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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은 파독광부가 독일땅에 온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63년 파독광부 1진이 독일에 도착하면서 재독동포사회가 시작되었고, 전세계 동포사회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독광부분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셨지만 정작 개인적으로는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고생도 많으셨을 겁니다.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어찌 몇마디 필설로 다하겠습니까만 파독광부분들중에 몇분이 독일땅에 와서 겪은 체험을 여기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파독광부의 삶은 그 자체가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러니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어렵게 글을 써가실 때, 서투른 점이 있더라도 많은 성원 바랍니다. 

이정의칼럼 검정밥(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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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3,220회 작성일 13-08-24 10:44

본문

딸이 본 나의 조국1
1988년 7월 어머님의 제삿날에 나는 한국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 말을 들은 코리나가 자기도 방학이니 함께 가겠다고 했다. 딸이 나와 함께 아버지의 조국에 가고 싶다고 하니 나는 기뻤다. 그러나 딸을 한국으로 데리고 간다는 것은 나에겐 커다란 문제점이 되었다.
 
첫째 코리나는 우리말을 할 줄 몰랐다. 비록 제가 대학교에서 한국어 세미나에 참석하지만 회화는 아직 가능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한국인일 경우 집에서 우리말을 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어느 정도 한국어를 이해할 수 있으나 독일 엄마를 가진 코리나는 우리말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나이에 나는 전차와 기차로 두 시간이나 걸리는 도시에 있는 학교에 통학했기 때문에 아기가 아직 자고 있을 때에 집을 나갔고 하루종일 강의와 세미나를 채우고 저녁에 집에 오면 아기는 벌써 잠자리에 들어가 있었다. 겨우 주말에 아리랑과 산토끼 노래를 부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것만 해도 나에겐 엄청난 즐거움이었다. 아기가 부르는 노래는 향수에 지친 내 마음을 달래주는 생명수와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쉽고 안타까운 심정이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1950년도 후반기에 하와이 2세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들이 한국말을 하지 못한다고 모든 국민과 신문이 노여움과 더불어 비평한 것을 내가 기억하고 있고 또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마음 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자식에게 내 나랏말을 가르치겠다는 계획을 실천하지 못한 채 그때의 하와이 교포처럼 말 못하는 자식을 내 조국에 데리고 가는 처지에 달했다.
 
둘째 코리나는 한국을 전혀 몰랐다. 실제로 나는 코리나에게 한국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았다. 코리나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에 시작한 민주운동으로 인하여 나는 귀국하는 것을 단념해 버렸고, 내 자신이 또한 정신적으로 큰 부담이 되는 향수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기 때문에 딸에게 두 개의 조국을 주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의 역사와 정치문제를 제외하고는 생활문화에 대해서 딸이 직접 책에서 읽은 것 외에는 가르쳐 준 것이 없었다.
 
코리나가 함께 가겠다는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딸에게 아버지의 고국을 보여주는 것이 한없이 기뻤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딸에게 한국을 가르쳐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이제는 대학에 다니는 딸과 한국 생활문화의 첫 상봉을 두려워했다. 도대체 딸이 한국문화를 어떻게 받아드리고 한국사회를 어떻게 볼까? 처음에는 코리나에게 한국의 생활문화, 도덕관념, 예의, 대인관계 등에 대하여 며칠 배워 주려고 했으나 나는 생각을 고쳐서 모든 것을 딸의 눈으로 직접 듣고 보고 경험하도록 했다. 그래서 나는 딸에게 한국관광에 대한 책자를 구해서 한국에 대한 예비지식을 준비하라고만 했다.
 
딸이본 나의 조국 1
나는 딸과 함께 조국 가는 비행기를 탔다.
시집간 새색시가 낳은 자식을 거느리고 친정 부모님을 뵈러 가는 기분이었다. 작년 내가 23년만에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했을 때는 계속 서울에서 어머님 병석 곁에 앉아서 지내느라고 그리웠던 고향 부산은 하루 저녁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 방문하는 길은 24년 만에 정말 정식으로 고향과 조국을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거기에다 자식까지 데리고 가는 길이니 내 마음속이 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가 비행기 타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모두 함께 고향을 방문할 수 있을 것을 하며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나는 딸에게 내 조국 내 고향을 자랑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자랑스러웠다. 비행 중에 아버지의 조국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좋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나의 자랑을 듣고 있던 딸이 나에게 물었다.
 
“아버지 무엇이 좋고 아름다우며 자랑스러운지 하나하나 말씀해 주세요.”
 
