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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은 파독광부가 독일땅에 온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63년 파독광부 1진이 독일에 도착하면서 재독동포사회가 시작되었고, 전세계 동포사회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독광부분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셨지만 정작 개인적으로는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고생도 많으셨을 겁니다.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어찌 몇마디 필설로 다하겠습니까만 파독광부분들중에 몇분이 독일땅에 와서 겪은 체험을 여기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파독광부의 삶은 그 자체가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러니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어렵게 글을 써가실 때, 서투른 점이 있더라도 많은 성원 바랍니다. 

김재승칼럼 어머님 죄송합니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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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독50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3,455회 작성일 13-08-24 10:41

본문

독일에서는 몸이 아프면 마을 곳곳에 있는 가정 주치의를 찾아가 진단서를 받아서 직장에 제출하면 유급병가를 낼 수 있다. 물론 병가로 쉬는 기간이 6주가 넘으면 보험회사에서 월급대신 일정한 생활비만 지불하기 때문에 본인 월급의 3개월 평균의 70%정도만 지급되어 수령액이 줄어들지만, 단기간은 특별 수당만 제하고 월급의 100%가 지급이 되니 수령액에 구애되지 않는다. 물론 몸이 아파서 근무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규정이지만, 워낙 일하기가 힘들고 또 일을 하기 싫은 사람들도 이규정을 이용해 거짓 병가를 내고 휴식을 취한다. 의사한테 가서 거짓으로 아프다고 하면서 진단서를 받아 오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힘들지 않은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야 대체적으로 착하게 근무를 하지만 광산이나 공장 같은 곳에서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제도를 악 이용해서 휴식을 취한다.
우리 동료들로 3-4개월 마다, 심하게는 매월 정기적으로 진단서를 제출하고 쉬는 사람들이 많았다. 기숙사 바로 옆에 가정주치의가 있어서 그곳을 찾아가곤 했는데, 문제는 거짓으로 병가를 내고 쉬면서 기숙사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다른 일을 하다가 광산관계자들이나 병원관계자들한테 발각이 되어 한국 사람들은 아프지도 않으면서 병가를 낸다는 소문이 시골마을인 그 주위에 빨리 퍼진다는 것이다.
바로 기숙사 옆에 마을 축구장이 있는데 병가를 낸 동료들이 그곳에서 축구를 하다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띠고, 병가를 낸 사람들이 다른 지방으로 부수입을 올리려고 사과 따는 일을 도운 다든지, Baumschule 라는 나무나 꽃을 가꾸어 파는 집에 가서 일들을 하니  소문이 나지 않을 리 없는 것이다. 아픈 사람이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지만 아파다면서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부수입을 올리려고 다는 작업장을 찾아 간다는 것도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짓이다.
나도 처음엔 정말 힘들어 일이 하기 싫으면 1년에 한번정도 의사한테 가서 허리가 아프다고 거짓 진단을 받아 1-2주 쉬곤 했는데, 좋지 않은 소문 때문인지 진단서 받아오기가 자꾸만 어려워진다. 그러자 병가를 잘 내주는 다른 의사를 찾아 옮기게 되고 어느 의사가 병가를 잘 내준다. 라는 소문이 나면 동료들이 그곳으로 몰려가곤 했었다.
허지만 그곳도 한 두 번이지 병가를 내기 위해 자주 갈수가 없으니 동료들 중에서는 자상(自傷)을 입히는 사람들도 생겼다. 작업 중에 일부러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이다. 손가락에 쇠로된 자제를 떨어트려 상처를 내고 작업을 하다가 다친 것처럼 병가를 낸다든가, 집에서도 일부러 상처를 내서 병가를 낸 사람들도 늘어났다. 생각해 보면 아무라도 할 수 없는 짓이고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짓들 이지만 자기 몸에 상처를 내서라도 쉬고 싶을 정도로 작업환경이 좋지 않고 또 몸이 지탱해 주질 못하니 그런 수법들을 쓴 것이다.  어떤 동료는 집에서 물을 펄펄 끓여서 양말을 벗고 부으면 화상도가 높지 않으니 양말을 신은체로 발등에다 끓은 물을 부어 화상을 입히고 응급차를 타고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받아온 동료도 있었다. 또 한국에서 옻나무의 옻칠을 가져다가 일을 하기 싫으면 옻칠을 몸에 발라 피부병이 생겼다고 병원에 가서 몇 주씩 입원한 사람들도 있다. 옷이 오르면 이곳 독일에서는 생면부지 병이니 병원에 입원을 시켜놓고 이것저것 조사를 하는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모르고 입원한 동료들한테 면회랍시고 찾아다니곤 했었는데 나중에 사연을 알고 나서 어떤 배신감 같은 것도 들곤 해서 면회는 다니지 않았지만 얼마나 일을 하기가 힘들면 저런 짓들을 할까 하면서 자신들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방법도 얼마못가서 병원에서 알게 되어 그다음부터서는 피부병으로 의사한테 가도 통하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내곤 했다. 비교적 양심적이고 남을 잘 속일 줄 모르는 독일 사람들은 광산생활도 천직으로 알고 착실하게 근무를 하는데 비해 이 제도는 오히려 우리 같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이용을 한다. 광산에서도 이제도를 악용한다는 것을 눈치를 채고 병가를 많이 낸 사람들은 해고를 시키느니, 3년을 마치고 연장을 하고자 할 때 연장이 되지 않으니 병가를 줄이라는 공고를 붙이곤 했다.
