만, 우리를 그냥 돌려보낸 이유는 그 여권을 가지고 이미 Berlin으로 오면서 한번 통과를 했기 때문에 만일 우리를 처벌하려면 그 시간 검문소 근무를 했던 근무자도 같이 처벌을 받게 되니 우리를 그냥 보낸 것이 아닌가 싶었다.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Berlin으로 다시 돌아왔다. 시간이 늦어 이미 서독으로 가는 비행기도 끊긴 시간이어서 내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가야되어서 호텔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다.
호텔 비를 지불하고 그 학생 비행기 표를 사고 나니 수중에 가져온 돈이 다 바닥이 났다.
차에 연료라도 가득 차 있어서 다행이다 싶다.
저녁은 굶고 아침에 일어나 그 학생을 비행장에 까지 실어다 주느라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호텔에서 나왔지만 그날은 왜 그리 길도 잘 찾지 못하고 시내를 헤매고 다녔는지 모른다.
나중에는 비행기 시간 때문에 시간이 급하자 신호위반을 하면서 겨우 출발시간 몇 분 전에 그 학생을 공항에 바래다줄 수 있었다. 공항에서 그 학생과 헤어지고 혼자 서독으로 내려온다.
집으로 오기위해 다시 동독으로 들어가려고 국경에서 기다리는데 우리가 사는 곳까지 같이 타고 가자며 행선지를 쓴 종이를 들고 서있는 사람을 한 쌍을 태웠다.
속셈으로는 거기까지 실어다 주는데 설마 차라도 한잔 사겠지 하는 계산도 했다.  
허지만 그들은 차에 타자마자 말다툼을 시작한다. 여행 중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연인들 사이인 것 같은데 나에게 차를 사주기는 커녕 오히려 내 눈치만 보는 것 같다.
여러 가지로 힘들고 고생만 했던 Berlin여행이었다. 모든 걸 그냥 잊기로 했다.
나중에 그 학생하고도, 또 Berlin 그 아가씨하고도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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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님의 댓글

이사람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분단상태였던 당시 일들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군요.<br />그래도 사건이 그정도로 무마되어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고<br />마치 내가 당한 것처럼 조마조마 했습니다.<br /><br />계속 잘 읽겠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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