나는 실제로 자랑할 것이 없었다. 자랑할 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고향을 모르고 있었다. 그동안에 변한 조국은 내가 없었던 24년 동안 다른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정형수술을 한 새 모습을 나도 아직 보지 못했다. 변했다고 들은 조국에 무엇이 어떻게 변했는지 나는 몰랐다. 내가 아름답다고 자랑하던 조국은 24년 전 내가 조국을 떠날 때 보았던 동족상잔의 쓰라린 상처를 핥으며 가난에 시달리던 촌색시였다. 보릿고개를 넘으면서 배고파 허우적거리며 쓰러져 간 형제를 슬퍼하고, 겨울에는 추위에 못 이겨 얼어 죽은 자매를 일에 지치고 터진 손으로 묻어야 했던, 먹지 못하고 허기져서 볼모양이 없던 촌색시였다. 지금은 예쁘게 화장을 하고 세련되고 잘 꾸며진 모습을 했기 때문에 내가 길거리에서 그를 만날 경우에도 어쩌면 나는 모르고 지나칠 처지에 있었다. 그러한 내가 딸에게 이것저것 자세히 구체적으로 설명해 줄 수 없었다. 그제야 나는 들뜬 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리가 한국에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아름답고 좋은 것을 볼 수 있겠지 하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나는 아내가 나에게 하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신의 조국에는 모든 것이 좋고 아름다운 줄, 나는 당신께서 들어서 알고 있어요. 사과는 아기 머리만 하고, 수박은 보름달보다 더 크고, 공기가 하도 맑아서 십리 밖의 꽃향내를 맡을 수 있고, 졸졸 흐르는 개울물은 어디에서나 마셔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이십사개 성상이 지난 오늘에도 그럴까?
 
어머님의 상날에 우리는 모두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에 사는 친척들과 더불어 작은 버스 두 대를 빌려 어머님의 묘가 있는 김해 공원묘지로 갔다. 나의 짧은 기도가 있은 후에 모두 자기 나름대로 어머님의 영전에 꿇어 엎드려 곡도 하고 절도 했다. 코리나는 죽은 이를 사모하는 한국인들을 눈여겨 지켜보고 있었다.
 
공동묘지에서 부산 누님댁으로 가는 동안 딸은 제가 오늘 경험한 것에 대한 느낌을 말했다. 마을 한가운데에 공원식으로 되어 있는 독일의 공동묘지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에 있는 한국의 공동묘지를 비교한 후에 죽은 자를 추모하는 데에는 유럽인들이 더 열심이고 또 어떤 면에선 진실한 것 같다고 했다. 한국에는 오늘과 같은 제삿날이나 혹은 성묘할 때나 명절에만 묘지에 오지만, 독일에는 매주 혹은 적어도 한 달에 한번은 죽은 이를 생각하고 묘를 찾아가는 사람이 많지 않느냐고 하면서 한국에는 의무적인 이면이 보인다고 했다. 묘 앞에서 꿇어 엎드려 애곡하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하면서 어떤 우상이나 무덤을 신봉해서 애읍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망인을 생각하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경의와 애도를 표하는 것이 얼마나 순수하냐고 했다. 그렇지만 무덤 앞에서 애곡할 때와 무덤까지 가거나 혹은 무덤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 깔깔거리고 웃으며 화기애애한 애곡 전후를 비교하면 무덤 앞에서 연출되는 애곡이 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누가 그것이 쇼라고 단정할 수 있느냐? 땅속에 묻힌 사랑하던 사람을 생각하면 인간인 이상 눈물을 흘리며 죽은이가 안타까워 몸부림치는 그 장면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했다.
 
신학을 전공하는 사람의 말이라서 나는 귀담아 들었다.
 
“아버지. 할아버지 묘는 어디에 있어요?”
 
“할아버지 묘는 내 고향 동삼동 우리 밭 가에 모셨는데, 네 아저씨가 토지를 팔 때 그 묘터까지 팔았다. 그래서 그곳에 고려신학대학을 건축한다고 묘를 옮기라는 통지가 와서 할머니께서 묘를 파고 할아버지 유해는 화장한 후에 남은 뼈와 재는 바다에 뿌렸다고 하셨다.”
 
“왜 유골을 담은 항아리를 묻어 묘를 세우거나 어디 지정된 곳에 안치하지 않았어요?”
 
“한국에선 불교인들은 화장해서 유골단지를 절에 안치시키는데, 기독교인들은 화장을 하지 않고 무덤을 세운다. 할머니께서 할아버지 유해를 화장하게 하신 것은 아들이 한국에 살지 않으니까 훗날에 무덤을 돌볼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셔서 그렇게 하셨다.”
 