허지만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라는 속담같이 나중이야 어떻게 되든 우선 쉬고 보자라는 생각에 많은 동료들이 이제도를 악 이용했고, 어떤 동료들은 우리가 보기에도 심하다 싶은 정도로  자주 병가를 내고 쉬는 동료들이 있었다.
 
나도 광산에서 6km가 넘는 곳에 방을 하나 간신히 얻어 기숙사 생활을 청산했다. 할 줄 모르는 반찬이었지만 독일음식보다는 삼키는데 훨씬 부드러웠다. 여기저기 한국식품을 가져다 파는 사람도 생겨서 한국식품도 사다가 해먹을 수 있고, 비록 China Kohl이라고 불리지만 한국배추도 시중에서 판매되기 시작되어 소금과 고춧가루로만 버무려서 먹어도 독일 음식보다는 맛이 있었다. 제일 좋은 것은 여러 사람이 같이 사는 단체생활이 아니고 또 별의별 성격을 가진 한국 동료들 틈에서 벗어나 나만의 생활을 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그 집 주인도 그 집이 자기 집이 아니고 집 전체를 세를 얻어 살면서 방 한 칸을 나한테 다시 세를 놓았던 것이다. 부엌도 없는 조그마한 방안에 세수할 수 있는 세면대 옆에 곤로하나 가져다 놓고 간단하게 끓여 먹을 수 있게만 해 놓았다. 화장실도 밑에 층 주인집과 같이 써야 되며 근무를 할 때는 작업을 마치고 나오면서 샤워를 하기 때문에 따로 할 필요가 없지만 며칠 쉴 때나 휴가 때는 할 수 없이 밑에 층 목욕탕에 가서 샤워를 하곤 했다. 허지만 이런 불편함은 한국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허지만 아무래도 독일 사람들 틈에 파묻혀 사니 독일어도 더 배울 수 있을 것 같고 집주인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잘 도와주어 대체로 불편함이 없이 독일생활을 할 수 있었다.  독일어 때문에 얼마나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또 한 동료의 생명까지 잃지 않았든가 ?
독일어 단어를 모르니 물건을 살 때는 손짓발짓으로 흉내를 내야만 하고 관공서에 가서 일을 보려면 꼭 통역을 대동하고 다녀야 했다.
동료 중에 한사람은 오자마자 자동차를 한 대 구입해서 운전을 하다가 교통법규위반으로 경찰한테 걸리자, 독일어를 한답시고 “Polizei Onkel ein mal gucken!”라고 말하자 경찰이 어디를 보아란 말이냐고 몇 번 묻곤 했단다. “경찰아저씨 한번만 봐 주세요”를 나름대로 번역을 해서 독일어를 잘 배보겠다고 했던 말이다. 언어 때문에 목숨을 잃은 동료도 있다.
그 동료는 막장 기계공이었는데 막장에서 일을 하다가 탄을 파면 자동으로 Panzer위로 떨어져 밖으로 실려 나가는데, 천정에서 큰 바위가 떨어져 실려 내려가는 것을 한 동료가 보고 인터폰을 이용해서 “나 한태는 Anbauhammer가 없으니 바위가 너 있는데 까지 오면 Panzer를 세워 바위를 부셔서 보내”라고 하는 말을 그 다음 동료에게 알리면서 “여기 바위가 실려 내려가니 조심해!” 하며 전체적인 주의를 주었는데, 이 한국동료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 일을 하다가 Panzer밖으로 불거져서 움직이는  날카로운 바위에 배가 찢어져 창자가 밖으로 튀져 나올 정도로 상처를 입고 병원에 실려 가다가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독일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한 동료를 잃고 광산장으로 치른 장래식장에 우리는 한 덩어리가 되어 통곡을 하면서 “우리는 살아남아야 된다.” 며 서로 안전을 다짐하곤 했다 . 또 한 동료는 일을 마치고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너무 낮아 타면 위험하다고 써 붙여 논 탄을 실어 나르는 고무Band를 타고 오다가 Band와 천정사이에 끼어 구르면서 척추를 다쳐 영영 걸어 다니지 못하고 휠체어 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독일어를 못한 우리들을 위해서 광산에서 채용한 한국통역들도 오히려 독일어 못한 우리를 이용해서 개인의 뱃속을 채운다. 시청이나 광산에서 일을 봐주고 꼭 수고비를 요구하는 것이다. 수고했다며 고마운 마음에서 준 스스로의 선물이라면 이해가 가지만 우리를 위해서 채용되어 자기의 본 임무를 수행해야 될 사람들이 옛날 한국에서 했던 똑같은 수법으로 돈을 갈취를 하는 것이다. 허지만 그런 소문은 금방 나기 마련이다.