“한국식으로 판단한다면 아버지는 불효자식에 속하지요?”
 
나는 가슴이 콱 막히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딸이 나를 괴롭히기 위하여 고의로 한 말이 아니었지만 그 말은 내 심장의 피를 거꾸로 흐르게 할 정도로 나에게 충격을 줬다. 오르막을 오르는 기관차의 피스톤처럼 바쁘게 고동치는 가슴을 억제하면서 나는 힘없고 나즈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네말이 맞다. 네 아버지는 불효 중의 불효에 속하는 사람이다. 나의 잘못으로 할아버지의 유해도 간추리지 못하고 또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눈도 감겨 드리지 못한 불효를 저질렀어.”
 
나는 눈물을 억제하듯 먼 하늘을 쳐다보며 어머님께서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 전화로 하신 말씀을 되새기고 있었다.
 
“나는 네가 사는 것을 보고 왔으니까 걱정없이 천국에 간다. 너는 불효라고 생각하지 말라. 부모가 죽을 때 눈을 감겨 주는 것도 효도이지만, 부모가 죽을 때 자식 걱정하지 않고 죽게 하는 것도 효도니라.”
 
눈가에 스며드는 눈물과 내 마음을 아프게 해서 미안해 하며 내 손을 잡는 딸의 손을 느끼면서.
 
이튿날 코리나와 함께 외삼촌댁으로 갔다. 큰 이모님과 작은 이모님이 오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아흔이 넘으신 큰 이모님은 코리나의 손을 꼭 잡으시면서 반가운 인사말씀을 하셨다.
 
“내가 너를 받아주어서 정이 들겠나, 내가 너를 업고 키워서 정이 들겠나, 네가 내 말을 알아들어서 정이 들겠나? 그러나 네 속에 내 피가 흐르는 것을 아니 어찌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
 
말씀과 함께 코리나를 쓰다듬어 주셨다. 영문을 모르는 코리나는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이모님의 말씀을 번역해 주었다. 말씀을 이해한 코리나는 할머님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나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 라는 말을 상기했다.
 
그 후 코리나와 조카딸 윤아를 데리고 제주도에 둘렀다가 양산 통도사와 경주 불국사와 합천 해인사를 탐방하고 속리산을 거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집에서 여독을 풀면서 나는 코리나에게 물었다.
 
“여행 중에 네게 감명 깊었던 것이 무엇이었나? 네가 부처상을 보면서 빙그레 웃음을 머금은 부처가 정말 자비스럽고 인자하게 보인다고 했는데 ..”
 
“아버지 정말 그래요. 절에 들어갈 때에 대문 곁에 서 있는 사천왕들의 모습은 험악하기가 짝이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는데 대웅전 안에 자리잡은 부처는 평화가 절로 흘러나오는 느낌을 주었어요. 특별히 석굴암의 부처를 쳐다보고 있을 때는 그의 모습이 나의 존재를 부끄럽게 만들었어요.”
 
“나는 지금까지 석굴암 불상을 보고 느낀 온갖 표현을 다 들었지만, 너처럼 불상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가지게 한다는 말은 네게서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좀 상세히 설명해다오.”
 
코리나는 가방에서 수첩을 끄내어 뒤적거리며 말했다.
 
“아, 여기 있어요. 아버지 제가 그 불상 앞에 서서 그를 쳐다보고 있는 동안 네 가지의 인상을 느꼈어요. 불상을 처음 쳐다보는 순간에는 눈을 반쯤 뜨고 두툼한 입술을 굳게 다문 모습이 무뚝뚝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다만 석상을 조각한 섬세한 솜씨를 감탄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다음에는 그가 아주 인자스러우면서 동시에 또한 엄한 모습을 보여주었어요. 세 번째로 느낀 것은 그에게서 표현할 수 없는 평화가 흘러넘치는 것 같았어요. 마지막에는 그 앞에서 그를 조용히 쳐다보고 있노라면 그는 내 마음과 생각을 뚫어보면서 삶의 꿈과 설계를 위하여 허우적거리는 나를 연민의 정으로 내려다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어요. 그 순간 나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 티끌 같은 세상의 영광을 얻으려고 애쓰는 나의 모습을 그 앞에 그대로 드러내보이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어요.”      
 
목사가 되려고 기독교 신학을 전공하는 딸이 불상으로부터 받은 감명은 깊었다.
 
“아버지, 그 인자하고 평화스러운 불상을 신의 모습으로 받아드리고 생활화한 한국인이 제일 악한 죄수에게 내리는 형벌을 상징하는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드리고 그의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인간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여간한 마음의 결정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거라고 짐작이 가요.”<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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