누가 무슨 일 때문에 얼마를 통역한테 주었다는 소문이 자주 나자 우리 같이 독일로 간 52명은 참을 수 없다며 단체로 그 통역에게 대항을 하기로 했다. 몇 번 면담을 요청해서 그런 일을 하지 말아줄 것을 요구를 했지만 그 짓은 멈추지가 않고 이 사람 저 사람이 당했다는 소문만 자꾸 늘어난다. 우리 같이 온 동료 52명은 그 통역이 행한 비리를 기록을 하고 서명을 한 다음, 일인당 20, -DM씩 회비를 걷어 주말에 버스를 한 대 대절을 하고 그 통역을 버스에 잡아 태우고 그 시절 Düsseldorf에 한국 대사관에서 파견 나온 노무관 한태 연락을 해서 주말인데도 출근을 하게 한 다음 우리 입장을 전달하는 단체행동을 했다. 이 모든 사실을 번역을 해서 광산 측에도 알리고 이 사람을 해고시켜 줄 것을.
사정이 있거나 동참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빠지고도 40명이 넘는 인원이 그 통역을 버스에 실고 와서 고발을 하는데 그 노무관도 믿지 않을 수 없고, 사건이 커지기 전에 그 선에서 마무리 지고 싶었을 것이다.
“본인이 모든 문제를 광산 측과 협의해서 해결할 테니 저를 믿고 돌아가 주십시오.”라는 확답을 받고 우리는 돌아왔다. 나중에 연락이 오기를 이 사건을 광산 측에 알렸으며 광산 측과 합의하에 이번 한번은 경고로 마무리를 하고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약속을 했다는 연락이 왔다. 우리는 이제는 그 짓을 않겠지. 생각하며 좋아했는데, 그 통역은 그 후에도 반성하는 기색도 없이 계속 그런 못된 짓을 한다는 동료들의 제보가 있었다. 더 참을 수 없지 않은가? 우리는 다시 노무관 한태 연락을 해놓고 우리 스스로가 사람을 시켜 그동안 진행사항을 독일어로 번역을 한 다음, 광산 사장을 면담 요청을 해서 사실을 고하고 그 통역을 광산통역은 그만두고  지하로 내려가 우리와 같이 광산 일을 하도록 했다.
한국 사람들끼리 누워서 침 뱉는 격이지만 우리들이 더 이상 불이익을 당할 수만 없기에 그런 일을 했었는데 결국은 독일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던 시절의 애로사항들이었다.
독일 가정에서 생활을 하니 빨리 독일 사회에 적응되어 가는 느낌이다. 주인집 사람들의 도움으로 관공서 일이나 다른 애로사항들도 척척 해결해 준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가져온 운전면허증도 일 년 안에 독일 면허 로 바꿔야 되는데, 독일 온지 1년 안에 6개월 이상 독일에서 운전을 했다는 확인서를 변호사 공증을 받아 교통부에 제출을 해야 되는데 주인집 아주머니가 관공서 찾아다니며 서류준비해서 또 자기차를 6개월 이상 운전을 했다는 증명서를 공증을 받아 제출해서 독일 면허증으로 바꿀 수가 있었다. 도움 없이는 힘든 일들을 신경을 써서 척척 처리해 준다. 주말이면 집에서 가까운 홀란드로 시장을 다녀오기도 하고 도울 수 있는 일은 도우려고 하는 주인집 부부에게 감사하며  기숙사에서 나오길 참 잘했다. 는 생각을 했다. 주인집에 보답한답시고 할 줄 모르는 한국 음식이지만 배추를 사다가 김치를 담아 같이 밥을 먹기도 하고, 봄철에 공원에 가보면 많이 올라온 고사리를 꺾어서 삶아서 말리는 것을 보면 독성이 있는 풀이라고 먹지 말라고 말리면서도 고사리를 생선과 같이 매운탕을 끓여 주인집 식구들을 초대해서, 맛있다며  같이 식사를 하고 했던 것이 사귐이 되어 주인집과 점점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좁은 방 한 칸이지만 내가 유일하게 휴식을 취하며 지낼 수 있는 안식처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공동생활을 할 때처럼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니 마음이 편안해지니 차분하고 계획적인 나의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김장이랍시고 해서 마땅하게 보관할 자리가 없어 그 집 차고에 넣어 놓고 4개국 여행을 다녀와 보니  김치 한 양동이를 주인집에서 먹어 치워 놓고도 모른 척 했던 일이나 고사리를 삶아서 그 집 차고 위에다 말릴 때 이웃들이 무엇이냐고 물어오면 해명을 하느라 애를 먹었던 일들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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